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조소프라노 백재은과 음악평론가 장일범이 ‘당신 곁의 아리아’를 출간했다. ⓒ장일범페이스북 캡처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푸치니 음악엔 마음속 묵은 감정을 끌어당겨 폭발시키는 힘이 있어요. ‘내 텅 빈 마음은 이제 당신이라는 희망으로 가득 찼소’하는 대목에서 이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이C 음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죠. 이 대목에서 관객들은 모두 크나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요. 여기엔 용기가 없어 하지 못했던 사랑 고백,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감사에 대한 토로가 담겨 있어요. 푸치니의 이 아리아를 듣다 보면 그간 내 안에 담겨만 있었지 감히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 벅찬 감정들이 선율을 따라 넘쳐 흘러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최근 들어 더욱 삭막해진 사회에 이런 아름다운 감정을 부풀어 넘치게 해주는 음악들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요? 〈라 보엠〉은 19세기 사람들보다 오히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음악이 아닐까 싶네요. --49~50쪽 〈아름다운 감정이 넘쳐흘러요 ‘그대의 찬 손’> 중에서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흰머리 가발 쓰고 피아노 치던 왕이 요제프 2세인데, 모차르트를 물심양면으로 밀어줘요. 요제프 2세가 사망하자 모차르트는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죠. 후임 왕 레오폴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모차르트는 기념작 〈티토왕의 자비〉를 작곡하게 됩니다. 이게 잘되어 새 왕에게 잘 보이면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이 와중에도 그는 돈은 벌어야 하니 집에서도 이동하는 마차에서도 쉬지 않고 〈레퀴엠〉과 〈마술피리〉를 동시에 작곡했대요. 그러면서도 〈티토왕의 자비〉라는 걸작을 단 18일 만에 작곡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누적된 피로에 결국 〈마술피리〉를 지휘하다 쓰러져 〈레퀴엠〉을 흥얼거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231쪽 〈복수보다 사랑을 ‘내 마음은 지옥의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네’> 중에서
‘한국의 카르멘’으로 불리며 국내외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해온 메조소프라노 백재은과 해박한 지식과 유쾌한 해설로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서 온 음악평론가 장일범이 감정과 예술이 만나는 가장 격조 있는 안내서 ‘당신 곁의 아리아’(그래도봄·306쪽·1만9800원)를 출간했다.
오페라에서 가장 빛나는 열여섯 곡의 아리아를 사랑, 열망, 운명이라는 감정의 흐름과 예술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대담집 형태로 엮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다양한 얼굴, 인간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열망과 도전의 순간, 운명 앞에서 삶과 죽음을 노래하는 예술의 깊이를 차근히 짚어 나간다.
오랫동안 음악으로 인연을 맺어온 두 사람은 cpbc 평화방송 라디오 ‘장일범의 유쾌한 클래식’에서도 그 인연을 이어갔다. 백재은은 이 프로그램의 한 코너인 ‘백재은의 행복한 오페라’를 맡아 매주 오페라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진행자가 바로 장일범이다.
그들은 아리아 한곡을 놓고 작품의 배경과 인물의 감정, 음악의 구조, 무대 위 실제 이야기를 나누며 곡이 흐르는 동안에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 활기찬 방송을 만들어갔다. 서로 주고 받는 입담의 케미가 예술급이다.
그렇게 쌓인 무대 밖 음악 수다가 스튜디오를 넘어 책으로 이어졌다. 이 책에서 성악가 백재은은 주로 오페라 속 인물을 노래하기 위해 탐구했던 문학과 역사, 시대 배경, 성악가들의 무대 뒤 이야기를 들려준다. 음악평론가 장일범은 작품의 구조와 작곡가의 의도, 음악사의 맥락을 세심하게 풀어낸다.
메조소프라노 백재은과 음악평론가 장일범이 ‘당신 곁의 아리아’를 출간했다. ⓒ그래도봄 제공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도 때로는 농담처럼 날카롭게 주고받는 이야기는 오페라를 무대 위 거대한 서사가 아닌 일상의 언어로 끌어내어 우리 내면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작품의 구조와 감정, 시대와 인물을 넘나들며 오페라를 낯선 장르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감정과 감각을 비추는 거울로 바꿔 놓는다.
‘당신 곁의 아리아’는 한 곡의 아리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예술적·인문학적 대화의 기록이다. 단순한 음악 해설을 넘어 아리아의 바탕이 된 문학 작품, 역사적 맥락, 시대의 정서, 젠더와 사회적 위치, 그리고 철학적 사유까지 폭넓게 조망한다.
예컨대 비제 <카르멘>의 ‘하바네라’는 단순한 유혹의 노래를 넘어 여성의 욕망과 자유에 대한 선언으로 읽히고, 푸치니 <토스카>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죽음을 앞둔 예술가의 절절한 고백이자 오페라 미학이 응축된 장면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한 곡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예술과 인간, 감정과 사유가 만나는 접점을 섬세하게 따라가게 된다.
오페라의 가장 빛나는 순간인 ‘아리아’를 중심으로 풀어낸 이 책은, 사랑에 빠졌을 때,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간절히 소망하는 바가 있을 때 등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삶의 풍경이 수백년 전 오페라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해준다.
아리아는 결코 무대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즐겨보는 영화나 드라마, 광고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낸다. 영화 ‘전망 좋은 방’에서는 푸치니의 아리아 ‘오 사랑하는 아버지’와 ‘도레타의 꿈’이 장면의 흐름을 이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선 오페라 ‘투란도트’ 무대가 액션과 맞물려 등장하고, 비제의 ‘하바네라’는 영화 ‘업타운 걸’을 비롯하여 광고 및 애니메이션까지 넘나든다.
아리아는 그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담은 음악이며, 듣는다는 건 누군가의 고백을 엿듣는 동시에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을 마주하는 일이다. 이 책은 오페라의 문턱을 낮추는 친절한 해설이자 익숙한 선율 속에서 새로운 감정을 발견하게 해주는 마음의 지도와 같다. 오페라가 어렵기만 한 분들에게 첫 감상의 길잡이가 되고, 퍽퍽한 일상에서 감정의 파동이 필요한 분들에겐 따스한 위로가, 예술을 통해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 사유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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