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메일 한통으로 기회 얻은 빈심포니 지휘...‘대타 장한나’ 17번의 커튼콜

‘대타 협연’ 길 샤함과 베토벤 연주...모두 뒤돌아서 합창석에 인사 감동

박정옥 기자 승인 2022.06.03 16:46 | 최종 수정 2022.06.09 14:16 의견 0
장한나가 지휘하는 빈심포니가 1일 공연을 마친뒤 모두 뒤돌아서 합창석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박정옥 기자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1994년 파리, 열한 살 장한나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첼로를 들고 제5회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첼로 콩쿠르에 나왔다. 앳된 모습의 꼬마가 연주하는 것 자체도 신기했는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첼로신동의 탄생은 ‘깜놀 사건’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음악적 스케일이 너무나 거대해 상상을 초월한다”며 “첼로는 작지만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극찬했다.

장한나가 음악을 처음 시작한 것은 3세 때.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다 6세에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엘가 협주곡’을 듣고 나서부터 첼로에 끌렸다. 혼신을 다하는 자클린의 연주에서 뿜어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 듣는 이를 끌어들이는 강한 흡인력에 마음을 빼앗겼다. 첼로 현에 활을 긋는 순간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듯한 표정과 연주에서 생전 자클린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후 세계 최정상급 첼리스트로서 독보적인 이력과 EMI 레이블에서 발표한 음반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미샤 마이스키, 주세페 시노폴리, 안토니오 파파노, 로린 마젤 등 거장들의 러브콜을 듬뿍 받으며 음악 세계를 넓혔다.

지휘자 장한나가 빈심포니와 호흡을 맞춰 공연을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WCN 제공


2007년은 장한나 인생 터닝포인트의 해다. ‘지휘자 장한나’로 변신한 것. 성남국제청소년관현악페스티벌(SIYOF)을 통해 정식 데뷔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첼로를 시작했기 때문에 20여 년간 연주할 수 있는 주요한 첼로 레퍼토리는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다른 악기에 비해 연주 목록이 많지 않은 첼로의 한계를 일찍 느끼게 되면서 활을 내려놓고 포디움을 통해 음악적 활동을 이어갔다. “첼로 독주가 같은 빨간색을 얼마나 짙고 연하게 채색할지 고민하는 일이라면, 오케스트라는 모든 색이 어울리는 무지개를 빚어내는 것이다”라며 지휘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이어진 행보는 눈부셨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리버풀 필하모닉, 나폴리 심포니, 시애틀 심포니, 이스탄불 필하모닉, 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 그리고 2014년에는 카타르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서 BBC 프롬스 무대에 섰다. 첼리스트로서 나홀로 만들어냈던 그의 음악을 이제 수십 명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진정한 협업의 맛을 알게 됐다.

빛나는 성과를 지켜본 영국의 대표적 클래식 전문지 ‘BBC Music Magazine’은 2015년 ‘최고의 여성 지휘자 19인’에 장한나의 이름을 올렸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며칠 전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2022/2023 시즌 독일 함부르크 심포니 수석 객원 지휘자로 새롭게 임명됐다. 음악 감독이나 상임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담임’이라면, 수석 객원지휘자는 ‘부담임’과도 같은 역할이다. 그의 활동 영역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확대되고 있다.

장한나가 지휘하는 빈심포니가 1일 공연을 마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박정옥 기자


‘마에스트라(여성 지휘자의 존칭) 장한나’가 오랜만에 지휘봉을 들고 한국 팬을 만났다.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한국·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 기념 빈심포니(Wiener Symphoniker) 내한공연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했다. 이에 앞서 인천아트센터(5월 29일), 롯데콘서트홀(5월 30일), 부산시민회관(5월 31일)에서 먼저 공연했다. 롯데콘서트홀 공연은 하나금융의 VIP고객 초청공연으로 열렸기 때문에 일반 관객이 감상할 수 있는 무대는 모두 세 차례였다.

장한나의 이번 공연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 빈심포니 상임지휘자인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가 나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사임하면서 현재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이자 과거에 빈심포니 상임지휘자로 오래 활동했던 필리프 조르당으로 변경됐다.

그런데 이번엔 필리프 조르당이 코로나19 확진으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됐다. 장한나가 급하게 ‘대타(代打)’로 투입됐다. 뉴욕에 머물고 있던 장한나는 SOS요청을 받아들여 지난 26일 밤 급히 입국했다. 급한 불을 꺼달라는 요청을 기꺼이 수용한 것. 장한나는 토요일 오후에 빈심포니와 2시간 30분 호흡을 맞췄고, 첫 공연인 일요일에 딱 3시간 리허설을 하고 곧바로 실전 무대에 올랐다.

지휘자 장한나가 빈심포니와 호흡을 맞춰 공연을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WCN 제공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얼마전 빈심포니 앞으로 이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장한나가 보낸 것이다. 거기엔 “앞으로 기회가 되면 빈심포니를 꼭 지휘해보고 싶다”는 의례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공연 1주일을 앞두고 필리프 조르당 카드까지 불발되자 빈심포니는 멘붕에 빠져있는 한국기획사 WCN에 장한나 메일 이야기를 꺼냈다. WCN은 즉각 ‘장한나! OK’ 사인을 날렸다. 결국 늘 준비하고 도전하는 장한나의 노력 덕에 예상보다 일찍 빈심포니 지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번엔 또 협연자마저 ‘펑크’를 냈다. 원래 러시아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이 서기로 했으나 건강 악화를 이유로 공연이 어렵다는 뜻을 전해왔다. 부랴부랴 미국의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이 서둘러 투입됐다. 비록 ‘대타 지휘자’ ‘대타 협연자’의 공연이 됐지만, 두 사람은 큼지막한 한방을 날리며 빈심포니와 성공적인 공연을 이뤄냈다.

공연 시작 전 ‘조금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일반적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와 자기 자리에 앉는데, 빈심포니는 공연 10여분 전부터 시간차를 두고 한두명씩 미리 나와 악기의 음을 조율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신선했다.

이윽고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장한나가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의 뒤에서 박수를 치며 함께 걸어 나왔다. 첫 곡은 베토벤이 남긴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인 D장조 작품번호 61번. 두 사람은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노력이 빚은 음악성을 바탕으로 유연하게 음악을 이끌어갔다.

“자 이제 시작이야”라는 팀파니의 둥둥둥 시그널이 가슴 속에 박히며 1악장이 시작됐다. 저절로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왠지 익숙한 느낌의 오케스트라 파트 뒤를 이어 바이올린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는 길 사햠이 빚어내는 꿈결 같은 시간이 흐른다. 서정적 분위기가 촘촘하게 전체를 관통하면서도 웅장하고 거대한 사운드 역시 디테일의 변화를 살려낸다. 바이올린 솔로가 펼쳐지는 동안 다른 현악기들이 스타카토로 ‘추앙’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가늘게 이어지는 날카로운 고음이 팀파니 소리와 어울려 지워지지 않는 감동을 남긴다.

간결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여는 2악장 라르게토는 한껏 감성을 자극한다. 이어 바순의 신호를 시작으로 주제부가 펼쳐진다. 마음에 품은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말투를 연상시키는 선율이 애잔하다. 강렬한 인상의 간단한 종결부는 쉼없이 다음 악장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3악장은 론도. 오케스트라가 베이스를 넣어 주는 가운데 바이올린이 마치 나팔소리처럼 들린다. 어깨 들썩이게 만드는 흥겨운 춤곡이 연상된다. 오랫동안 잊힌 곡을 요제프 요아힘과 펠릭스 멘델스존이 살려낸 것처럼 길 사햠과 장한나 콤비 역시 생동감 넘치는 엑설런트 연주를 선사하며 곡을 마무리 지었다.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이 장한나가 지휘하는 빈심포니와 협연하고 있다. ⒸWCN 제공


장한나는 두팔을 벌려 길 샤함과 포옹했다. 브라보! 브라바! 박수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길 샤함은 세 번째 커튼콜에서 앙코르 곡으로 바흐의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3번, BWV 1006’ 중 3악장 ‘가보토와 론도’를 들려줬다. 네 번째 등장에서는 오른손을 왼쪽 심장에 대고 하트를 꺼내 보이는 깜찍 세리머니를, 그리고 다섯 번째 커튼콜에서는 아예 바이올린을 놓고 나와 이제 그만 앙코르를 멈춰 달라는 신호를 날리는 센스를 발휘했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자신의 SNS에서 “여느 연주한 험난한 준령을 등반하는 모습이라면 길 샤함의 연주는 수없이 많이 오른 정상에서 하산하는 느낌이다”라며 “위압적인 자기현시는 찾아볼 수 없고 음악을 통한 청중과 본인의 기쁨이라는 순수한 목표가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곡의 아우라와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눈부시게 띄우는 고음의 매혹에서 전보다 더 성숙한 거장의 음악성이 흘러나왔다”고 말했다.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선사했다. 장한나는 2007년 지휘자 데뷔 무대에서도 바로 이 7번을 연주했다. 그의 ‘인생 교향곡’인 셈인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리듬의 역동성과 충만한 환희를 이렇게 밝혔다.

“7번이 제게는 가장 베토벤다운, 심지어 베토벤 본인을 능가하는 에너지가 음악의 옷을 입은 교향곡입니다. 이번에 뉴욕에서 올 때 비행시간만 15시간 걸렸는데요. 비행기 안에서 베토벤 7번 악보를 계속 보면서 왔어요. 결론은 ‘와 어떻게 이런 음악을 썼나’라는 거에요. 베토벤이 놔주지 않았어요. 끝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너무나도 힘있게, 넋 놓고 들을 수밖에 없게 전달하니까요.”

매우 길고 복잡한 서주로 시작된 1악장은 집요한 리듬의 향연이 펼쳐진다. 중간 중간 정적 부분에서 쓰윽 악보 넘기는 소리도 음악이 됐다. 2악장은 무겁게 내려앉은 장송곡풍. 6월의 영혼들에게 바치는 추모곡의 느낌도 들었다. 장한나의 동작도 작아졌다.

지휘자 장한나와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이 리허설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장철웅 작가 제공
장한나가 지휘하는 빈심포니가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과 리허설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장철웅 작가 제공


3악장은 기분 좋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4악장은 ‘에너자이저 장한나’의 힘이 용암처럼 분출했다. 우렁차고, 박력있고, 파워풀했다. 그의 두손과 두다리에 멈추지 않는 모터가 달린 것 같았다. 역동적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했다. 무시무시한 스피드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펄쩍펄쩍 뛰는 제스처’를 보여주며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고 달렸다.

류태형 평론가는 “장한나는 끊임없이 지시하고 독려하며 격정적으로 지휘했다. 잔잔한 수면에 물결이 일고 나무들의 잎새가 바람에 떨어졌다”라며 “빈심포니는 익숙한 빈의 거리를 걷듯 처음에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그러더니 3악장을 지나 4악장에 접어 들면서 함께 뜨겁게 날아올랐다”고 말했다.

교향곡 7번이 끝나자 12번의 커튼콜이 이어졌다. 1부의 5번과 합치면 무려 17번이다. 장한나와 빈심포니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 이지수의 ‘아리랑’,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피치카토 폴카’로 관객들의 환호에 보답했다.

장한나는 공연 내내 오케스트라의 뒷모습만을 봐야했던 합창석 관객을 위해 모두 뒤돌아서서 인사를 했다. 장한나는 90도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끝까지 음악과 관객에게 정성을 쏟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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