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호숫가음악제’가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11월 6일 제천예술의전당에서 ‘박달과 금봉의 사랑’이라는 타이틀로 열린다. ⓒ제천호숫가음악제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박달과 금봉의 러브 스토리’에 음악과 영상을 입힌 이색 무대가 열린다. 충북 제천의 대표 클래식 축제 ‘제천호숫가음악제’는 광복 80주년 기념공연으로 11월 6일(목) 오후 7시 제천예술의전당에서 ‘박달과 금봉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연다. 음악과 영상으로 엮은 가곡 콘서트다.
스토리텔링이 탄탄하다. 제천 박달재와 관련해 퍼져있는 ‘박달과 금봉의 이야기’를 6·25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군 지게부대로 끌려간 신랑과 제천으로 월남한 신부가 33년 만에 재회한다는 스토리로 확대해, 시대의 아픔을 넘어선 사랑의 힘을 예술로 재해석한다. 관객들은 영상과 오케스트라의 감동적인 협연을 통해 ‘박달과 금봉’의 전설 같은 사랑을 현대적으로 만나게 된다.
한숙현 교수(경기대)가 AI영상과 음악감독을 맡은 이번 공연에는 소프라노 이윤지와 송난영, 테너 임덕수, 바리톤 석상근 등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정상급 성악가들이 출연한다. 김기웅 지휘자가 이끄는 소리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함께 무대를 꾸민다. 클래식과 스토리텔링, 영상이 결합된 콘서트는 단순한 음악회가 아닌 감동의 서사극으로 기획돼 기대를 모은다.
또한 AI 기반 영상 예술과 실시간 오케스트라 연주가 결합된 국내 최초의 AI 융합 가곡콘서트로, 한국 전통 서사와 현대 기술이 만나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선사한다.
올해 10회째를 맞은 제천호숫가음악제는 성악전문 페스티벌로,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하는 ‘대한민국 공연예술제’에 2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공연은 제천 시민들이 주도하는 순수 비영리 모임인 호숫가음악제 조직위원회가 주최·주관하며 제천문화재단, 아세아시멘트, 건강보험 인재개발원이 후원한다. 관람료는 무료.
이충형 집행위원장은 “전쟁의 아픔을 넘어선 사랑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되새기며, 광복 80주년의 의미를 시민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며 “박달과 금봉으로 유명한 제천에서 가을의 정취를 즐겨 보시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백브리핑> 없던 전설도 만들어 버린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의 위력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나/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가슴이 터지도록”(반야월 작사·김교성 작곡·박재홍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
대중가요로 잘 알려진 박달재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에서 백운면 평동리로 넘어가는 천등산(天登山)에 있다.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재로 불린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지금의 박달재는 인근에서 가장 높은 천등산이 아니라 시랑산 자락을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다. 박달재에는 ‘박달과 금봉의 전설’을 소개하는 동상이 있고, 그 옆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가 서있다.
박달재 밑으로 38번 국도 터널이 뚫려 요즘 박달재를 찾는 사람은 탐방객이나 관광객들뿐이다.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대부분 차량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고, 마루에 오르면 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흘러나왔다.
박달재는 대중가요가 유행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다. 광복 직후인 1948년 가수 박재홍이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를 발표한 뒤, 가사에 담긴 서민적 정서가 공감을 얻어 애창곡으로 불리면서 박달재가 유명해졌고, 박달재에 서린 박달과 금봉의 전설도 회자됐다.
그 옛날 박달이란 선비가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다 날이 어두워져 박달재 아랫마을에 묵게 된다. 여기서 금봉이라는 처녀를 만난 박달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혼인을 약속한다. 박달은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로 떠나고 금봉은 박달의 장원급제를 학수고대한다. 박달은 과거에 낙방해 금봉이를 볼 낯이 없어 돌아가지 못하고, 박달을 애타게 기다리던 금봉은 기다림에 지쳐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박달은 그래도 혼인을 약속한 터라 금봉을 찾아왔으나 사흘 전에 금봉이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박달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박달재 고갯길을 오르다가 금봉이의 환상을 보고 와락 끌어안았으나 금봉은 간데없고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가 발표돼 히트를 치고 애창되면서 박달과 금봉의 애절한 사연도 박달재의 전설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박달재에는 금봉이가 없다. 전설이나 애절한 사연들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 가사가 적지 않은데 대부분 노랫말은 전설이나 사연을 바탕으로 지어진다. 하지만 ‘울고 넘는 박달재’는 가사가 먼저 만들어지고 노래가 유행하면서 없던 전설이 만들어졌다. 2018년 10월 ‘오마이뉴스’에 이런 비하인드를 자세히 소개했다.
지금도 박달재에서 관광객에게 박달재를 소개하는 문화해설사들은 “조선시대부터 유행한 박달과 금봉의 전설 때문에 박달재라고 불리게 됐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박달재 전설은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만들어진 뒤 만들어져 퍼진 ‘신야담’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반야월 선생이 작사했다. 그는 1946년 공연을 위해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려고 박달재를 넘던 중 길가에 서서 손잡고 울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나게 된다. 사연이 궁금해진 반야월 선생이 여성에게 물어보니 ‘남편이 서울로 돈 벌러 떠나는데 여기서 헤어지는 게 가슴 아파 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종일 그 부부의 사연을 생각하면서 노랫말을 만들게 되는데, 막상 만들려고 하니 부부의 이름을 몰라 가사에 넣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이광수 소설 ‘그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주인공인 ‘금봉’을 아내 이름으로 해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랫말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후 박달재 전설은 ‘박달이와 금봉이’의 사랑 이야기로 전해졌다. ‘박달재 전설의 형성과 울고 넘는 박달재’란 논문의 저자인 세명대 미디어 문화학부 권순긍 교수는 “박달과 금봉이의 전설은 노래가 유행한 뒤 만들어진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박달재를 매개로 ‘양반 선비를 사랑한 평민 처녀’ 설화의 한 유형이 전승돼 오다가 반야월 선생이 ‘울고 넘는 박달재’를 작사한 1946년 이후 노래가 유행하면서 거기에 맞춰 부대 설화로 전파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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