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리뷰] “초연 3편 모두 인생오페라 됐다”...‘로베르토 데브뢰’ 도 압도적 찬사

라벨라오페라단 ‘도니제티 여왕 3부작’ 8년만에 마무리
김숙영 입체적 연출·실바노 코로시 세밀 지휘 ‘환상케미’"
박연주·손가슬·이재식·김효종 등 벨칸토 아리아 진수 선사

박정옥 기자 승인 2023.05.31 16:39 | 최종 수정 2024.02.02 10:52 의견 0
라벨라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의 한 장면.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꼬박 8년이 걸렸다. 라벨라오페라단이 드디어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을 완성했다. 2015년 ‘안나 볼레나’, 2019년 ‘마리아 스투아르다’에 이어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로베르토 데브뢰’까지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다. 국내 민간 오페라단이 외국에서도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세 작품을 한국 초연한 것은 사실상 ‘사건’이라는 평가다.

라벨라오페라단은 26·27·28일 세 차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로베르트 데브뢰’를 선보였다. 올해 열리고 있는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이다. 이 작품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와 제2대 에식스 백작 로베르토 데브뢰(1566~1601)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엘리자베스의 젊은 연인이었으나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한 로베르토와의 어긋난 관계를 그리고 있다.

26일 공연을 감상했다. 로비와 객석 1·2·3층이 관객들로 북적였다. 첫날 공연 티켓을 1만8000원에 타임세일한 작전이 제대로 통한 것. 공연을 기획한 라벨라오페라단 이강호 단장은 “1800여석이 3분 만에 매진됐다”며 “손해를 보더라도 진입장벽을 낮춰 더 많은 사람이 오페라를 경험하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머지 두 번의 공연도 빼곡했다.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N차 관람’을 했다는 팬들도 눈에 띄었다. “초연 3편 모두 인생 오페라”라는 글도 보였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삼박자가 척척 맞았다. 다양한 시도를 한 김숙영의 연출은 엑설런트했고, 고난도 벨칸토 스킬을 뽐낸 성악가들의 노래는 귀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실바노 코로시가 지휘한 베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메트오페라합창단의 호흡도 돋보였다.

라벨라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의 한 장면.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라벨라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의 한 장면.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연출을 맡은 김숙영은 공연 전 인터뷰에서 “최근 필수적인 장치만으로 꾸민 상징적 무대가 많지만 원작에 가까운 트러디셔널(traditional) 무대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며 “관객은 반드시 오리지널 공연을 경험한 후 ‘변화 있는 무대’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페라 제대로 즐기기 감상팁을 준 것.

그는 자신의 의도를 영리하게 구현했다. 우선 원작에 없는 신(scene)을 만들었다. 오케스트라가 서곡을 연주하며 막이 오르자, 스물다섯 살 엘리자베타(엘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되는 장면을 새로 넣었다. 역사적으로 1558년에 거행된 즉위식을 끼워 넣어 앞으로 여왕을 둘러싼 튜더 왕가의 이야기를 다룰 것임을 보여준 것. 또한 아버지 헨리 8세와 어머니 앤 블린의 스캔들을 다룬 ‘안나 볼레나’, 그리고 엘리자베타와 그의 5촌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라이벌 관계를 그린 ‘마리아 스투아르다’와도 통시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절묘한 선택이다.

대관식 장면 후 시간이 훌쩍 흘러 68세 엘리자베타과 33세 신하 로베르토, 그리고 그들과 사각관계에 놓이는 사라와 노팅험 공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통적 시대극에 걸맞은 무대 디자인과 의상이지만 전혀 아웃 오브 데이트(out-of-date)하지 않다. 김 연출은 극장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인프라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건 턴테이블을 활용한 입체적 연출. 한 무대에서 ‘여왕 엘리자베타’와 ‘여자 엘리자베타’의 시시각각 변하는 심리를 동시에 드러내 보여줬다. 권위와 체통을 지켜야하는 엄숙한 여왕은 무대가 180도 회전하면 싹 바뀐다. 35세 연하의 연인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천생 여자로 변한다. 엘리자베타는 문 하나를 두고 두 공간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연기했다.

라벨라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의 한 장면.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라벨라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의 한 장면.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웨스트민스터 궁, 노팅험 공작의 집, 런던탑 등 무대 자체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역동적이었다. 로베르토가 갇혀있는 지하 감옥이 지상으로 올라오게 하는 하부무대의 사용, 왕이 앉는 의자가 후면에서 전면으로 밀려 나오는 리어무대 등을 사용해 다이내믹을 살려냈다.

역시 ‘로베르토 데르뵈’ 흥행의 일등공신은 가수들이다. 엘리자베타(박연주·손가슬). 로베르토(이재식·김효종), 사라(최찬양·조정희), 노팅험 공작(정승기·임희성) 모두가 고난도 벨칸토 아리아를 소화해 퀄리티를 높였다. 로베르토 이재식은 3막 2장에서 존재감을 뽐냈다. 비장한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Ed ancor la tremenda porta...A te diro negliultimi...Bagnato il sen di lagrime(아직도 저 두려운 문이...죽음의 품안에서 당신께 말하리라...눈물로 범벅이 된 내 가슴으로)’를 불러 브라보 환호를 받다. 미성의 목소리가 흐르는 13분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엘리자베타 박연주는 3막 3장에서 로베르토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한다. 결국 자신이 로베르토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자책하며 비통함을 토해낸다. ‘E Sara in questi orribili momenti(사라는 이 끔찍한 순간에 날 저버릴 수 있을까)’ ‘Vivi, ingrate(이 은혜를 모르는 이여)’ ‘Che m’apporti(무슨 일인가요)’ ‘Quel sangue versato(저 피 흘린 자는 하늘로 올라가)’로 이어지는 고음 퍼레이드는 절창이었다. 왕관을 벗어던진 채 머리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을 보이며 부르는 아리아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라벨라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의 한 장면.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메조소프라노 최찬양은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라 역을 애절하게 표현했고, 노팅험 공작을 맡은 바리톤 정승기는 풍부한 성량으로 강한 인상을 남겨줬다.

이재식은 “이번 작품은 내용도 어려웠지만 고도의 성악적 테크닉이 필요해 고전과 부담이 많았다”라며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조건 해낸다는 집념으로 끝까지 노력했고, 그 덕분에 무대 위에서 살아있음을 제 몸의 모든 세포에 각인시켰다”고 소감을 전했다.

손가슬은 “4D 영화 수준으로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준 김숙영 연출과 노래가 절로 나오도록 지휘한 실바노 코로시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라며 “큰 위험 부담을 안고도 아무도 시도하지 못한 ‘여왕 3부작’을 올린 이강호 단장과 모든 스태프에게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 ‘한국 3대 테너’ 신영조 추모 자막 뭉클

<에필로그1> ‘로베르토 데브뢰’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뭉클했다. 무대 스크린에 ‘테너 신영조 1943.09.26.~2023.04.14.’라는 자막이 떴다. 그 밑에는 ‘이 아름다운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를 지난달 14일 하늘의 별이 되신 영혼의 목소리 테너 신영조 선생님게 헌정 드립니다’라고 적었다. 프로그램북에도 똑같이 넣었다.

‘한국 성악계의 큰 별’ 신영조 한양대 명예교수는 뇌경색 투병 끝에 별세했다. 신 교수는 1970~90년대 TV·라디오 등을 통해 우리 가곡을 널리 알려 한국가곡의 르네상스를 연 주인공이다. 박인수(1938∼2023), 엄정행과 함께 ‘한국 3대 테너’로 꼽혔다. 33년간 한양대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며 2009년 정년퇴임 때까지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4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라벨라오페라단 이강호 단장도 그의 제자였다. 신 교수는 2019년 ‘마리아 스투아르다’ 공연 때 비록 몸이 불편했지만 휠체어를 타고 와 제자의 공연을 응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 박보균 문화부 장관도 막공 감상

<에필로그2> 박보균 문화체육부 장관은 28일 ‘로베르토 데브뢰’ 막지막 공연을 감상했다. 국내 초연인데다 오페라가 아직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성악가들과 제작진을 응원하기 위해 일요일인데도 시간을 낸 것이다.

공연을 본 후 조촐한 뒤풀이에도 직접 참석했다. 박수길 전 국립오페라단 단장, 신선섭 대한민국오페라단연합회 이사장 등도 자리를 빛냈다. 박 장관은 “K컬처·K오페라를 이끄는 분들을 직접 만나게 되어 반갑다”라며 “문체부의 올해 역점 사업에 국악, 책, 그리고 오페라 등이 올라있으니 오페라의 미래를 위해 힘쓰겠다”고 말해 오페라 관계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 최고위과정 수료자들 깜짝출연 깨알재미

<에필로그3> 라벨라오페라단의 공연에는 깨알재미가 숨어있다. 라벨라오페라단이 운영하고 있는 ‘라벨라오페라 최고위 과정’ 수료자들에게 특별 출연 기회를 준다.

‘최고위 과정’은 오페라와 가곡 등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심화 과정이다. 현재 활발하게 연주활동 중인 성악가의 1:1 맞춤형 레슨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수업을 통해 호흡, 딕션, 음악코치, 연기훈련 등 폭넓은 과정을 배운다. 또한 오페라 페스티벌 관람 등을 통해 전문 오페라 무대를 한층 가깝게 즐길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단순히 좋은 목소리를 내는 1차원적인 시각이 아닌, 예술을 깊게 사유하는 과정이다.

올해 행운을 꿰찬 주인공은 이정희 씨(경기여고 교장)와 최현아 씨(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아티스트).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쉽게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당당하게 출연자에 이름을 올렸다. 잊지못할 행복한 추억이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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