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플레트뇨프 ‘편곡의 힘’...6편의 영화음악 듣는 듯한 ‘백조의 호수’

서울시향 포디움 데뷔해 자신이 엮은 스페셜 에디션 연주
선우예권은 플레트뇨프 버전 쇼팽 피아노협주곡 2번 선사

박정옥 기자 승인 2023.07.04 17:10 | 최종 수정 2023.09.11 21:53 의견 0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서울시향 데뷔 무대에서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스페셜 에디션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피아니스트 플레트뇨프’를 아직 보지 못했는데 ‘지휘자 플레트뇨프’와 ‘편곡자 플레트뇨프’를 먼저 만났다. 작곡가로도 탄탄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1957년생 지휘자는 예상보다 훨씬 셌다. 파워가 넘쳤다. 비록 걸음걸이가 느릿해 세월의 무게를 비켜가지는 못했지만 내뿜은 음악은 상상초월이다.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편곡의 예술은 바로 이런 거야”를 스스로 입증했다.

러시아 음악계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지난 29일과 3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대에 데뷔했다. 29일 공연을 관람했다. 플레트뇨프와 플레트네프 두 가지 이름이 섞여 쓰이지만 여기서는 플레트뇨프로 통일해 쓴다.

플레트뇨프는 1978년 21세의 나이로 제6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1990년에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민간 교향악단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RNO)’을 창단해 세계 톱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다. 이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인터내셔널 오케스트라(RIO)’도 새로 설립해 이끌면서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이번 무대에서 공들인 작품은 표트로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곡 중 첫 번째 작품인 ‘백조의 호수’.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낮에는 백조가 되는 오데트 공주와 그를 사랑하는 지크프리트 왕자의 스토리를 담았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화려하고 ‘호두까기 인형’이 명랑하다면, 이 작품은 처연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서울시향 데뷔 무대에서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스페셜 에디션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차이콥스키는 발레 전곡에서 6곡을 선택해 연주회용 모음곡으로 만들었다. 줄거리 전개와는 무관하게 친근한 선율 중심으로 엮었다. 플레트뇨프는 차이콥스키가 넣었던 ‘어린 백조들의 춤’ ‘헝가리 춤’ 등을 제외하고 원작 발레의 스토리 진행에 맞춰 새로 6곡을 택해 특별 편집판 모음곡을 만들었다.

제1곡부터 6곡까지 모두가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편집됐다. 영화음악 6곡을 듣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발췌 스킬이 놀랍다. 솜씨 좋은 작곡가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족집게 지휘’다. 과장된 몸짓은 멀리하고 살짝 살짝 포인트만 짚어주는 지휘였다. 다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음악에 몸을 맡기고 고스란히 음악 속으로 동화됐다. 때로는 손보다는 얼굴 표정으로 지휘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더 듣고 싶은 ‘백조의 호수’였다.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서울시향 데뷔 무대에서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스페셜 에디션을 연주한 뒤 관객에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제1곡(도입부)은 구슬픈 오보에 서주로 시작해, 뒤에 나타날 ‘백조의 주제’의 원형을 맛보기로 보여줬다. 제2곡(1막 전반부터 3곡)은 지그프리트 왕자의 성년을 축하하는 춤이 중심이 됐다. 슬라브 춤곡을 거쳐 2박자 알레그로의 경쾌한 춤으로 끝났다.

제3곡(1막 후반부터 3곡)은 원곡의 순서를 바꿨다. ‘백조의 호수’ 시그니처 선율인 2막 서두의 ‘정경’으로 시작한 뒤 1막 마을 축제 장면으로 돌아와 건배의 춤 장면의 폴로네즈로 이어졌다.

제4곡(2막의 2곡)은 지크프리트 왕자와 오데트 공주가 사랑을 맹세하는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하프 소리에 맞춰 바이올린 독주가 흐르고, 다시 하프 소리에 맞춰 첼로 독주가 흐른다. 귀로 음악을 들었을 뿐인데 백조들의 군무가 눈앞에 펼쳐진다.

제5곡(3막 ‘파 드 시스’ 중 바리아시옹 2)은 원곡에서 왕자의 신부 후보들이 추는 춤 장면의 두 번째 곡이다. 오보에, 코넷, 바순이 애수에 찬 민요풍 주제를 연주했다.

제6곡(4막의 2곡)은 왕자가 흑조 오딜에 속자 오데트가 비탄에 잠기는 장면으로 시작해 마법사의 방해를 극복한 두 사람이 격동적이고 환상적인 춤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류태형 음악 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는 “플레트뇨프 편집 버전 ‘백조의 호수’는 현과 관이 울부짖을 때 붕새가 날개를 펼치는 듯 거대한 음이 롯데콘서트홀을 휩싸고 돌았다. 서울시향 공연에서 최고의 볼륨감을 자랑했다. 여러 번 천장이 들썩이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플레트뇨프의 간결하지만 핵심이 묵직한 지휘 아래 서울시향은 마치 러시아 악단 같은 소리를 들려줬다. 날카로운 금관과 현악의 절도, 밤의 환상이 갈마들며 백조 없는 백조의 호수를 음악으로 가득 채웠다”고 말했다.

플레트뇨프와 서울시향은 이에 앞서 알렉산드로 글라주노프의 ‘쇼피니아나’를 들려줬다. 엑설런트했다. 글라주노프는 프레데리크 쇼팽의 피아노 음악에 매료돼 쇼팽의 작품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모음곡 ‘쇼피니아나’를 발표했는데, 거기서 발췌해 연주했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임윤찬에 앞서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원래 1번보다 먼저 쓴 작품이지만 출판순서가 바뀌면서 2번이 됐다. 19세 청춘의 풋풋한 설렘이 가득하다. 바르샤바 음악원 학생이던 쇼팽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소프라노 콘스탄치아를 짝사랑했다. 그 낭만적인 감정이 느린 2악장에 절절히 담겨있다.

선우예권은 플레트뇨프가 새롭게 편곡한 버전을 연주했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는 1935년 협주곡 2번의 관현악 파트를 새롭게 편곡해 선보였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서 이 곡을 연주했던 플레트뇨프는 2017년 자신이 지휘하는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프노프 협연으로 새 앨범을 녹음하면서 두 곡의 관현악 파트를 새롭게 구성했다. 플레트뇨프는 이 악보가 쇼팽의 관현악 파트를 손본 것이라기보다는 새로 쓴 것에 가깝다고 밝혔다. 원곡의 호른 2대와 달리 호른 파트가 4대로 보강됐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뒤 지휘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선우예권은 마에스트로와 보폭을 맞춰 입장했다. 플레트뇨프는 이게 부담스러웠는지 “내 걱정은 말아”라며 지휘봉으로 먼저 가라고 사인을 줬다. 플레트뇨프는 안경을 쓰고 악보를 펼쳐놓고 지휘했다.

편곡판 1악장에서는 원곡의 현악 합주 대신에 클라리넷 솔로로 시작했다. 군더더기를 덜어낸 깔끔한 버전이다.

2악장은 오케스트라의 개입을 최소화했다. 쇼팽의 트레이드 마크인 녹턴을 연상시키는 감미로운 악장이다. 장식성이 풍부하면서도 명상적이며 낭만적인 주제가 세 차례 반복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는 현의 트레몰로를 배경으로 열정적인 레치타티보풍의 간주가 삽입됐다.

3악장은 마주르카 리듬이 빛났다. 피아노가 대뜸 제시하는 첫 주제는 침착하고 우아하며 약간 우수에 잠긴 인상이다. 익살스러운 구석도 엿보인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선우예권은 커튼콜에서 뒤짐진 채 인사를 하고 앞 머리카락을 누르는 루틴을 독특한 루틴을 선보이며 관객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마이크 없이 앙코르 곡을 소개했다. “제가 6년 정도 알고 지내던 분이 계셨습니다. 따듯한 에너지가 넘치던 분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주던 분이었는데 최근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좋아하셨던 곡입니다”라며 브람스의 ‘인터메조 2번 A장조(Op.118)’를 연주했다.

류태형 평론가는 “선우예권이 협연한 플레트뇨프 편곡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낯설고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묘미가 있었다”라며 “까다로운 천재 거장 플레트뇨프의 느린 걸음과 특유의 시선과 지휘를 본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영감이 스쳤던 연주회였다”고 평가했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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