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하늘나라 분더리히도 반했으리라...박유신의 첼로 ‘슈만 시인의 사랑’ 노래했다

첼로·피아노 듀오버전으로 슈만 연가곡집 국내 초연

박정옥 기자 승인 2022.03.24 00:45 | 최종 수정 2023.03.20 10:32 의견 0
첼리스트 박유신이 22일 슈만의 ‘시인의 사랑’ 음반발매를 기념해 리사이틀틀 열고 있다. 피아노 반주는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목프로덕션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로베르트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은 내로라하는 성악가들이 꼭 녹음하고 싶어 하는 워너비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선율을 붙여 모두 16곡으로 구성됐다. 1~6곡은 사랑의 시작을, 7~14곡은 실연의 아픔을, 그리고 15곡과 16곡은 지나간 청춘에 대한 허망함과 잃어버린 사랑의 고통을 담고 있다.

프리츠 분더리히, 이안 보스트리지, 크리스토프 프레가르디엥, 마티아스 괴르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등 톱스타 모두가 정식으로 음반을 냈다. 우리나라 테너 김세일도 2020년에 앨범을 선보였다. 유명한 시를 가사로 삼았기 때문에 이들 고막남친의 노래를 한번만 들어도 ‘시인의 사랑’은 금세 ‘나의 사랑’으로 바뀌는 마법을 경험하다. 음악의 힘이다.

22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무대에 성악가는 없었다. 그 대신 첼리스트 박유신이 있었다. 가수의 목소리를 대신해 첼로가 노래를 했다.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와 호흡을 맞췄다. 첼로가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악기라고는 하지만, 정말 그렇게 소리를 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10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한 1680년대 첼로는 정말 노래를 불렀다. 하늘나라 분더리히도 들었다면 틀림없이 반했으리라.

박유신은 최근 슈만 스페셜리스트로 통하는 피아니스트 플로리안 울리히와 힘을 합쳐‘시인의 사랑’ 음반을 발매했다. 이날 리사이틀은 이를 기념하는 음악회다. 첼로와 피아노 듀오버전 ‘시인의 사랑’은 국내 초연이다. 노랫말이 없어진 흔적 위에 더 참신한 첼로 매직이 쌓였다.

첼리스트 박유신이 22일 슈만의 ‘시인의 사랑’ 음반발매를 기념해 리사이틀틀 열고 있다. Ⓒ목프로덕션


관객 모두는 제1곡 ‘Im wunderschönen Monat Mai(아름다운 5월에)’에서부터 기꺼이 포로가 됐다. 자발적으로 ‘박유신의 황홀한 음악 감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사에 가려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던 섬세한 사랑의 선율을 더 확연하게 드러내 주었다. 물위에 퍼지는 파란 잉크처럼 가슴으로 첼로가 스며들었다.

‘시인의 사랑’은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해도 좋다는 법원의 허락을 기다리는 동안 작곡했다. 이런 형편없는 놈한테 딸을 줄 수 없다며 결사반대했던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와 2년간 소송을 진행한 슈만은 그 초조한 기다림을 견디며 작품을 썼다. 그리고 1840년에 두 사람은 정식으로 연인관계가 되어 결혼에 골인한다. 이런 이유로 이 가곡집엔 사랑의 달콤함도 있지만 사랑의 쓰라림도 엿보인다.

박유신은 특히 독립된 노래로도 많은 애창되는 제4곡 ‘Wenn ich in deine Augen she(그대의 눈을 바라보노라면)’, 제5곡 ‘Ich will meine Seele tauchen(나의 마음을 적시고)’, 제7곡 ‘Ich grolle nicht(나는 울지 않으리)’, 제12곡 ‘Am leuchtenden Sommermorgen(눈부신 여름날 아침에)’, 제13곡 ‘Ich hab' im Traum geweinet( 나는 꿈 속에서 울고 있었네)’에서 독창적인 ‘첼로 가수’의 실력을 뽐내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랑을 위해 장인과 법정 공방까지 갔던 슈만의 사랑처럼, 박유신도 ‘시인의 사랑’과의 사랑을 놓지 않고 꾸준하게 올인했다. 박유신은 “목소리가 구사하는 발음이 있듯, 악기에도 발음이 있다고 생각하며 성악가들의 노래는 물론 슈만 가곡 전문 피아니스트들에게 자문도 구하며 나만의 ‘시인의 사랑’을 다듬어 나갔다”고 고백했다. 이날 무대에서 그 결과물인 '노래하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모두 쏟아냈다.

첼리스트 박유신이 22일 슈만의 ‘시인의 사랑’ 음반발매를 기념해 리사이틀틀 연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피아노 반주는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목프로덕션


박유신은 슈만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5개의 민요풍 소품’도 흥미롭게 연주했다. 톡톡 튀는 명쾌함을 드러내고(제1곡), 느리게 흐르는 자장가풍의 편안함을 안겨주고(제2곡), 슬라브적인 우수가 스며든 소박한 민요 가락(제3곡)을 선사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활기찬 결연함의 의지(제4곡)와 넓은 음역을 유연하게 오르내리는 피날레의 단호함(제5곡)을 보여줬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인 브람스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번’도 ‘시인의 사랑’처럼 한편의 노래로 다가왔다.

박유신은 앙코르곡으로 ‘Widmung(헌정)’을 들려줬다. 슈만은 1840년 9월 결혼식 전날, 기쁨에 겨워 클라라에게 26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연가곡집 ‘미르테의 꽃’을 주며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거기에 들어있는 첫 번째 곡이다. 이날 음악회는 결국 관객들에게 바친 '박유신의 헌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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