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타이 손’ 풀스토리⑦]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마리아 유디나 음반 들으며 ‘러시아 피아니즘’ 학습

3년간의 일본생활 뒤 캐나다 몬트리얼 이주
음의 밸런스 중요시하는 서양식 연주 깨달아

민은기 기자 승인 2022.08.15 08:00 의견 0
당 타이 손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해 드미트리 바슈키로프 교수에게 배웠다. 바슈키로프는 일본 생활 도중 슬럼프에 빠진 손에게 환경을 한번 바꿔 보라고 권유해, 캐나다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손은 2021년 바슈키로프가 세상을 떠나자 “마법의 음악세계로 날아갈 날개를 달아준 그대여”라고 페이스북에 적어 그를 추모했다. Ⓒ당 타이 손 페이스북 캡처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1987년에 당 타이 손은 일본의 국립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청결한 주거환경에 조율이 잘 된 피아노가 함께 준비돼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초기에는 하루하루가 즐겁기 그지없었다. 이런 세계가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눈을 뜨는 기분이었다.

일본에서 그가 가장 먼저 얻었던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프로 음악가가 된 사실이다. 처음 그의 눈에 비친 일본인들은 모두가 온통 일만 하는 모습이었다. 왜 그럴까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손 역시 이런 생활 리듬에 익숙해져갔다. 열심히 일을 하고, 시간을 철석같이 지키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해나갔다. 언제 어디서고 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엔 국가, 정부,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알아서 해주었던 것들을 이젠 전부 자신의 힘으로 처리해야 했다. 처음엔 좀 당혹스러웠지만 차차 그것이 자립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수가 없습니다”...변화 필요해 캐나다 이주

손이 일본에 와서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무엇을 하든지 돈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좋은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음악을 많이 들어야 하고, 콘서트에도 자주 가야하고, 좋은 선생을 찾아가 배울 필요도 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이 이상하리만큼 비쌌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났더라면 절대로 피아니스트가 되진 못했겠구나. 뭐든 이렇게 비싼데 내겐 무리였을 거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을 열심히 하는 동안 정신적인 여유를 찾을 틈이 없었다. 일본에서 1년, 2년 시간이 흐르면서 지쳐갔다.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생활이나 모스크바 시절과는 달리, ‘살아남기’가 필요 없는 생활 속에서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1990년이 되자, 손은 드미트리 바슈키로프 교수 앞에서 비통한 표정으로 하소연했다.

“선생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피아노를 치고 있어도 전혀 즐겁지가 않아요. 작곡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거나 청중과 좀 더 커뮤니케이션을 나누고 싶다는 열망이 전처럼 생기질 않습니다. 피아노를 그만둬버릴까 하고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긴 시간, 출구를 찾아보려 노력했지만...안되겠습니다.”

바슈키로프는 제자가 번뇌하는 것을 언제나 통찰력 있게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손에게, 재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진 몰라도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고, 그 가능성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한계 운운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환경을 한번 변화시켜보라고 권유했다.

손은 이전부터 미국에서 살고 싶고, 그곳에서 콘서트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엔 베트남인이 미국에서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 않았다. 비자도 워킹 비자가 아니라 방문 비자만 허용돼 사실상 노개런티로 연주해야 했다. 하지만 캐나다는 괜찮았다.

손은 캐나다에 이주해서 살기로 결심하고 몬트리얼에 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풀장이 있고 녹음이 우거진 멋진 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풀장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항상 청소해줘야 해서 수영하는 시간보다 청소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리기도 했다.

어머니 리엔을 캐나다로 모셔와 함께 살게 되자, 현관도 거실도 주방도 모두가 두 개씩 있는 집으로 다시 한 번 이사를 했다. 이 집은 1920년께 지어진 건물로, 1940년대에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던 빅 모건이 살았던 곳이다. 유럽의 향기가 있고, 천장이 높고, 피아노 스튜디오가 지어져 있어서 손은 그곳에 두 대의 피아노를 들여놓을 수 있었다. 스튜디오의 문을 닫아버리면 24시간 피아노를 쳐도 괜찮았으니 이제야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만의 성을 마련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지금껏 캐나다의 이 집에서 살고 있다.

● 강약 조절 탁월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통해 새로운 세계 경험

당 타이 손은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에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와 마리아 유디나의 음반을 통해 러시아 피아니즘의 진수를 배울 수 있었다. Ⓒ인터넷 캡처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에 손은 콘서트나 녹음을 통해 위대한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많이 들을 수 있었고, 러시아 피아니즘의 진수를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인상에 남았던 것은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1901~1961)와 마리아 유디나(1899~1970)의 녹음이었다. 명확한 강약 표현을 보여주는 두 사람의 연주는 모두 라흐마니노프의 주법을 계승하고 있으며, 20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러시아 피아니스트 가운데 이들의 연주는 ‘전설’이 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소프로니츠키는 190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태생이다. 어린 시절 가족들이 바르샤바로 이주했고, 거기서 피아노를 배웠다. 레닌그라드 음악원(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레오니드 니콜라예프를 사사했다. 소프로니츠키는 스크랴빈 연주의 1인자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는 스크랴빈의 사위이기도 했는데, 1943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청중이 예기치 못한 신선한 맛을 연주에 담고자 했고, 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레코딩에는 부정적이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양의 녹음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현재 그의 연주를 감상할 수가 있다. 겐리히 네이가우스는 소프로니츠키의 음악을 이런 말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피아노는 마치 이른 봄에 꽃을 피운 은방울꽃이나 라일락 같다. 아름답고 신비에 싸여있다. 그의 연주 안에는 이상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마리아 유디나는 1899년 러시아의 벨라르시 국경 근처에서 태어났다.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고,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소프로니츠키와 같이 레오니드 니콜라예프 문하에서 공부했다.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던 유디나는 시와 문학을 사랑하며 명성이나 돈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언제나 오래된 낡은 운동화를 신고, 길고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연주는 자유분방하고 무엇에도 속박 받지 않는 정신적 자유를 음으로 표현해서 듣는 이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놓았다.

또 한 사람,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의 음반에도 손은 가끔씩 귀를 기울였다.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가 노래하듯 아름다운 주법을 구사한다면, 호로비츠는 완전히 달랐다. 미켈란젤리의 루바토는 사실 서양적인 것이고, 알프레드 코르토(1877~1962)의 흐름이 느껴지는데 강약보다도 타이밍이나 터치를 중시하고 있는 주법이다. 그것에 대항해서 호로비츠는 강약을 보다 강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듣고 손은 프레이즈를 만드는 방법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것은 디미누엔도(diminuendo·점점 여리게)라고 느끼게 됐다. 피아노는 현악기와는 달라서 하나의 음을 활의 움직임으로 크레센도로 이끌어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음은 한 번 울리고 나면 점점 쇠락해가는 운명이다.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에는 자연스러운 프레이징이란 내려가는 경향이 있는 거라고 느꼈다. 그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것은 서방세계에 나가게 되고나서부터였다.

러시아인들은 피아노를 인간의 목소리에 가까운 것이라 여기지만, 서구 여러 나라 사람들은 오케스트라의 악기처럼 여긴다는 걸 알게 됐다. 손이 서방세계에 나가서 처음 라이브 연주를 접했던 것이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독주회였는데, 이때 오케스트라의 악기처럼 음의 밸런스를 중시해서 피아노를 울리게 하는 연주법도 있구나 하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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