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의 오페라 전문 지휘자인 양진모는 ‘히스토리(History)’와 ‘오페라(Opera)’를 조합해 만든 ‘히스토페라’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책과함께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오페라는 인간이 창조한 예술 형식 중 가장 복합적이고도 독창적인 장르다. 음악, 문학, 연극, 미술, 무용이 어우러진 종합예술로서 각 예술의 정수를 결합해 인간 경험의 깊이를 표현한다. 이처럼 오페라는 역사적 사건과 인간 내면을 동시에 탐구하는 탁월한 도구다.
베르디의 <돈 카를로>는 스페인의 종교 갈등과 권력 구조를 섬세하게 그렸고,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제국주의 시대의 문화 충돌과 비극을 진지하게 조명한다. 이들 작품은 단순히 시대의 재현을 넘어, 역사적 사건이 개인의 삶과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깊이 있게 탐색한다.
국내 유일의 오페라 전문 지휘자인 양진모는 ‘히스토리(History)’와 ‘오페라(Opera)’를 조합해 만든 ‘히스토페라’(책과함께·360쪽·2만5000원)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오페라의 본질적 가치를 역사라는 새로운 시선을 통해 살펴보는 여정의 결과물이다.
양진모는 자신이 직접 지휘한 작품을 포함해 역사적 의의가 깊은 오페라 열편을 선정해 그 안에 담긴 역사적 배경을 섬세하고 유려하게 풀어낸다. 이 책과 함께 하다 보면 르네상스의 황혼기부터 냉전 시대까지 각 시대의 정신과 격동의 역사가 오페라라는 예술 속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나아가 오페라가 단지 예술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를 이해하고 성찰하는 하나의 인문학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 지휘자의 시선에서 전하는 오페라 무대 위 격동의 세계사
그렇다면 역사와 오페라를 접목한 ‘히스토페라’라는 새로운 시도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 배경에는 역사와 예술이 공존하는 특별한 환경에서 성장한 저자의 삶이 자리하고 있다.
사학자이자 미학자였던 조부의 서재는 역사와 예술 관련 서적으로 가득했으며, 조부와 나눈 대화는 언제나 역사와 예술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또한 부친은 열정적인 클래식 음악 애호가여서 집 안은 항상 음악으로 가득했으며,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곡이 탄생한 배경과 작곡가의 삶, 시대적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저자의 유년 시절 경험은 오페라와 역사를 바라보는 독창적이고도 깊이 있는 시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오페라야말로 인간의 감정, 욕망, 희생, 사랑이 총체적으로 담긴 예술로, 역사를 가장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장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이 믿음은 책 전반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며 ‘히스토페라’의 해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이 책의 가장 특별한 점은 저자의 시선이다. 지휘자로서 실제 무대에 섰던 경험은 각 작품에 대한 분석에 생생한 감각과 깊이를 더한다. 예컨대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를 지휘하며 직접 체감한 르네상스의 창조 정신과 음악 혁신,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에서 마주한 프랑스 혁명의 격렬한 감정, 푸치니의 <토스카>에서 되살아난 나폴레옹 치하의 격동과 진실한 사랑의 서사를 생생하게 풀어낸다.
이뿐만 아니라 오페라의 구조, 음악 형식, 무대 연출, 대본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역사적 배경이 예술 속에 어떻게 스며들었는 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해설을 넘어 예술가의 직관과 인문학적 통찰이 조화를 이루는 해석이다.
그리고 각 장 말미에는 저자가 직접 추천하는 음반과 영상 콘텐츠가 소개돼 있어 독자들은 오페라의 감동을 더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다. QR코드를 통해 유튜브 영상으로 바로 연결되도록 구성해, 독서와 감상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배려도 놓치지 않았다.
● 엄선한 열편의 오페라...음악이 기록한 권력·사랑·혁명의 장면들
이 책은 열편의 오페라를 소개한다. 한국에서 주로 소개된 오페라부터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역사 속 중요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등을 엄선했다.
먼저 1장 ‘르네상스의 황혼기와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에서는 르네상스 말기의 인문주의 정신과 예술 혁신을 배경으로 탄생한 최초의 본격 오페라로 평가받는 〈오르페오〉를 통해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르네상스 미술과 음악의 발전과 함께 〈오르페오〉의 탄생과 음악적 양식을 설명한다.
2장 ‘바다의 공화국 베네치아와 베르디의 〈두 사람의 포스카리〉’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 체계와 귀족들의 권력 투쟁을 바탕으로 한 부자간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다. 베르디는 이 작품에서 권력에 희생되는 인간의 고뇌를 음악적으로 묘사하며, 베네치아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개인 서사의 접점을 제시한다.
3장 ‘보르자 가문의 검은 야욕과 도니제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자〉’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악명 높은 귀족 가문 보르자의 권력과 음모, 그리고 루크레치아의 내면적 고통을 조명한다. 잔혹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적인 정을 보여주는 오페라 속 루크레치아는 단순한 악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인물로 재해석된다.
그리고 4장 ‘피로 물든 영국 튜더 왕조와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에서는 왕권과 사랑, 종교개혁의 갈등 속에서 희생된 안나의 운명을 통해 튜더 왕조의 권력 투쟁을 그린다. 작곡가 도니제티는 이 작품에서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여성의 비극을 절절하게 묘사한다.
다음으로 5장 ‘대서양을 뒤흔든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베르디의 〈돈 카를로〉’는 16세기 스페인의 정치적 긴장과 종교적 갈등을 배경으로 펠리페 2세, 왕세자 카를로, 왕비 엘리자베타 사이의 삼각관계를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종교 재판, 독재 권력, 인간 내면의 고뇌를 복합적으로 풀어냈으며, 저자는 당시 시대적 배경인 스페인 무적함대와 레판토 해전에 대해서도 함께 조명한다.
6장 ‘러시아의 차르 시대와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는 러시아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의 정치적 고립과 민중의 불안, 권력의 불안정함을 다룬다. 무소륵스키는 서구 오페라와 달리 러시아 민중의 집단 심리와 역사적 현실을 사실주의적 음악으로 표현하며, 독특한 민족적 색채를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7장 ‘국민 주권의 태동 프랑스 대혁명과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는 프랑스 혁명의 열기 속 시인 셰니에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자유와 평등, 사랑과 희생을 노래한 작품이다. 공포정치와 이상주의의 충돌, 민중의 열망과 개인의 비극이 교차하는 극적 긴장감을 잘 표현했다. 작품의 배경이 된 프랑스 혁명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도 함께 살펴본다.
8장 ‘권력의 정점에 선 나폴레옹과 푸치니의 〈토스카〉’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 로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음모와 예술가, 연인의 비극적 운명을 소개한다. 푸치니는 이 작품에서 권력에 맞선 예술가와 희생적 사랑을 사실주의적 음악으로 그려냈으며, 극도의 긴장감과 감정의 폭발이 특징이다.
9장 ‘서양 열강의 식민지 침탈과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 미국 해군과 일본 여성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은 식민지적 시선과 문화 충돌을 예술적으로 녹여낸 오페라로, 나비부인의 운명은 동양 여성에 대한 서구의 환상과 현실을 대조시킨다.
마지막으로 10장 ‘치열했던 냉전 시대와 아담스의 〈닉슨 인 차이나〉’는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을 소재로 한 현대 오페라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정치의 연극성, 문화적 오해, 세계 질서의 재편을 주제로 삼으며, 미니멀리즘 음악과 역사적 상상력이 결합된 독특한 시도를 보여준다.
● 감정과 역사를 관통하는 예술의 언어에서 오늘을 발견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은 단순한 오페라가 아니다. 그것은 각각의 시대가 품었던 열망과 두려움, 사랑과 투쟁의 기록이자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품은 시대의 초상이다. 저자는 오페라와 역사, 그리고 삶과 예술적 여정이 만나는 교차점을 따라가며 선율에 스며든 인류의 감정과 사건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오페라는 단지 귀로 듣는 예술이 아니라 인간이 겪어온 갈등과 선택, 상실과 구원의 기억이다. 각 작품의 선율과 대사는 당시의 정서를 생생히 되살리고, 우리는 무대 위 인물들의 희비 속에서 오늘의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게 된다. ‘히스토페라’는 그 감정의 잔향과 역사적 맥락을 촘촘히 연결하며, 예술이 어떻게 시간을 건너 우리에게 말을 거는 지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저자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오페라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기회를 제공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반추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한다. 그 바람처럼 ‘히스토페라’는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흥미롭고 친절한 길잡이가, 친숙한 이들에게는 익숙한 무대 뒤편에 감춰진 의미를 새롭게 비추는 통찰의 렌즈가 될 것이다. 특히 역사, 정치, 철학, 미술, 문학 등 인문학의 다양한 층위가 오페라라는 복합 예술 안에서 어떻게 융합되고 구현되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히스토페라’는 단연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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