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소프라노 하면 조수미를 떠올리는 것처럼, 바리톤 하면 김기훈을 떠올리게 하고 싶어요.” “끊임없는 불만족에서 좋은 예술이 탄생합니다. 제 음악에 스스로 만족하는 순간 제 예술은 끝장납니다.”
바리톤 김기훈이 다음달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단독 리사이틀을 앞두고 당찬 포부와 명확한 예술관을 밝혔다. 그는 17일 서울 강남구 마리아칼라스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김기훈은 요즘 가장 ‘핫’한 성악가다. 올해 6월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BBC 카디프 콩쿠르’ 아리아 부문(메인 프라이즈)에서 우승했다. 한국인은 가곡 부문에서 두 차례 우승(1999년 바리톤 노대산·2015년 베이스 박종민)했지만, 아리아 부문에서는 김기훈이 최초다.
이에 앞서 김기훈은 2019년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권위 있는 국제 콩쿠르인 오페랄리아(도밍고 콩쿠르)에서도 2위를 차지하며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렸지만 챔프 타이틀이 없어 2%가 부족했다.
“메이저 콩쿠르에서 이미 두 차례 입상했기 때문에 더 출전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승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습니다. 2등 이미지가 굳어질 것 같아 이번엔 반드시 우승해보자는 마음으로 도전했어요.”
솔직히 한국인 최초라는 타이틀이 욕심났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만년 2등 프로게이머 홍진호 씨가 많이 생각났다”고 덧붙여 웃음을 자아냈다.
이번 콩쿠르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심사위원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포착돼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는 공연된 적이 없는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에 나오는 ‘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Mein Sehnen, mein Wahnen)’를 부를 때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정작 그는 경연이 끝난 뒤에야 이런 사실을 알았다.
“심사위원을 살짝 봤는데 어두운 표정을 짓더라고요. 턱에 손까지 괴고 심드렁한 모습이었어요. 평생 한 번 있는 무대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많이 됐습니다. 거기에다가 바로 뒤이어 나온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연주자가 엄청나게 노래를 잘했어요. 그가 우승할 줄 알았는데 제 이름을 호명해 깜짝 놀랐습니다.”
김기훈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정태양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나의 갈망이여, 나의 망상이여’와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에 나오는 ‘당신의 시선을 나에게 돌려주세요’를 연주했다.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갈 법도 한데 김기훈은 겸손했다. 그는 “우승 타이틀을 가졌다고 자만하거나 현상을 유지할 생각은 없다”며 “큰 꿈을 그리되 앞에 있는 목표부터 차근차근 해나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수상 이후 세계적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로부터 마린스키 극장 전속 성악가가 돼 달라고 러브콜을 받은 이야기도 공개했다.
“게르기예프가 안나 네트렙코처럼 키워 주겠다고 말했어요. 조건은 마린스키 전속 가수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미 해외 활동 계획이 잡혀 있어 OK를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죄송합니다, 마에스트로’라고 말했죠. 그래도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라 트라비아타’에서 제르몽 역할을 맡아 함께 공연을 했으니 감사했죠.”
이제 톱 클래스에 올라섰으니 엄청난 연습과 철저한 목 관리가 궁금했다.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노하우’라고 말했다. 그는 “목은 악기와 달라서 쓰면 쓸수록 닳아요. 그래서 평소 소리를 내지 않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해요.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도 늘 하죠. 또 패턴이 무너졌을 때 노래가 안된다고 핑계를 대기 싫어 일부러 루틴을 만들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남들처럼 그도 지독한 슬럼프 시절이 있었다. 군대에서 성대 결절을 얻어 10개월 동안 노래하지 못해 좌절했다. 그는 “여기서 멈춰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체육관을 열심히 다녔고, 그때 복싱 선수나 격투기 선수가 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스트레스 해소법도 소개했다. 평소 베스 낚시와 야구 캐치볼을 즐긴다. 그는 “메이저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내 군 면제권이 몇개 생겼는데 쓸 곳이 없다”라며 “요즘 잘 나가는 BTS 멤버들에게 주고 싶다”고 농담을 던지는 여유를 보였다.
김기훈은 다음 달 독창회에서 그동안 출전했던 콩쿠르에서 불렀던 곡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국내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첫 독주회로, 김덕기 지휘자가 이끄는 코리아쿱오케스트라와 연주한다.
이번 무대엔 오페라 ‘라보엠’에서 호흡을 맞췄던 소프라노 서선영과 테너 강요셉이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선다. 이들은 베르디 ‘가면무도회’와 차이콥스키 ‘예브게니 오네긴’ 무대로 호흡을 맞춘다.
올해 10월께 출국하는 김기훈은 독일 뮌헨 바이에른 극장과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 오페라 극장, 미국 샌디에이고 오페라 하우스, 영국 코벤트가든, 미국 워싱턴 국립 오페라 등 해외 주요 극장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노래할 때 허공을 보지 않고 관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는 걸 좋아해요. 항상 아이 콘택트를 하죠. 박수 받을 땐 엄청난 힘을 얻고 감동하기도 하는데 그게 음악을 하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그리고 항상 미래를 향해가는 성악가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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