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다른 곡도 들어보고 싶게 만들었다...룩셈부르크 필하모닉 ‘엑설런트’

구스타보 히메노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지휘
뚜렷한 목관·청아한 금관·생동감 넘친 현악 ‘감동’

한재민은 ‘드보르자크 협주곡’ 아기자기한 연주
압도적이지 않았지만 기대되는 열일곱살에 박수

민은기 기자 승인 2023.05.26 15:27 | 최종 수정 2023.05.26 16:51 의견 0
첼리스트 한재민이 구스타보 히메노가 지휘하는 룩셈부르크 필하모닉과 드로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빨간 양말이 열일곱 살의 발랄함을 보여준다. ⓒ빈체로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한재민이 1697년산 ‘지오반니 그란치노’ 첼로를 들고 나왔다. 올해 초부터 삼성문화재단에서 후원을 받아 사용하고 있다. 한때 양성원과 문태국도 이 명기(名器)를 썼다.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죠. 매우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는 악기임은 확실해요.” 손에 완전히 익숙하지 않았음을 넌지시 내비쳤다.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그는 구스타보 히메노가 지휘하는 룩셈부르크 필하모닉과 협연했다. 스페인 출신의 히메노는 2015년부터 룩셈부르크필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으며, 룩셈부르크필은 2003년에 이어 20년 만에 두 번째 내한공연이다.

한재민은 2006년생이다. 그동안의 성취가 놀랍다.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 최연소 우승(2021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 최연소 본선 진출 및 최종 3위(2021년), 윤이상 국제 콩쿠르 우승(2022년) 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선택한 곡은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b단조(Op.104)’.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처음 들었고, 첼리스트라면 꼭 배워야 할 필수 레퍼토리라고 말했다. 국내 무대에서 외국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재민은 지난 19일 룩셈부르크에서 룩셈부르크필과 리허설을 진행했다. 그때 녹음한 파일을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고 수시로 들으며 준비했다. 이 파일을 ‘오답노트’라고 부르며 복습하고 또 복습했다. 늘 그랬듯이 이번 공연도 단단히 별르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첼로는 음역대가 낮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쉽지 않은 악기다. 그는 “확실히 협연할 때는 소리가 어떻게 공간에 퍼져나가는지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첼로라는 악기의 특성상, 풀편성 오케스트라 소리를 뚫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 때, 객석에서 소리를 들어달라고 부탁해 피드백을 받는다”고 말했다.

첼리스트 한재민이 구스타보 히메노가 지휘하는 룩셈부르크 필하모닉과 드로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한 뒤 지휘자와 포옹학호 있다. ⓒ빈체로 제공


이제 실전이다. 1악장이 시작되자 저음역 현악기를 배경으로 클라리넷이 나지막이 첫 주제를 제시했다. 곧 클라리넷과 바순 등이 가세하면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이 주제 위에서 오케스트라는 폭발을 이끌어냈다. 이어 호른이 연주하는 서정적인 노래가 두 번째 주제 역할을 했다.

한재민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악단의 연주를 바라봤다. 슬쩍 지휘자를 보는 여유도 부렸다. 그리고는 애상적인 보헤미아 선율을 한줄 한줄 풀어 놓았다. 스스로의 첼로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표정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올라탈 땐 하모니가 빛났지만, 솔로 파트에선 살짝 빈약한 느낌을 줬다. 그의 우려대로 소리가 악단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격정적인 드라마의 1악장이 마무리됐다. 한재민은 여러 번 활을 그으며 다시 소리를 가다듬었다. 전체적으로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흐르는 2악장이지만, 1악장 때 놓친 볼륨업에 신경 쓰는 눈치다. 소리가 더 커졌다. 클라리넷과 플루트의 사이좋은 어깨동무 사이로, 한재민도 슬쩍 팔을 올려 합세한다. 정상궤도 진입이다. 차분한 분위기는 오케스트라의 폭발과 함께 격정적으로 돌변했다.

론도 형식의 3악장은 악단의 강력한 도입부로 시작된다. 이어 첼로가 슬라브풍을 주제로 제시한다. 특히 이 악장의 종결 부분은 드보르자크가 미국 체류를 마치고 프라하로 돌아와서도 오랜 시간 손봤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악장 중간에 이례적으로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느린 템포의 섹션을 쓰고, 바이올린과 첼로 2중주를 넣었다.

드보르자크는 3악장의 구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피날레는 점차 사라지면서 끝을 맺는다. 마치 한숨처럼. 1악장과 2악장을 회상하면서, 솔로 첼로는 점차 사그라든다. 그러다가 첼로는 다시 힘을 얻는다. 그 힘은 오케스트라로 가고, 전체는 폭풍같이 종결된다. 이것은 나의 아이디어고, 나는 이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한재민은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은 연주를 선보였다.

관객의 환호·박수에 퇴장과 입장을 반복한 한재민은 드보르자크의 ‘고요한 숲’을 앙코르로 선물했다. 그래도 계속 환호가 계속되자 아예 악장의 손을 잡고 나가는 재치를 보여줬다.

한재민은 다음달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전문가 학습 과정을 밟는다. 첼리스트 볼프강 에마누엘 슈미트에게 배울 예정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와 비올리스트 박하양도 이곳에 다니고 있다. 그는 이제 열일곱 살이다. 지금보다 내일의 커리어가 더 기대된다.

지휘자 구스타보 히메노가 룩셈부르크 필하모닉과 함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지휘자 히메노는 현재 토론토 심포니 음악감독도 겸하고 있으며 2025/26시즌부터 마드리드 왕립극장의 차기 음악감독을 맡는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2012년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에서 마리스 얀손스의 보조 지휘자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룩셈부르크필은 1933년 설립됐다. 독일과 프랑스 등 클래식 음악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국가들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살려 이들의 음악적 특성과 전통을 흡수했다. 20개국에서 모인 연주자들이 최고 수준의 음악을 구현하고 있다.

히메노와 룩셈부르크필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e단조(Op.64)’를 들려줬다. 1악장은 서주 첫머리에 등장하는 클라리넷의 우수에 찬 선율이 전체를 지배했다. 교향곡 전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토 주제’다. 가수 민해경이 부른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박건호 작사·이범희 작곡)는 이 부분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갑론을박 끝에 작곡자는 몇 소절을 인용했음을 시인했다. 서주의 모티브는 생동감을 가지고 클라리넷과 바순으로 연주된다. 뒤이어 장조로 된 온화한 2주제가 이어졌다.

2악장은 현악기의 장중한 도입부에 이어 유명한 호른 솔로의 주제가 나온다. 슬픔을 머금은 이 서정적 선율은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존 덴버가 불러 히트한 ‘애니의 노래(Annie’s Song)’도 이 부분을 살짝 빌려왔다. 상당히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호른 파트가 지나면 오보에가 한층 밝은 느낌의 주제를 연주한다. 중간을 넘어 살짝 음악이 멈추고, 앞부분의 모토 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지휘자 구스타보 히메노가 룩셈부르크 필하모닉과 함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세상에! 교향곡에 왈츠가 등장하다니.” 초연 당시 청중들이 가장 놀란 것은 3악장이었다. 5분 30초 동안 우아한 선율이 흐른다.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나풀나풀 춤을 춘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간부에는 스케르초적인 움직임이 주를 이뤘지만, 후반에서 한데 어우러졌다.

4악장은 긴 서주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1악장을 관통하는 모토 주제는 장조로 전환돼 승리의 행진곡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 승리는 아직 때가 이르다는 듯, 오케스트라는 다시 투쟁적인 단조의 조성으로 돌아온다. 여러 주제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지만 종국에는 다시 승리의 분위기로 컴백한다. 트럼본과 튜바의 ‘금속성 사운드’가 쉴 새 없이 귀에 꽂힌다. 끝나는 듯하더니 다시 음악이 이어진다. 짧지만 환희에 찬 코다로 운명의 여정을 종결한다.

앙코르는 차이콥스키 오페라 ‘눈의 아가씨’에 나오는 ‘멜로드라마’를 들려줬다. 귀호강을 했다. 바이올린 소리가 이렇게 애간장을 녹이다니. 몇 차례의 커튼콜을 응하며 무대로 나온 히메노는 보면대 위에 놓인 악보를 닫으며 ‘이제 그만 굿바이해야지’라는 사인을 보냈다.

평론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뚜렷하고 자신 있게 부는 목관, 청아하게 울리는 금관, 생동감 넘치는 현악이 어우러져 흡사 꽃들이 만발한 정원같이 화사했다”며 “최근에 이렇게 열심히 연주에 몰두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본 적이 없다. 룩셈부르크필의 연주는 다른 곡으로 또 들어보고 싶다”고 평했다. 류 평론가는 이어 한재민의 연주에 대해 “기대만큼 압도적이지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앙상블이 이어져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eunki@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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