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1. 1919년 3월이다. 영국의 여성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는 조선땅 경성에 도착한다. 왁자지껄한 광화문 뒷골목의 시전, 하늘천 따지를 목청껏 외우는 서당, 기러기 한쌍 놓여있는 결혼식과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신부들, 옹기종기 기와가 덮인 한옥 등 생소하고 신비로운 풍경에 매료된다. 키스는 자신이 보고 느낀 조선의 모습을 편지에 담아 보낸다. 편지 속 조선의 풍경은 밝고 활기차지만 슬픔이 묻어 있다. 곳곳에 일본 무장군인들이 제복을 입고 경계를 서고 있다. 키스는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난다. 금강산의 모습은 비와 구름이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거세다. 조선의 상황을 보는 듯 위태롭다.
키스는 조선의 이름을 갖고 싶다. 완연한 조선인의 모습이 되고 싶다. 키스는 자신의 그림에 ‘Keith’라고 적는다. 그러나 곧 서명을 지운다. 그리고는 다시 ‘奇德(기덕)’이라고 이름을 쓴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이제 엘리자베스 기덕이 되고 조선인들은 기덕와 어우려져 흥겨운 군무를 춘다. 서울시무용단은 오는 11월 2일부터 5일까지 ‘엘리자베스 기덕’을 M씨어터에서 공연한다. 기덕의 작품들은 영상을 통해 다시 숨을 쉰다. 그림은 영상으로, 영상은 무대의 무용수로 100년 전 조선의 모습을 수놓는다.
#2. 연극 ‘겟팅아웃’은 8년간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한 여자의 이야기다. ‘잘자요 엄마’로 잘 알려진 퓰리처상 수상자 마샤 노먼의 첫 희곡이다. 출소한 알린은 루이빌의 허름한 아파트로 돌아와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새로운 길을 찾고자 이름도 알리에서 알린으로 바꿨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자꾸만 그의 현재를 억누르면서 알리로 살아가라고 등을 떠민다.
음탕한 전직 교도관, 무정하고 무뚝뚝한 어머니, 포주였던 남자 친구 등이 찾아와 아픈 상처를 찌르고 출소 첫날의 자유를 가차 없이 짓밟고 뭉갠다. 과연 알린에게 새로운 삶은 불가능한 것일까? 여느 삶고 마찬가지로 이 연극도 간단하게 답을 내놓지 못하지만 역경에 맞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알린의 투쟁은 선명하게 우리를 그의 편을 이끌어준다. 지난해 9월 임명된 서울시극단 고선웅 단장의 직접 연출하는 ‘겟팅아웃’은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M시어터에서 공연한다.
#3 오페라의 거장 푸치니의 ‘투란도트’는 그가 죽기 전 마지막에 작곡한 작품이다. 투란도트라는 얼음처럼 차갑지만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중국의 한 공주에 관한 이야기다. 투란도트와 결혼하기 위해 타타르 왕국의 왕자인 칼라프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공주가 낸 세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도전한다. 칼라프 왕자가 승리를 확신하며 부르는 ‘네순 도르마(모두들 잠못 이루리)’는 테너의 대표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울시오페라단은 오는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대극장에서 ‘투란도트’를 무대에 올린다. 투란도트 역에는 유럽 주요극장에서 주역가수로 활동 중인 소프라노 이윤정이, 그리고 티무르 역에는 베이스 양희준이 캐스팅됐다. 칼라프 역으로는 세계 정상급 테너 이용훈의 출연이 논의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극장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연출을 선보여 유럽 주요 극장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요나 킴이 새로운 ‘투란도트’를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제작극장으로의 대대적 변화를 알린 세종문화회관이 올해 ‘엘리자베스 기덕’ ‘키스’ 등 야심찬 신작 12편과 ‘일무’ ‘알로하, 나의 엄마들’ 등 작년 호평을 받은 레퍼토리 16편 등 모두 28편의 공연을 선보인다.
세종문화회관 안호상 사장은 31일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 라운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은 내용의 ‘2023 세종시즌 라인업’을 공개했다.
안 사장은 “올해 제작극장으로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을 개발하는데 역량을 모으겠다”라며 “공연 횟수를 대폭 늘려 전년대비 74% 증가한 총 28편 251회 공연을 준비한다”고 밝혔다. 이 중 23편 222회의 공연을 세종문화회관 산하 예술단인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서울시무용단, 서울시합창단, 서울시뮤지컬단, 서울시극단, 서울시오페라단 등이 맡는다.
안 사장은 지난 1년간의 극장 운영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단원들과 감독의 역량에도 제작과 기획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탓에 기대만큼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내지 못했다”며 “상반기부터는 인력 편제를 바꾸고 제작 직군을 새로 만들어 제작 기반을 튼튼하게 다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올해는 12편의 새로운 작품을 공개하는 한편 지난해 선보인 신작들을 업그레이드해 예술단 고유의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한다는 계획이다.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일제강점기 조선을 여행하며 남긴 편지와 작품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창작무용 ‘엘리자베스 기덕’이 눈길을 끈다. 칠레 극작가 기예르모 칼데론 원작의 연극 ‘키스’도 국내 초연이다. 전쟁에 대한 소름 돋는 통찰과 은유가 있는 작품으로, 차세대 연극계를 이끌 우종희가 연출을 맡는다.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뮤지컬로 재해석한 서울시뮤지컬단의 ‘맥베스’ 등 다양한 장르의 신작이 관객을 만난다.
지난해 9월 서울시극단 단장으로 합류한 연출가 고선웅은 퓰리처상 수상자 마샤 노먼의 희곡 ‘겟팅아웃’과 오페라로도 널리 알려진 소설 ‘카르멘’을 각색한 신작 연극의 연출을 직접 맡는다. 그는 간담회에서 “처음으로 월급 받는 사람이 돼 기분은 좋지만, 이것저것 쓰고 나면 예전과 똑같다”고 말해 웃음을 안겨줬다.
서울시오페라단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선사한다. 세계 최정상 성악가인 소프라노 황수미를 비롯해 테너 김건우, 바리톤 김기훈, 소프라노 김효영 등이 출연해 초현실 판타지 공간을 구현한다.
지난해 초연에서 호평 받았던 작품도 올해 다시 돌아온다. 서울시무용단 정혜진 단장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의 만남으로 화제가 됐던 ‘일무’가 5월 공연된다. 종묘제례악에 맞춰 추는 전통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작년 빅히트했다. 서울시뮤지컬단의 창작 뮤지컬 ‘다시, 봄’과 ‘알로하, 나의 엄마들’도 각각 3월과 7월 무대에 오른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은 아쟁 산조의 명인 김일구, 해금 연주자 김애라 등과 함께하는 ‘명연주자 시리즈’와 국악관현악의 새로운 확장을 실험하는 ‘믹스드 오케스트라’ 시리즈를 이어간다. 서울시합창단은 롯데콘서트홀에서 ‘시그널 : 오르간과 함께하는 합창음악’을 열고, 바리톤 양준모와 소프라노 김순영이 출연하는 ‘헨델, 메시아’도 선보인다.
세계적 수준의 연주자들이 함께하는 클래식 기획 공연도 찾아온다. 11월에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지휘와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협연으로 대극장에서 열린다. 수준 높은 실내악 공연을 선보이는 ‘세종 체임버 시리즈’로는 피아니스트 임동혁, 박재홍, 이혁이 차례로 무대에 오른다. 이들이 연주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고전주의 시대 작곡가들의 음악이 기대된다.
오랜 시간 세종문화회관과 함께한 공동주최 공연도 이어진다. 6월부터 뮤지컬 ‘모차르트’가 7번째 시즌으로 돌아와 8월까지 팬들을 만나고, 송년 스테디셀러인 유니버설 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도 12월에 찾아온다.
올해 개관 45주년을 맞은 세종문화회관은 지난해 인접한 광화문 광장의 새 단장으로 시민들의 접근성이 좋아진 데 이어 이르면 2026년 착공을 목표로 건물 개축을 추진하는 등 대대적인 변화의 길목에 있다.
안 사장은 “개선된 환경에 걸맞은 내면적인 변화와 프로그램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며 “한류의 인기와 공연 시장의 양적 성장, 공연 수요의 양극화라는 환경에서 순수예술 장르 공연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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