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타건’보다 더 강렬한 ‘속삭이는 친밀함’...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의 위대한 피아노

늘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20세기 위대한 피아니스트
풍월당 ‘새로운 시각으로 82년의 삶 추적’ 평전 출간

김일환 기자 승인 2022.12.20 14:23 의견 0
풍월당이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의 82년 삶을 추적한 평전을 출간했다. ⓒ풍월당 제공


[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리흐테르는 좀처럼 첫 곡부터 끝 곡까지 사이클 전체를 주파하는 타입의 연주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잡식성 피아니스트”라 즐겨 불렀고, 좋아하는 곡이 아니면 연주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나는 음악을 너무도 좋아하고, 음악에 대한 사랑을 듣는 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을 아무래도 단념할 수 없다”고 했던 그였다. 작품에 대한 사랑이 생기지 않으면 연주 욕구도 일지 않았다. 가령 그는 쇼팽의 연습곡이나 드뷔시의 전주곡을 전곡 모두 연주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역시 마음에 드는 곡만 골라 쳤다. 심지어는 저 인기 있는 ‘월광’ 소나타도 그는 외면했다. “모두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당연지사 아닌가!”라고 무뚝뚝한 얼굴로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연주를 결심할 때부터 전곡을 암보로 칠 수 있을지, 다시 말해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음악에 대해서는 평생 외경심을 품었다.(157·158쪽)>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라는 피아노의 두 전설을 비교할라치면 전자의 연주는 “피아니스틱”하고 후자의 연주는 “오케스트라 같다”는 평가가 가능할 법도 하다. 리흐테르는 평생에 걸쳐 관현악곡을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호로비츠와는 달리 실내악 뮤지션 및 가곡 반주자로 왕성히 활동했다. 동료들과 함께 연주하는 경험은 언제나 그를 살찌웠고, 보로딘 사중주단, 벤저민 브리튼,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은 그저 함께 연주하면 신명이 나는 음악적 동반자에 그치지 않고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만년의 리흐테르는 올레크 카간과 나탈리야 구트만 부부,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 같은 모스크바의 친한 벗들과 함께 자주 콘서트 무대에 섰다.(334쪽, 336쪽)>

그동안 위대한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Sviatoslav Richter·1915~1997)를 만날 수 있는 책은 브뤼노 몽생종의 ‘리흐테르: 수수께끼’가 유일했다. 그러나 이제 카를 오게 라스무센의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피아니스트’(이석호 옮김·576쪽·4만3000원)가 출판돼 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몽생종의 책이 리흐테르에 대한 짧은 스케치라면 라스무센의 책은 한 위대한 영혼이 걸어간 발자취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본격적인 평전이다. 원래 2007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처음 선보였다. 덴마크어로 집필된 까닭에 더 많은 독자에게 전해지기 어려웠지만, 2010년 미국 보스톤의 노스이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어로 번역되면서 그 진가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풍월당이 펴낸 그의 책은 헝가리어, 핀란드어, 영어에 이은 네 번째 언어로 된 번역 출판이다.

●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를 바탕으로 한 평전

저자인 덴마크의 작곡가 카를 오게 라스무센은 가족 기록 보관소의 여러 희귀한 자료를 면밀히 조사하고, 리흐테르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심층적인 인터뷰를 통해 그의 비밀스러웠던 삶을 다각적으로 조망한다.

이 책의 바탕을 이루는 전기적인 사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그간 있었던 많은 오해와 곡해, 모호했던 사실 관계 따위를 바로잡았다. 전기 작가들의 공적인 기록 외에도 그의 아내이자 동료, 매니저였던 니나 도블리악이나 나탈리야 구트만, 엘리자베트 레온스카야 같은 동료 음악가들의 증언을 살펴보면서 그와 가까운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었던 친밀함과 비밀스러움을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출신인 리흐테르는 1949년 스탈린상을 수상한 이래 소비에트 전역에서 대단한 각광을 받았고, 러시아와 동유럽 전역을 연주 여행하며 이름을 높인 뒤 마침내 서방 세계로 진출했다. 1960년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미국 데뷔 공연은 어마어마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까다롭고 내성적인 모습으로 유명한 리흐테르는 청중이 미세한 음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소규모의 공연장을 좋아했다.

● 음악가가 그려낸 음악가의 일생 ‘공감’

이 책의 장점 중에 가장 특별한 것은 무엇보다 라스무센 자신이 음악가라는 점이다. 그는 음악의 본질과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서 리흐테르의 특별한 점을 찾는다. 리흐테르의 피아니즘은 깊고도 넓어 몇 마디 개념으로 포착하기 어렵다. 고전, 낭만 같은 사조, 시대상의 구분이나 나라별 전통, 특정 작곡가와의 친화력 등 우리가 피아니스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유형 및 범주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피아니스트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강철 같은 타건’이라든지 ‘불꽃 튀는 기교’만으로는 그의 피아노를 다 담을 수 없다. 고전적인 균형미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낭만적 상상력 또한 리흐테르 건반 예술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는 모든 것을 소위 ‘리흐테르 스타일’대로 치는, 다시 말해 자신만의 주법, 해석법 따위를 확립해 두고 그 틀 안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려는 ‘지배자형’ 피아니스트도 아니다.

그의 음악 세계는 더없이 다채롭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이한 효과나 별난 실험을 탐한 것도 아니다. 어떤 작곡가의 스페셜리스트를 지향하거나 기념비적인 전집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지만, 리흐테르의 연주는 그 어떤 스페셜리스트의 것보다도 특별하다.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해지지만 그의 대답은 늘 간명해서 “나는 작곡가가 쓴 것을 연주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라스무센은 이 수수께끼 같은 피아니스트를 언어로 붙잡으려 애썼다. 그의 리흐테르 평전에는 카멜레온, 독수리, 야누스, 잡식성 피아니스트, 광인, 방랑자, 최면술사, 마술사, 음악의 입을 여는 영매 같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그의 피아노만큼이나 별명이 다채롭다.

라스무센은 이러한 다채로움이 결국은 음악 그 자체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강조한다. 리흐테르는 “음악 작품은 오로지 언제나 새롭게 탄생하는 근사치로서만 존재함을 잘 알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음악이 만일 늘 새로이 태어나는 존재라면, 연주 또한 새로워야 마땅하다. 그럴 때의 다채로움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본질인 셈이다. 작곡가와 작품들이 저마다 다른 말을 하는데 어떻게 같은 목소리, 같은 뉘앙스로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라스무센은 리흐테르가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의 색깔을 입는다”고 지적한다. “슈만을 연주하는 그의 피아노 소리는 따뜻한 노래처럼 들리고, 리스트를 연주하는 소리는 불꽃을 튀기는 듯 빛나고, 기운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들리며, 브람스를 연주할 때의 소리는 묵직하고 옹골찬 음색이 두드러지고, 프로코피예프를 연주할 때의 소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공격성이 부각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채로움의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다. “리흐테르는 언제나 사랑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 늘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피아니스트

리흐테르는 늘 작품과 사랑에 빠졌다. 음악에 몰입하는 능력, 그럼으로써 작품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능력에 관한 한 리흐테르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시를 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음악을 대했다. 마치 서정시인이 대상에 몰입함으로써 성찰의 깊이를 얻어내듯이 그는 작품에 몰입해 음악에 동화되고자 했다.

완벽성을 위해 봉사했던 미켈란젤리나 차가운 거리두기와 실험을 즐겼던 굴드와는 달리 리흐테르는 끝없이 작품에 다가가려 했다. 작품과 자신 사이에 어떤 거리도 없을 때까지 다가가서 그 속에서 음악의 음성을 듣고 찾아냈다. 마치 작품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듯이 말이다. 그래서 리흐테르의 피아노에는 언제나 은밀하게 속삭이는 듯한 친밀함이 담겨 있다.

이러한 음악적 은밀함, 친밀함을 지켜내기 위해 차라리 이 세상 다른 것들로부터 거리를 둔 피아니스트였다. 심지어 관객마저도 리흐테르는 멀리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은 관객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아니 그들이 의식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기피하는 데서 나오는 무조건적인 ‘울타리 치기’가 아니었다. 이 때의 관객이란 그저 유명인을 보고 싶어서 공연장에 몰려드는, 개인화되지 못한, 정체불명의 다수를 뜻한다.

리흐테르는 무리가 보내는 무분별한 찬탄이나 그로 인해 얻어지는 유명세로부터 음악적 진정성을 지키려 했을 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음악을 향한 그의 ‘서정적 몰입’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읽어낼 수도 있다. 서정 시인은 시를 읊조릴 때 주위 모든 잡다한 것을 잊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만일 작품과 개인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관객이 있다면 그는 시베리아 오지까지라도 찾아갔고, 한때 창고에 불과했던 프랑스의 투렌 같은 곳을 최고의 연주회장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이런 리흐테르의 뜻을 모르는 이들에게 리흐테르는 은밀한 수수께끼다. 그러나 그 뜻을 알아듣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친밀한 친구가 된다.

말을 걸어오는 친밀함에는 속마음을 헤아리는 깊은 정신성뿐 아니라 피부로 전해지는 온기가 포함돼 있다. 신중한 내향성뿐 아니라 때론 주변을 모두 산화시킬 것 같은 육체적 격렬함도 동반된다. 리흐테르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아찔한 균형을 유지했다. 어쩌면 이는 그가 살아온 시대의 요구이기도 했다. 검열과 감시 속에서 속마음을 감추고 입을 닫아야 했던 시대, 오로지 손으로, 몸짓으로 진실을 드러내야 했던 시대를 그의 몸과 마음은 기억하고 있다.

또 리흐테르의 연주는 아무리 기교적인 난곡에서도 기술적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다. 라스무센의 말대로 작품 안에서 “육체와 영혼이 각각 서로를 발견하는 그 지점을 찾아내는 능력”이야말로 리흐테르가 가진 독보적 재능이다.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했으며, 잠시도 정주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방랑자적 속성”은 무엇보다 그의 라이브 공연에 잘 묻어난다. 리흐테르에게 있어서 호기심, 새로움, 신선함, 영감, 방랑 등은 모두 같은 말이다.

건반 위의 방랑을 통해 리흐테르는 보통의 가녀린 이미지 너머로 육중한 쇼팽의 소리를 상상해내고, 독일 작품에는 슬라브적 요소를, 러시아 작품에는 게르만적 요소를 섞으며, 바흐와 모차르트에 낭만적 환상을, 브람스에 경쾌한 발랄함을 주저 없이 덧입힌다. 이처럼 리흐테르가 남긴 음반들은 “음악이 언제나 정신이자 삶이며 영혼이자 육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들을 때마다 가슴이 훈훈히 데워짐”을 느낀다.

● ‘참혹한 시대에도 인간다움은 죽지 않고 살아 남는다’ 입증

저자는 리흐테르의 시대가 어떻게 그의 인격과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대단히 상세하고 사려 깊게 기술한다. 동시대의 작곡가이자 체제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등과의 교류에서 리흐테르가 느껴야했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라스무센은 매우 적절하게 그린다.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그가 연주하게 된 경위를 포함해서 수많은 일화와 금욕주의자로 알려진 리흐테르가 어떻게 음식으로 동료들을 축하하는 것을 좋아했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리흐테르의 아버지가 반역죄로 억울하게 재판을 받아 소련 당국에 의해 처형당한 사실은 그가 정치권력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지은 사건이다. 또한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리고 애인과 함께 독일로 이주한 사건 또한 그의 정신에 영영 아물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그 이후 그는 고국인 러시아와 조상의 뿌리와 음악적 스승들의 땅 독일에 대해 격렬한 양가감정(兩價感情)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됐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맞붙은 세계 2차 대전의 참상과 독일인이냐, 러시아인이냐, 유대인이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져야 했던 홀로코스트의 부조리, 나중에 닥쳐온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부자유와 억압, 자신의 동성애 성향과 이를 금기시하는 러시아 사회의 위협 등 리흐테르가 삶에서 맞닥뜨린 비극은 그에게 길고도 무거운 침묵의 삶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런 비극이 그의 내면까지 잠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몸짓으로, 악기로 말했고, 참혹한 시대에도 인간다움은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고 증언했다.

● 선별된 디스코그래피와 풍부한 색인

리흐테르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고 가장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를 남긴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해적판과 출처 불명의 녹음도 많아 감상자들의 귀를 망치는 경우도 많다. 라스무센은 그의 모든 음반을 낱낱이 설명하기보다는 그의 주요 레코딩을 선별하고 리흐테르의 음악 세계를 친절하게 해설한다.

리흐테르를 처음 접하는 감상자라면 라스무센이 언급하는 전설적인 음반들로 감상을 시작해도 좋다. 특히 굴드, 미켈란젤리, 호로비츠 등 당대의 명 피아니스트와 리흐테르를 비교하는 대목들도 흥미롭다. 여기에 더해 광범위한 색인은 이 책만이 가지는 장점이다. 독자들은 한 음악가의 평전을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러시아 문화사의 주요 인명을 이 책을 통해 요약적으로 접할 수 있다.

/kim67@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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