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초연 ‘로베르토 데브뢰’ 연출 맡은 김숙영 “68세 여왕의 가슴 떨리는 사랑 뭉클”

라벨라오페라단 ‘도니제티 여왕 3부작’ 8년만에 완성
여왕 아닌 여자 엘리자베타의 인간적 모습 부각 집중

“턴테이블·리어 무대 등 오페라극장 인프라 적극 활용
??????????????대사·가사 의역해 친절자막 제공 읽는 재미도 쏠쏠“

박정옥 기자 승인 2023.05.15 08:42 | 최종 수정 2023.05.15 16:03 의견 0
김숙영 연출이 도니제티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 국내 초연을 앞두고 여왕이 아닌 여자 엘리자베타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겠다고 밝히고 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국내 초연이라 욕심 냈죠. ‘정말 해보고 싶다’ 간절히 원했는데 기적처럼 전화가 왔어요. 작품을 맡았으니 창작에 버금가는 새로움과 벨칸토 오페라의 진수를 전해줄게요. 두 마리 토끼 꼭 잡을 겁니다.”

김숙영 연출은 오페라 경력 10년이 넘는 베테랑이다. 그동안 굵직한 작품을 모두 섭렵했는데도 ‘로베르토 데브뢰’는 정말 탐났다고 고백했다. 라벨라오페라단 이강호 단장이 “함께 만들어보자”라며 러브콜을 보냈을 때 기뻤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라벨라오페라단에서 만난 김숙영 연출은 “저뿐만 아니라 캐스팅 된 성악가들도 마찬가지다”라며 설레는 마음을 내비친 뒤, “모두들 겹치기 출연을 스톱하고 오로지 여기에만 올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만큼 매력 넘치는 작품이라는 방증이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가에타노 도니제티가 작곡한 ‘여왕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2015년에 ‘안나 볼레나’를, 그리고 2019년에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공연했다. 그리고 이번에 ‘로베르토 데브뢰’까지 무대에 올려 8년 만에 시리즈를 완성한다. 민간 오페라단이 그랜드 오페라급 세 작품 모두를 초연한다는 점에서 기념비적 업적이라는 평가다.

살바토레 캄마라노가 대본을 썼으며 1837년 10월 28일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와 제2대 에식스 백작 로베르토 데브뢰(1566~1601)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엘리자베스의 젊은 연인이었으나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한 로베르토 데브뢰와의 어긋난 관계를 그리고 있다. 오는 26·27·2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세 차례 공연한다.

“엘리자베타, 로베르토 데브뢰, 사라, 노팅험 공작 등 주인공 4명이 펼치는 연기와 노래는 상상초월이죠. 마지막에 만들어진 시리즈 피날레 작품이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도 가장 완성도가 높아요.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비극적 감동을 선사합니다. 68세의 여왕과 33세의 신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4각 관계는 시간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죠.”

김 연출은 작품을 엑설런트하게 뽑아내려면 역사와 인문 공부가 필수라고 강조한다. 이번 공연을 맡으면서도 영국 튜터가를 샅샅이 훑었다. ‘3시간짜리 오페라 하는데 뭘 그렇게 열공하느냐’고 핀잔을 받기도 하지만, “적어도 한 달은 공부해야 작품에 접근할 용기가 생긴다”며 “깊이가 없으면 실패하기 때문에 드라마트루그(dramaturg) 수준은 돼야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작품 어프로칭 방식이 학구적이다.

이어 “하지만 오페라에서 해답을 찾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오페라에서 찾으면 ‘카피’가 된다”고 덧붙였다. 스스로 독창적 콘셉트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오래전에 본적이 있는 오페라에서 이미 차용한 아이디어가 새로운 것으로 포장돼 나올 수도 있기에 세심하게 살핀다. 엄격한 셀프검열이다.

김숙영 연출이 도니제티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 국내 초연을 앞두고 턴테이블 무대 등 오페라극장의 다양한 인프라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김숙영 연출이 도니제티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 국내 초연을 앞두고 턴테이블 무대 등 오페라극장의 다양한 인프라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옥에도 티는 있는 법. ‘로베르트 데브뢰’의 약점은 촘촘하지 못한 드라마 스토리다. 이야기 자체가 허술하다. 이 빠진 것처럼 설렁설렁하다. 이것을 커버하기 위해 고민이 많다. 지휘자, 성악가, 오케스트라의 음악·노래로 절반을 채우고 나머지는 연출의 영역에서 채워야한다.

그래서 무대전환에 신경을 많이 썼다. 오페라극장이 갖추고 있는 인프라를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턴테이블무대(빙글 도는 회전 무대), 하부무대(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무대), 리어무대(뒤쪽에서 앞쪽으로 나오는 무대)를 모두 사용할 예정이다. 축구경기에서 운동장을 넓게 쓰듯 극장의 모든 장치를 총동원한다.

“살짝 비밀을 공개하면, 턴테이블의 경우 ‘여자일 때의 공간’과 ‘여왕일 때의 공간’ 두 가지로 변신합니다. 엘리자베타의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거에요. ‘권력도 필요 없어, 그저 사랑만 필요해’라며 예쁜 척 노래를 하더니, 무대가 돌아가며 장면이 바뀌면서 원래대로의 근엄하고 엄숙한 여왕이 돼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노래를 부르죠. 회전무대는 여왕의 정반대 성격을 보여주는 훌륭한 도구죠.”

하부무대와 리어무대도 어떻게 사용될지 궁금하다. 그는 “그냥 액티브한 효과를 주기위해 이런 장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상황에 딱 들어맞는 심리 묘사를 위해 사용한다”고 덧붙였다. 지루할 틈이 없는 오페라를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김 연출은 독특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화가의 꿈을 품고 미술을 전공했다. 그런데 정작 대학은 한양대 성악과로 진학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에는 오페라·뮤지컬 연출 석사학위(애리조나주립대)를 받았고, 귀국해서는 한양대에서 연극영화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모든 것은 예술에 대한 넘치는 호기심과 사랑에서 시작됐다”며 “종합예술인 오페라를 연출하는 데 다양한 전공을 거친 게 도움이 됐다”며 웃었다.

그는 ‘연출 김숙영’ 뿐만 아니라 ‘작가 김숙영’으로도 불린다. 직접 대본까지 쓴다. 벌써 뮤지컬 3개, 오페라 6개를 완성했다. 공모전에서 상도 받은 실력파다. 글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작가들이 쓴 대본을 보는데 너무 불편했어요. 내용은 훌륭한데, 오페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냥 ‘글빨’만 믿고 맡겼더니 힘들었어요. 출연자들의 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쓰더라고요. 그 대본대로 공연하면 배우들은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고, 헐레벌떡 뛰어나와야하는 등 자연스러운 연출의 흐름을 기대할 수 없었어요. 뒤죽박죽이죠.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제가 직접 쓸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기획자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힘이 됐다. 대본 작가가 '원고를 절대 고칠 수 없다’고 펄쩍 뛰자, 아예 작가를 배제시키더니 ‘김 선생이 한번 고쳐 봐요’라며 수정을 맡겼다. 대본이 잘 나오자 배우들 모두 만족해했고, ‘나도 쫌 하네’라며 자신감이 붙었다.

그의 글솜씨가 작품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국립오페라단 제작 ‘라 보엠’을 맡았을 때다. 1막과 2막, 3막과 4막 사이에 원작에 없는 팬터마임을 넣었다. 배우가 무대로 나와 자막에 뜨는 ‘로돌포의 일기’를 바탕으로 마임 연기를 펼친 것. 이 ‘로돌포의 일기’는 원작 소설을 기초로 김 연출이 직접 썼다.

그는 “막과 막 사이 무대를 전환할 때 정적 속에서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관객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방해물로 작용한다. 오랜 고민 끝에 극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관객이 로돌포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마임을 활용했다”고 말했다.

김숙영 연출이 도니제티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 국내 초연을 앞두고 '좋은 가수라면 나쁜 연출을 커버하지만, 좋은 연출이라도 나쁜 가수를 커버하지 못한다'는 말로서 성악가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이번 ‘로베르토 데브뢰’에서도 실력을 보여준다. 역시 자막이다. 가사와 대사를 딱딱하게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해 최대한 ‘실생활 번역’을 한다. 그는 “외국어를 직역하다 보니 그동안 우리의 정서와 동떨어진 부분이 너무 많았다. 관객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전체 스토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의역을 했다”고 말했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막에서도 감동이 있는 오페라다. “한편의 시와 같은 표현도 들어있어 눈물 찔끔 장면도 여럿 있다”고 자랑했다.

김 연출은 오페라의 성공은 성악가들에게 달려 있다며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보냈다. 출연자들과의 첫 만남에서 그런 마음을 표현했다. “좋은 가수라면 나쁜 연출을 커버하지만, 좋은 연출이라도 나쁜 가수를 커버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결국 여러분이 힘이다. 여러분이 성공의 열쇠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든든한 우군으로 톱클래스 성악가들이 대거 포진했다. 소프라노 박연주·손가슬이 엘리자베타를, 테너 김효종·이재식이 로베르토 데브뢰를 맡는다. 바리톤 정승기·임희성이 노팅험 공작을, 그리고 메조소프라노 최찬양·소프라노 조정희가 사라를 연기한다. 이밖에도 테너 김지민(체칠 경), 베이스 금교동(괄티에로 랄레이그 경), 베이스 김재율(여왕 기사·노팅험 부하)이 출연한다. 세계적 마에스트로 실바노 코르시가 베하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메트오페라합창단을 지휘한다.

“개인적으로 2막에 나오는 엘리자베타, 데브뢰, 노팅험의 3중창을 좋아해요. 극 전체에서도 가장 하이라이트 부분이죠. 엘리자베타는 데브뢰의 마음이 사라에게 빠져 있음을 알고 분노하고, 노팅험은 친구 데브뢰가 자신의 아내 사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역시 분노하죠. 데브뢰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 화가 납니다. 세 사람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명장면입니다.”

김 연출은 음악에 더 집중하게 만들어야 이번 공연이 히트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심오한 메시지를 주기 보다는 사랑에 굶주리고 갈구하는 여왕의 인간적 모습을 부각할 것이다. 왕관을 내려놓고, 가발과 옷을 벗으며 흐느끼는 디테일 장면에 공을 많이 들였다. 권위를 팽개치고 체통을 내던지며 무너지는 여왕의 모습은 ‘나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인간이고 싶다’는 절규로 읽히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68세 여왕의 가슴 떨리는 뭉클 사랑이 그의 손에서 탄생한다.

오페라는 3D업종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막대한 제작비에 비해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페라는 귀를 열고 들어야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마음도 열고 들어야 하는 장르입니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참맛’을 느낄 수 있어요. 살짝 진입장벽이 있지만, 이것만 뛰어넘으면 중독성 있는 예술입니다. 최근 필수적인 장치만으로 꾸민 상징적 무대가 많지만, 저는 원작에 가까운 트러디셔널(traditional) 무대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관객은 반드시 오리지널 무대를 경험한 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상징적 무대를 즐기려면 정통무대를 먼저 거쳐야하죠. ‘뮤지컬보다 재미있다’ 이런 평가도 중요하지만, 솔직한 희망은 ‘영화보다 재미있다’ 입니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로베르토 데브뢰'가 옵니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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