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 바우쉬의 걸작 무용극 ‘카네이션’이 오는 11월 6일부터 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25년만에 다시 공연된다. ⓒLG아트센터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9000송이의 카네이션이 무대를 뒤덮고 있다. 카네이션 사이로 군화를 신은 남성이 행진하고, 무용수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유머와 풍자가 공존하는 장면 속에서 억압과 통제의 현실이 드러나고, 공연이 끝날 무렵 꽃밭은 짓밟혀 흩어지며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탄츠테아터(Tanztheater·무용극)’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20세기 공연예술의 흐름을 바꿨다고 평가 받는 현대 무용계의 혁신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쉬(1940~2009).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네이션’이 LG아트센터 서울 개관 25주년을 맞아 한국 무대에 다시 오른다.
‘카네이션’은 2000년 LG아트센터 개관작으로 소개되면서 한국 관객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25년 만에 귀환하는 이 작품은 11월 6일부터 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이어 11월 14일부터 15일까지 세종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 LG아트센터 서울 공연은 모든 회차가 빠르게 매진되며 명작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이번 내한은 단순한 재공연을 넘어 LG아트센터와 피나 바우쉬, 그리고 ‘탄츠테아터 부퍼탈(Tanztheater Wuppertal)’이 함께 쌓아온 25년의 역사를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탄츠테아터 부퍼탈’은 1973년 피나 바우쉬가 부퍼탈 시립극장 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며 시작됐다. 피나 바우쉬는 무용, 연극, 음악, 무대미술, 일상의 몸짓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며 현대 공연예술의 흐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 36년간 총 44편의 작품을 발표하며 무용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단체는 전 세계 공연예술계에서 독창성과 영향력을 인정받아왔다.
피나 바우쉬의 걸작 무용극 ‘카네이션’이 오는 11월 6일부터 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25년만에 다시 공연된다. ⓒLG아트센터 제공
피나 바우쉬의 걸작 무용극 ‘카네이션’이 오는 11월 6일부터 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25년만에 다시 공연된다. ⓒLG아트센터 제공
2000년 개관작을 논의하던 당시 피나 바우쉬는 ‘카네이션’을 추천했는데, 이 작품이 새롭게 문을 연 공연장에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직접 작품을 골랐다. 이렇게 시작된 LG아트센터와 피나 바우쉬와의 인연은 25년이 지난 현재까지 돈독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LG아트센터가 소개한 그의 작품은 ‘카네이션’을 포함해 모두 8편이다. ‘마주르카 포고’(2003), ‘러프 컷’(2005), ‘네페스’(2008), ‘카페 뮐러’와 ‘봄의 제전’(2010), ‘풀문’(2014), ‘스위트 맘보’(2017)는 모두 동시대 관객들에게 탄츠테아터의 이정표와 같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공연이다.
특히 LG아트센터 5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러프 컷(Rough Cut)’은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피나 바우쉬의 국가·도시 시리즈 중 하나이자 글로벌 프로덕션의 가능성을 열어준 작업이었다. 그 밖에도 피나 바우쉬의 많은 작품들이 LG아트센터의 주요 순간마다 함께하며 한국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왔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피나 바우쉬) 현대무용의 혁명가로 일컬어지는 피나 바우쉬는 ‘탄츠테아터’로 불리는 작품들을 통해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물고, 현대무용의 어법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피나 바우쉬 작품의 테마는 언제나 ‘인간’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소통’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의 인간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그려냈고 사랑과 욕망, 불안과 공포, 상실과 고독, 슬픔과 고뇌, 폭력과 파괴 등과 같이 인간의 실존에 관한 심오한 주제들을 고정된 체계가 없는 자유로운 형식에 담아냈다.
피나 바우쉬의 걸작 무용극 ‘카네이션’이 오는 11월 6일부터 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25년만에 다시 공연된다. ⓒLG아트센터 제공
피나 바우쉬는 2009년 6월 30일 암 선고를 받은 지 불과 5일 만에 타계해 세계 예술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후 무용단은 도미니크 메르시와 로베르트 슈투름(2009–2013), 루츠 푀르스터(2013–2016), 아돌페 빈더(2017–2018), 베티나 바그너-베르겔트(2019–2022), 보리스 샤마츠(2022–2025) 등 여러 예술감독의 지휘 아래 운영돼 왔다.
이 과정에서 피나 바우쉬의 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또 새로운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시도와 논의가 이어져 왔으며, 현재는 다니엘 지크하우스가 예술감독 직무를 대행하며 단체의 리허설, 공연, 투어 운영을 이끌고 있다. 2026년 피나 바우쉬 센터 개관과 함께 새로운 예술감독이 선임될 예정이다.
이번에 공연되는 ‘카네이션’은 1982년 초연된 작품으로 피나 바우쉬의 대표작이자 탄츠테아터의 정수를 보여주는 초기 걸작이다. 9000송이 카네이션으로 뒤덮인 무대는 초연 후 40년이 넘도록 세계 관객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널리 사랑받아왔다.
작품의 영감은 1980년 남아메리카 투어 중 피나 바우쉬가 칠레 안데스 산맥에서 마주한 셰퍼드 개가 뛰노는 카네이션 들판에서 비롯됐다. 이 인상적인 풍경은 무대디자이너 페터 팝스트에 의해 초현실적인 무대로 구현됐고, 피나 바우쉬는 2000년 당시 내한을 앞둔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젊음과 아름다움이 상징하는 ‘희망’과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무대를 가득 메운 카네이션 사이로 군화를 신은 남성이 행진하고, 무용수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관객에게 말을 건다. 유머와 풍자가 공존하는 장면 속에서 억압과 통제의 현실이 드러나고, 공연이 끝날 무렵 꽃밭은 짓밟혀 흩어지며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영국의 가디언은 이를 두고 “수천 송이 분홍빛 카네이션으로 뒤덮인 무대는 시각적으로 압도적이며, 유머와 위협이 동시에 깃든 즐겁고 초현실적인 광경”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세대가 고전에 다시 꽃을 피웠다”는 평가도 더해지며, 이 작품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 확인시켰다.
피나 바우쉬의 걸작 무용극 ‘카네이션’이 오는 11월 6일부터 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25년만에 다시 공연된다. ⓒLG아트센터 제공
오늘날 무대에는1980년대부터 활동해온 기존 무용수들과 2019년 이후 합류한 젊은 세대가 함께 오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5년 LG아트센터 서울 무대는 더욱 특별하다. 피나 바우쉬 생전에 함께 작업했던 안드레이 베진, 아이다 바이네리, 에디 마르티네즈, 김나영, 그리고 실비아 파리아스가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실비아를 제외한 네 명은 25년 전 ‘카네이션’ 한국 초연 무대에도 올랐던 주역들이다. 이번 투어에서 베진과 바이네리는 무용수로, 마르티네즈와 파리아스는 리허설 디렉터로서 과거의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피나 바우쉬의 유산을 오늘의 감각으로 재창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또한 오랫동안 무용수로 참여했던 김나영은 이번 내한에 리허설 어시스턴트로 참여한다.
이렇게 새로운 세대가 합류하여 25년 만에 돌아오는 ‘카네이션’은 피나 바우쉬의 유산과 탄츠테아터 부퍼탈의 미래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특별한 무대가 될 것이다.
/park72@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