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작곡가는 ‘상상을 조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귀를 괴롭힐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에 연주할 곡은 300년의 시차를 두고 ‘눈(Snow)’의 아름다움을 탐미한 곡입니다. 연주 시간이 길기 때문에 집중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시 잠들었다 깨어도 어차피 눈은 계속 내릴 겁니다. 좋은 꿈 꾸세요.”
지난 28일(수) 오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작곡가 겸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는 ‘앙상블블랭크’의 최재혁 예술감독이 관객에게 이런 말을 한 후, 덴마크 작곡가 한스 아브라함센의 ‘눈(Schnee)’을 들려줬다. 연주 시간이 무려 1시간이다.
이날 공연은 예술의전당 ‘2022 아티스트 라운지’의 마지막 순서로 ‘앙상블블랭크의 화이트크리스마스(White Christmas)’라는 타이틀로 열렸다. 300년의 시간을 두고 겨울과 눈을 주제로 한 세 곡을 준비했다. 앙상블블랭크는 젊은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현대음악 전문 연주팀이다.
아브라함센의 ‘눈’을 연주하기에 앞서 두 곡이 청중을 만났다. 먼저 최재혁이 작곡한 ‘눈’이 세계 초연됐다.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이다. 관객이 무대를 바라봤을 때 왼쪽에 피아니스트 최형록이, 오른쪽에 피아니스트 정다현이 앉았다.
조명은 모두 꺼졌다. 비상구를 알리는 녹색 조명만 또렷하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음악이 시작됐고, 역시 희미한 불빛 속에서 음악이 끝났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현대적 곡이다보니, 단박에 음악의 기쁨을 느낄 수는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이 주고받는 케미를 보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묘한 음악의 매력은 있을 것이라고 짐작됐다. 최재혁은 “편안한 집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Winter)’을 선사했다. 최재혁의 지휘 아래 바이올리니스트 한윤지가 솔리스트로 협연했다. 앙상블블랭크의 바이올린(태선이·김계희·김예지·박재준), 비올라(최하람·신경식), 첼로(이호찬·배성우), 더블베이스(유이삭)가 하모니를 뽐냈다. 가수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도 바로 이 ‘겨울’의 2악장을 삽입해 큰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앙상블블랭크는 ‘엄청난 산’을 우리 앞에 몰고 왔다. 플루트(류지원), 오보에(이유진), 클라리넷(김길우), 퍼커션(이서림), 피아노(정다현·최형록), 바이올린(김예지), 비올라(신경식), 첼로(배성우)가 최재혁의 손길을 따라 아브라함센의 ‘눈’을 연주했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끼이익’ 긁는듯한 날카로운 금속성 선율, 탁자에 종이를 비벼 내는 바스락 소리, 피아노 프레임을 문질러 내는 ‘삐이익’ 사운드 등이 복합적으로 중첩되며 ‘고통스러운’ 1시간이 이어졌다. 이 곡 역시 최재혁의 투 피아노 버전곡 ‘눈’과 마찬가지로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많이 어려웠다. 보는 사람에게 집중력과 지구력이 필요했으니, 연주하는 사람은 더 많은 집중력와 지구력이 필요했으리라.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희한한 경험이다. 아브라함센의 곡을 듣는 동안 뜬금없이 시 두 편이 머리를 맴돌았다. 어쩌면 이런 개연성 없는 오버랩도 현대음악의 매력 아닐까.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데 정작 현대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지만, ‘아브라함센의 곡→박용래·문정희의 시’로 이어지는 생뚱맞은 비약도 충분히 의미가 있으리라.
잠시 눈을 옛날로 돌리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다. 폭동 사태까지 일으켰던 1913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도 당시에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고, 1912년 아놀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도 그 시대엔 불협화음으로 평가절하됐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한 음악으로 존경받고 있지 않은가.
까다로운 현대음악을 당당하게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사람과 그룹이 많지 않은 현실을 생각하면 최재혁와 앙상블블랭크의 도전은 분명 뜻 깊은 작업이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더 자주 봐야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음악평론가 송주호는 앙상블블랭크의 화이트크리스마스를 감상한 뒤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곱씹어볼 내용이 많다.
“최재혁의 신곡은 눈이 주는 환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음색과 제스처로 시각적인 이미지를 청각적으로 투영했습니다. 비발디를 폭넓은 다이내믹과 술폰티첼로(sul ponticello·활을 브리지에 가깝게 또는 닿을 정도로 연주하는 현악기의 특수 주법) 등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음악적 제스처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센은 선별된 연주 기법으로 단일한 정서를 만들었습니다. 연주자들은 남다른 집중력으로 약 한 시간 동안 고요함을 유지하면서 이러한 정서들이 변화하고 겹치게 했고, 관객들에게 극적 진행이 거의 없음에도 정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인지하게 했습니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한 시간 동안 멍하게 바라보는 듯한, 소위 요즘의 ‘눈멍’ 정서에 부합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관객에게 감동을 준 요인일 것입니다.”
[에필로그] 될성부른 떡잎 알아본 사이먼 래틀·파보 예르비
최재혁이 그동안 이룬 성취는 주목할 만하다. ‘될성부른 떡잎’ 최재혁을 먼저 알아본 것은 세계적 거장들이다. 그는 사이먼 래틀, 파보 예르비 등의 잇단 러브콜을 받으며 착실하게 지휘자의 길을 밟고 있다.
최재혁은 2017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작곡부문 최연소 1위를 차지하며 작곡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2018년 9월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사이먼 래틀, 던컨 워드와 함께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의 3명의 지휘자를 위한 작품인 ‘그루펜’을 지휘했다. 악단은 세계톱클래스 런던심포니였다.
2022년 7월에는 마에스트로 파보 예르비 앞에서 솜씨를 뽐냈다. 최재혁은 에스토니아의 휴양지 패르누에서 매년 여름 개최되는 ‘패르누 뮤직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다. 이 페스티벌은 ‘거장’ 예르비가 자신의 고향에서 주관하는 국가적 규모의 축제다. 그는 예르비 아카데미 유스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지휘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최재혁은 지난해 11월에는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예르비는 젊은 지휘자를 대상으로 지휘 아카데미를 진행했는데, 전 세계에서 지원한 278명의 지휘자 중 예르비가 직접 선택한 6명에 선발돼 무대에 섰다.
또한 최재혁은 12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 내한공연 때 예르비의 부지휘자로 낙점돼 한국투어 내내 예르비를 보조했다. 그의 경험과 실력은 매일 업그레이드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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