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선 작가의 ‘카르페 디엠’. 벨벳, 폴리에스테르 자수실. 76X112cm. 2018. ⓒ스페이스유닛플러스 제공
[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을지로3가역~을지로4가역 주변은 아직도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긴다. 고층 빌딩이 즐비하지만, 대로변과 골목길 곳곳에 다닥다닥 작은 가게들이 붙어있다. 옛 사진을 뚫고 나온듯한 인쇄소, 철공소. 조명가게, 타일가게 등이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다.
그 중간에 있는 을지로3가역의 6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스페이스유닛플러스’(서울시 중구 을지로 143 1층)가 있다. 다양한 예술실험을 지향하는 공간이다. “이런 곳에 갤러리가 있다는 게 놀랍다”라는 반응이 나오는 핫한 장소다.
이곳에서 ‘우리는 꺾인 꽃 앞에서 생을 추모하면서도, 그 정지된 아름다움 속에서 퇴폐를 예찬한다’라는 제목의 기획전이 열린다. 강수연, 이인선, 조상근, 한지민 작가의 4인 전시회다. 오는 9월 11일(목)부터 10월 18일(토)까지 관객을 만난다. 약 한달 동안 진행되는 데 수요일~일요일(오후 1시에서 6시까지)만 문을 연다. 오프닝 행사는 9월 11일 오후 6시에 열린다.
강수연 작가의 ‘다시...소멸적 풍경’. 꽃, 복합매체. 가변크기. 2025. ⓒ스페이스유닛플러스 제공
이번 전시는 꺾인 꽃을 상징으로 존재의 나약함과 욕망, 죽음과 허무, 아름다움의 관계를 탐구한다. 꽃은 삶의 절정에서 가장 눈부시게 피어나지만, 동시에 곧 닥쳐올 죽음을 예고한다. 인간은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붙잡기 위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꽃을 꺾는다. 이 행위는 생명을 끊는 동시에, 사라질 순간을 영원히 붙잡고자 하는 모순적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욕망은 결국 허무, 즉 바니타스(vanitas)로 귀결된다.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헛됨’ ‘공허’ ‘가치 없음’ 등을 뜻한다.
전시는 이러한 허무 앞에서도 우리가 멈추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 우리는 사라짐을 견디지 못해, 파괴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구원의 가능성을 갈망한다. 꺾인 꽃은 삶과 죽음, 매혹과 혐오, 찰나와 영원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아름다움에 깃든 죽음, 그리고 죽음에 깃든 아름다움을 마주하며,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본질적 모순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강수연 작가의 ‘다시...소멸적 풍경’은 버려지는 꽃들을 소생시키는 설치작업이다. 삶과 죽음을 연결하고, 인공의 색을 입힌 꽃잎은 시듦 안에서 퇴폐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인선 작가의 ‘카르페 디엠’은 죽음의 그림자를 나타내는 해골과 생의 활기를 뿜어내는 꽃 이미지를 대치한다. 작품은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유쾌한 조롱으로 비틀고, “오늘을 즐겨라”라는 가벼운 웃음을 던진다.
조상근 작가의 ‘619 trace43’. 110X110cm. acrylic & black flakes. gel, pencil on paper. 2018. ⓒ스페이스유닛플러스 제공
조상근 작가의 ‘619 trace43’은 흑백의 강렬한 대비로 비틀리며 소멸하는 꽃잎의 순간을 응시하게 한다. 한지민 작가의 ‘일부는 꿈속에 남아있고 나머지는 날개가 되어라’는 찢고 꺾은 종이로 시든 꽃잎처럼 단절과 소멸의 흔적을 남기지만, 선과 형태를 화면 밖으로 확장하며 죽음을 넘어선 열린 서사를 제시한다.
이들 네 작품은 서로 다른 매체와 시선으로 죽음과 허무,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의 모순을 보여준다.
한지민 작가의 ‘시가 된 시간’. Linocut, Collage on Korean paper. 76.6X146.6cm. 2024. ⓒ스페이스유닛플러스 제공
이번 4인 기획전은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에서 영감을 받았다.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종합주류기업 아영FBC의 디아블로 시그니처 시리즈 와인 후원으로 진행된다.
‘악마의 와인’이라는 도발적인 이름을 지닌 디아블로는, 예술처럼 일상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프리미엄 와인 브랜드다. 디아블로가 내세우는 ‘악’과 ‘퇴폐’의 상징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강렬한 감각과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꺾인 꽃이 소멸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드러내듯, 디아블로는 퇴폐와 매혹의 경계에서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동시에 이번 전시는 을지로 예술가와 예술공간이 주도하는 ‘을지아트트레일(EAT)’ 행사의 시작을 알리며, 매달 둘째 주 목요일 을지로 곳곳에서 열리는 오픈 파티와 오픈 스튜디오의 첫 무대가 된다. 9월과 10월은 반드시 을지로에서 놀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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