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올해는 ‘산’이었다. 한국가곡 별들의 축제로 유명한 ‘아리수가곡제’가 열한번 째를 맞아 우리 가곡을 지키는 든든한 산의 위용을 보여줬다. 톱클래스 성악가 10명 모두가 절정의 기량을 뽐내며 2022년 신년음악회를 빛냈지만, 특히 ‘산아’ ‘그리운 금강산’ ‘산노을’로 이어진 3곡의 산 시리즈는 열렬한 박수환호를 받으며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22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제11회 아리수가곡제. 지난 2011년부터 해마다 1월이면 빠지지 않고 열린 음악회였지만, 안타깝게도 지난해는 코로나 탓에 건너뛰어야 했다. 한해를 쉰 아쉬움 때문인지 올해의 열기는 더 뜨거웠다.
바리톤 이동환의 ‘산아’(신흥철 시·신동수 곡)는 묵직한 저음을 바탕으로 깊은 울림을 들려줬다. “오 내가 죽어서도 돌아올 보금자리여 / 어디메 묻혔다가도 되돌아와 묻힐 / 내 무덤이여” 아버지 작사·아들 작곡의 부자(父子) 합작곡은 아 사랑하는 내 고향의 산아를 우리 앞에 펼쳐냈다. 또한 이동환은 ‘외딴 생각’(한상완 시·김진우 곡)에서 푸르른 5월의 길을 걷다 문득 떠오른 아련한 사랑을 그려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 으뜸 순위에 꼽히는 ‘그리운 금강산’(한상억 시·최영섭 곡)은 소프라노 임청화가 노래했다. 그동안 수없이 들은 곡이지만 “수수 만년 아름다운 산 / 못 가본지 몇몇해 /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 금강산은 부른다”에서 여전히 울컥한다. 임청화는 이리진의 가야금 선율에 맞춰 부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랑 너머’(조영황 시·김성희 곡)도 연주했다.
“아 아, 산울림이 내 마음 울리네 / 다가오던 봉우리 물러서고 / 산 그림자 슬며시 지나가네” 테너 이정원의 ‘산노을’(유경환 시·박판길 곡)은 차분하고 담담했지만 여운은 훨씬 더 짙었다. 애써 목소리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일부러 안으로 숨겼지만, 고수의 날카로운 스킬은 주머니를 뚫고 나왔다. 세련되게 편곡된 버전이 귀를 사로잡았다. ‘수락산 연가’(이명숙 시·임긍수 곡) 또한 이정원의 매력이 듬쁙 담겼다.
올해 아리수가곡제의 가장 큰 특징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신작가곡과 잘 알려진 옛가곡을 절반씩 선곡했다는 점이다. 해마다 수없이 발표되는 신작 중에서 좋은 반응을 보이는 곡을 선보여 한국가곡 살리기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 정상의 피아니스트 이영민과 백설이 번갈아 반주를 맡아 가곡제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소프라노 정선화는 60~70년대 집안 벽에 붙어 있던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김효근 역·김효근 곡)를 연주했다. 팬데믹 위기 속에서 비록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지만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응원송에 모두들 힘을 얻었다. ‘연리지 사랑’(서영순 시·이안삼 곡)에서는 부부의 지극한 사랑을 노래했다.
한복 곱게 차려 입은 소프라노 정혜욱은 ‘무곡’(김연준 시·곡)을 들려줬다. “어여쁜 소녀들 색동옷 입었네 / 꽃과 같이 예쁜 그림을 그리네 / 돌다가 멈추고 뛰다가 서면은 / 오색의 무늬 눈 앞에 황홀해 / 꽃과 같이 예쁜 소녀들이 뛰네” 살짝살짝 춤 동작까지 곁들여 마음속 봄은 이미 우리 옆에 있음을 표현했다.
고음의 끝판으로 유명한 소프라노 김성혜는 ‘고향’(정지용 시·채동선 곡) ‘매화연가’(황여정 시·이안삼 곡) ‘수선화’(김동명 시·김동진 곡) ‘꽃구름 속에’(박두진 시·이흥렬 곡) 4곡을 잇따라 불렀다. 1월인데도 광화문 한복판에 매화, 수선화, 복사꽃, 살구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메조소프라노 양송미는 ‘동백’(김성춘 시·정애련 곡)과 ‘비목’(한명희 시·장일남 곡)을 선물했다. “흩지도 못하나니 / 가련하여 그 자리로 / 툭 뚝 떨구는 꽃송이 / 정인의 심장에 죽어 멍들다”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었던 벌교 ‘보성여관’ 매니저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우리 가곡을 작사하고 부르던 김성춘 시인의 ‘동백’은 그의 고향사랑이 짙게 배어있는 곡이다.
“사는 게 무언지 /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 꽃으로 서 있을게” 테너 이현은 요즘 2030의 최애곡으로 각광받는 ‘마중’(허림 시·윤학준 곡)을 불렀다.
바리톤 김승철은 ‘남겨진 바다’(공혜경 시·김광자 곡)와 ‘명태’(양명문 시·변훈 곡)를 연주했다. '남겨진 바다' 시를 쓴 공혜경은 '포에라마(시+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주목 받고 있는 시인, 낭송가, 연극배우다. 1인 3역을 소화하고 있는 그의 첫 가곡 작품이다. 김승철은 ‘명태’에서 실감나는 딱꾹질 연기까지 곁들여 갈채를 받았다.
바리톤 송기창은 ‘사랑을 찾아서’(박수진 시·박영란 곡)와 ‘벼룩시장’(구준모 시·정덕기 곡)을 들려줬다. 동묘공원 옆 돌담 따라 펼쳐진 시장 풍경을 묘사한 ‘벼룩시장’에서는 “석장에 만원 / 손에 잡히는 대로 천원”하면서 흥정하는 제스처까지 멋지게 소화해냈다.
이중창 무대도 엑설런트했다. 정선화와 송기창은 ‘아리수 사랑’(신달자 시·이안삼 곡)을, 정혜욱과 이정원은 오페라 ‘춘향전’에 나오는 ‘그리워 그리워’(이서구 시·현제명 곡)를, 이현과 이동환은 ‘향수’(정지용 시·김희갑 곡)를, 임청화와 이현은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문효치 시·이안삼 곡)를 불러 환상케미를 보여줬다.
그리고 정선화·정혜욱·이정원·송기창은 사중창으로 ‘내 맘의 강물’(이수인 시·곡)을, 출연자 10명 모두는 합창으로 ‘고향의 노래’(김재호 시·이수인 곡)를 1부와 2부의 마지막 곡으로 불러 지난해 8월 별세한 이수인 작곡가를 추모했다.
<에필로그 1> 이번 아리수가곡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공연 이틀 전, 출연하기로 했던 소프라노 김정연이 갑자기 갑상선에 혹이 생겨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것. 병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정연은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려 공연을 강행하려고 했으나, 음악회를 기획한 아리수사랑 김정주 대표는 성악가의 건강이 우선이기 때문에 만류했다.
그리고 긴급히 소프라노 정선화와 김성혜에게 SOS를 쳤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각각 ‘연리지 사랑’과 ‘꽃구름 속에’를 한곡씩 더 부르며 큰불을 껐다. 순발력 있게 위기에 대처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필로그 2> 공연 당일, 김정주 대표는 또 멘붕에 빠졌다. 테너 하만택이 금요일부터 목이 칼칼하고 가래가 살짝 끓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감기 진단을 받았다. 약 먹으면 나아지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토요일 아침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급히 간이 검사키트로 자가진단을 했는데 코로나 양성 판정이 나왔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공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서둘러 PCR 검사를 받았고 오후 늦게 확진 판정을 받았다.
부랴부랴 비상대책을 마련했다. 예정됐던 3곡 중 이순희 시·한성훈 곡의 ‘아무도(島)’는 협연하기로 했던 한기원의 알토색소폰 연주로 대체했지만 '나는 누구인가'(숲바람 시·김현옥 곡)와 ‘그리운 사람아’(임승천 시·박경규 곡)는 연주되지 못했다. 속상하기는 하만택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중에 신작 가곡 2곡('아무도' '나는 누구인가') 연주 동영상을 찍어 아리수 팬들에게 공개하기로 약속했다. 당장은 들을 수 없었지만 곧 하만택의 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 이것도 뜻하지 않은 선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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