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를 맡은 김선욱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김선욱이 관객에게 등을 보인 채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른손으로 건반을 누르자 음표들이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퍼졌다. 동시에 왼손은 가볍게 허공을 저으며 지휘를 했다. 왼쪽에서 들리는 가장 적합한 바이올린 소리를 끌어오기도 하고, 또한 가장 잘 어울리는 클라리넷 소리를 뒤쪽에서 데려오기도 했다. 그의 손끝을 타고 베토벤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1인 2역 김선욱이다. 연주와 지휘를 동시에 했다. 두 사람 몫을 홀로 해내니 힘이 두 배로 들었을 텐데 거뜬히 ‘미션 클리어’했다. 김선욱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Chamber Orchestra of Europe·COE)와 호흡을 맞춰 이틀에 걸쳐 롯데콘서트홀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를 끝마쳤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를 맡은 김선욱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를 맡은 김선욱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7일 공연에서는 1번, 2번, 4번을 들려줬다. ‘피아노 협주곡 1번 C장조(Op.15)’는 모차르트와 하이든 스타일을 의식적으로 모방했던 것에서 벗어나 점차 대담해지는 ‘베토벤스러움’이 드러나 있다. 풍성한 음향의 대조와 의외의 도입부가 불쑥 끼어드는 등 독창성의 씨앗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를 닮은 모티브로 시작됐다. 오케스트라가 힘차고 강렬한 베토벤 특유의 리듬을 선보인 뒤, 곧 피아노가 이를 이어받아 보다 길고 유려한 흐름으로 확장했다.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선율을 주고받으며, 이후 피아노는 화려한 카덴차를 뽐냈다(1악장).
2악장은 클라리넷, 바순, 호른이 차분하고 중후한 분위기를 잡아주는 느린 악장이다. 특히 클라리넷과 피아노의 앙상블이 돋보였다. 피아노의 섬세한 터치와 표현력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3악장 론도는 경쾌하고도 유머가 넘쳤다. 곡을 마친 뒤 김선욱은 클라리넷 연주자를 일으켜 세워 관객에게 인사하게 했다. 클라리넷 연주자는 센스있게 하트 인사를 날려 박수갈채를 받았다.
‘피아노 협주곡 2번 내림B장조(Op.19)’는 초연(1795년) 이후 꾸준하게 악보를 고치는 일이 계속됐다. 수정작업을 끝내고 마침내 악보가 출판된 것은 1801년이다. ‘2번’은 ‘1번’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창작됐으나, 계속 보완작업을 거친 탓에 출판번호가 늦다. 베토벤은 악보 출판사에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내 최고의 작품은 아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주제가 빠르게 교대하며 명확하고 뚜렷한 대조를 형성했다(1악장). 느리고 서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유려한 선율을 그려 나갔고, 베토벤이 즉흥적으로 연주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도 언뜻 언뜻 보인다(2악장). 3악장 론도는 롬바드 리듬, 또는 스카치 스냅이라고 불리는 리듬으로 시작해 경괘하게 종결됐다.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Op.58)’는 1808년 12월에 초연됐다. 베토벤은 4시간에 걸쳐 공연을 기획했다. ‘운명 교향곡’과 ‘전원 교향곡’을 비롯해 피아노 협주곡 4번까지, 엄청난 대작을 한꺼번에 선보였다. 청력 손상이 계속 심해지는 나날이었다. 그날은 베토벤이 협연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 오르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1악장에서 지배적으로 쓰인 리듬은 ‘운명 교향곡’의 핵심 모티브와 같았다. 운명의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모티브는 여기서 몹시 아름답고 느긋한 리듬으로 쓰였다. 정교하고 섬세했다. 이 악장에서 피아니스트는 강철 같은 영웅, 또는 변덕스러운 주인공이 아니라 부드럽게 노래하는 서정적 인물에 가까웠다.
2악장 또한 마찬가지다. 무엇인가에 저항하듯 오케스트라가 거친 음향을 연주해도 피아노는 흔들림 없이 평온함을 이어갔다. 오히려 오케스트라는 피아노의 분위기에 압도돼 어느새 마음이 누그러졌다. 피아노 소리에 슬픈 심연의 끝이 묻어났다.
3악장은 리드미컬한 주제로 이어진 론도지만, 베토벤이 걸작을 쏟아낸 시기에 쓰인 만큼 베토벤 협주곡의 피날레 중 손꼽힐 정도로 우아하고 세련된 움직임을 만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몇 차례 퇴장과 입장을 반복하며 관객에게 인사한 김선욱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2악장을 앙코르로 선사했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를 맡은 김선욱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김선욱은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이번이 두 번 째 만남이다. 2022년 11월 악단이 내한했을 때 협연자로 처음 함께했다. 키릴 카라비츠의 지휘로 두 번 공연했는데, 그때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과 4번을 연주했다. 이날의 좋은 기억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다시 합을 맞추게 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지휘할 때는 어떤 느낌일까. 김선욱은 오케스트라와 ‘한 몸’이 된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너무나도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연주도 훨씬 더 주도적으로 들려요. 지휘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단원들은 자기 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내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더 들으려고 하거든요. 저를 포함한 모든 연주자가 유가적으로 융합돼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보다 더 좋은 조합은 없어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를 맡은 김선욱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를 맡은 김선욱이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8일 공연에서는 3번과 5번을 연주했다.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Op.37)’는 우울의 감정을 담은 동시에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더욱 변화무쌍한 관계를 맺고 있다. 소나타 형식에 기반하지만, 주제 선율뿐 아니라 그 선율을 잇는 연결구 또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고전주의의 단정을 넘어서는 풍요로운 표현들이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1악장은 비애와 절박함이 감돌았다. 현악 파트와 관악 파트가 서로 선율을 주고받으며 긴장감을 쌓아 올린 후 피아노 독주가 시작됐다. 피아노는 앞선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며 오케스트라 반주 위에서 노래하다가 때로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주제를 더욱 화려하게 변주했다.
2악장 라르고는 극적인 면모가 강하게 드러났던 1악장과 다르게 한층 평온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바이올린의 서정적 선율과 피아노의 섬세한 움직임이 돋보였다.
마지막 3악장은 통통 튀는 리듬으로 활기찬 진행을 이어가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힘찬 분위기로 바뀌어가며 장대하게 끝맺었다. 김선욱은 자리에 앉아 단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피아노 협주곡 5번 내림E장조(Op.73)’는 ‘황제’라는 애칭이 붙어있다. 여러 설이 있지만, 출판사에서 이 곡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위풍당당한 분위기와 웅장한 분위기에 걸맞은 제목을 고심하다 ‘황제’를 선택했다는 설이 신빙성이 높다.
1악장은 대서사시의 서막을 여는 듯한 장대한 분위기로 시작됐다. 오케스트라의 묵직한 화음 위에서 김선욱은 건반을 화려하게 오르내리는 음형을 연주했다. 군대 행진곡풍의 이야기를 뛰어넘으려 달콤 선율을 들려주며 부드러움을 절묘하게 연결했다.
2악장은 애간장을 녹였다. 만약 꿈길이 있다면 이 음악이 배경으로 깔렸으리라. 오케스트라는 낮고 풍성한 화음을 연주하고, 피아노는 그 위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불멸의 연인’을 찾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3악장이다. 밤이 낮으로 변하는 그 신비로운 순간은 부드러운 호른의 지속음으로 이어진다. 기분 좋은 상승의 움직임을 가득 담은 마지막 론도 피날레에서는 승전고를 올리는 것 같은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프레이즈, 그리고 피아노의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움직임이 돋보였다.
이날의 앙코르는 베토벤이 아닌 바흐였다. 칸타타 BWV.106 ‘하느님의 때가 최상의 때로다(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를 한음 한음 정성을 다해 눌렀다.
<백브리핑> ‘황금빛 울림으로 빛난 베를린의 무대’ 외국서도 극찬
김선욱이 지난 3월 22일 유럽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벨기에 리에주 공연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빈체로 페이스북 캡처
김선욱이 지난 3월 22일 유럽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벨기에 리에주 공연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다. ⓒ빈체로 페이스북 캡처
김선욱과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는 한국 공연에 앞서 이미 벨기에,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 투어를 진행했다. 한국 공연은 대전과 대구에서 열렸고, 서울에서는 LG아트센터에서 1회, 롯데콘서트홀에서 2회 팬들을 만났다. 한국 투어를 마친 뒤 영국에서 두 차례 더 공연한다.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엔 지휘자가 아닌 한 명의 연주자로서 함께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느낌을 받습니다.”(베르나르트 하이팅크) 1981년 창단된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예술감독이나 상임지휘자 없이 각국의 오케스트라 수석 및 저명한 실내악연주자들이 모여 최상의 앙상블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창단 초기부터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고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야니크 네제-세갱, 사이먼 래틀, 안드라스 쉬프 등 ‘오케스트라계의 어벤저스’라 불리는 거장들이 명예단원으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아왔다.
창단 이래 지난 44년간 발매한 약 250여장의 음반들은 그래미상 2회, 그라모폰 올해의 음반상 3회 수상이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수준급 이상의 완성도와 예술성을 고루 갖춘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피에르 로랑 에마르, 안드라스 쉬프 등과 협연한 그들의 음반은 국내 클래식 팬들에게도 필청 음반으로 손꼽힌다.
김선욱이 지난 3월 24일 유럽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챔버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페이스북 캡처
김선욱이 지난 3월 24일 유럽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챔버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페이스북 캡처
김선욱이 지난 3월 24일 유럽챔버오케스트라와 함께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챔버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페이스북 캡처
김선욱과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연주는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음악기획사 빈체로의 2025년 첫 공연이다. 빈체로는 페이스북에 지난 3월24일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챔버홀에서 열린 3번·4번 공연 기사를 올렸다. ‘황금빛 울림으로 빛난 베를린의 무대’라는 제목으로 올린 모르겐포스트(Morgenpost)의 리뷰기사를 정리했다.
“김선욱의 연주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크게 만들어내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피아노 음색이다. 특히 피아노(p) 같은 여린 음형에서는 건반에서 빛이 나듯 투명한 소리를 만들어내며 노래하듯 연주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베토벤이 힘과 드라마를 요구할 때는 그에 걸맞은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예를 들어 피아노 협주곡 4번의 유명한 느린 악장에서 김선욱은 이를 완벽히 표현해 내며, 동시에 오케스트라를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태도로 이끌어갔다.
그의 음색은 섬세하고 황금빛 피아니시모(pp)부터 에너지 넘치는 강렬한 타건의 저음 포르티시모(ff)까지 폭넓게 펼쳐지며,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도 전혀 무겁게 들리지 않는다.
김선욱은 피아노 연주와 지휘에서 단 몇몇의 연주자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보여줬다. 그는 악장의 전체적인 구조를 꿰뚫음과 동시에 세부적인 부분 하나하나에 세심함과 상상력을 불어 넣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피아니시모로 마무리하며 한 프레이즈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거나, 조성이 변하기 직전 살짝 머뭇거리는 듯한 표현을 넣어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으로 들리지 않고, 음악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또한 그는 오케스트라와의 조화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독주자가 아닌 ‘Primus inter pares’(동등한 연주자들 중 선두자)로서 앙상블을 이끌어가며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하나로 어우어지는 완벽한 음향적 균형을 만들어낸다.
그의 뛰어난 베토벤 해석에 관객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고, 김선욱은 앙코르 연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park72@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