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쇼팽 녹턴 6곡 더 젊어졌다...플레트네프의 낯설지만 아름다운 피아노

폴로네즈·환상곡 등 올 쇼팽으로 내한 리사이틀
자신 스타일로 새롭게 매만져 독특한 음색 선사
​​​​​​​‘돌아갈수 없는 러시아’에 대한 아픔 느껴져 울컥

민은기 기자 승인 2023.09.12 11:18 의견 0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쇼팽을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프레데리크 쇼팽의 이름을 불멸로 만든 일등공신은 역시 ‘녹턴’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존 필드가 최초로 고안해냈지만, 복잡 미묘한 사색의 음악으로 점프시킨 것은 순전히 쇼팽 덕이다. ‘쇼팽=녹턴’이라는 공식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만큼 일반적인 인식을 획득했다. 모두 21곡을 남겼다. 이 서정적 소품들은 저녁과 밤, 새벽과 아침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찐매력이 있다.

1957년생, 올해 66세의 피아니스트는 자기 확신이 가득했다. “나 아니면 누가 손댈 수 있겠어”라는 자신감이 넘쳤다. 편곡도 100점이고 작곡도 100점인 실력을 갖춘 미하일 플레트네프는 자기 스타일대로 쇼팽의 녹턴을 줄이고 늘렸다. 바짝 날이 선 가위로 작품을 쓱싹쓱싹 잘라내고는 흡족한 부분을 골라 이어 붙였다. 살짝 틈이 생기면 새로 천을 만들어 덧대기도 했다. 강렬한 음 하나를 캐치하고는, 다른 부분을 과감히 생략하고 압축했다. 그리고는 가슴 속으로 훅 들어온 음 하나를 비약(飛躍)시켰다. 그 나머지는 그에게 군더더기였다.

‘플레트네프 버전’의 녹턴 6곡이 차례대로 연주됐다. 녹턴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곡인 ‘녹턴 2번 내림E장조(Op.9-2)’로 시작해 ‘녹턴 4번 F장조(Op.15-1)’ ‘녹턴 7번 올림c단조(Op.27-1)’ ‘녹턴 14번 올림f단조(Op.48-2)’ ‘녹턴 15번 f단조(Op.55-1)’ ‘녹턴 18번 E장조(Op.62-2)’를 박스에서 하나씩 꺼내 앞에 내놓았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지극히 통속적인 서정정이 꿀 떨어지듯 뚝뚝 떨어졌고(2번), 한층 더 고독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했고(4번), 정점에서 나타난 마주르카풍의 힘찬 악상은 극적인 반전을 제공했다(7번). 그 자체로 깊은 슬픔을 머금은 성악적 노래가 흘렀고(14번), 강한 임팩트의 한숨이 가슴을 때렸고(15번), 아픔 뒤에 찾아오는 어찌할 수 없는 감성의 일렁임이 파도쳤다.(18번)

“세상에! 이렇게도 칠 수 있구나.” 살짝 낯설었지만 ‘더 젊어진 쇼팽의 녹턴’이 흘렀다. 아주 무심하게 건반을 눌렀고 담담한 사운드가 흘러 나왔다. 뾰족한 예리함 대신에 흔들리지 않는 아름다움이 샘솟았다. 물속에서 잉크가 번지듯 공연장 끝까지 소리가 고르게 퍼졌다. 스타인웨이가 아니라 ‘시게루 가와이’ 피아노를 선택한 이유를 알겠다.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쇼팽을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올 쇼팽 프로그램(All Chopin Program)으로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다. 폴로네즈, 환상곡, 뱃노래, 그리고 녹턴을 내세웠다.

방울토마토를 키워본 사람은 안다. 곁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게 내버려두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싹뚝싹뚝 가지를 꺾어줘야 실한 토마토가 열린다. 잎으로 영양분이 쓸데없이 낭비되지 않게 해줘야 한다. 플레트네프가 꼭 그랬다. 머리와 가슴으로 들어온 음 하나만을 붙잡아, 그것을 확장해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도 닮았다.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데서 한 발 더 나아가, 내 눈에 비친 가장 극적인 장면을 더 강조해서 그리는 진경의 경지와 비슷했다.

폴로네즈는 기품과 건강함을 기본으로 장착한 빠르지 않은 3박자의 춤곡이다. 쇼팽은 모두 23곡의 폴로네즈를 썼지만 7곡이 분실돼 지금은 16곡만 전해진다. 플레트네프가 선사한 첫 곡은 ‘폴로네즈 1번 올림c단조(Op.26-1)’다. 거친 느낌으로 시작했지만 곧이어 등장한 선율은 우수어린 분위기와 강한 동경을 동시에 품었다. 폴로네즈 원형을 충분히 드러내 보이며 탄력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환상곡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작곡가의 상상에 따라 자유로운 분위기로 쓴 곡이다. ‘환상곡 f단조(Op.49)’는 쇼팽의 리즈시절을 대표하는 높은 완성도의 걸작이다. 긴 장송곡풍의 서주가 매우 감상적인 멜로디와 뉘앙스 속에서 나타난다. 행진 리듬이 끝나면 흥분한 느낌의 음표가 고개를 들고, 차츰 열기가 고조된다. 모든 음이 멈추자 개성적이고 세련된 깊은 여운이 남았다.

플레트네프는 이어 ‘뱃노래 올림F장조(Op.60)’를 들려줬다. 완벽한 행복감이 넘치는 바르카롤(뱃노래)이다. 뱃노래의 세 박자 움직임은 기존 8분의 6박자에서 8분의 12박자로 늘어나 더욱 잔잔해진 물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 수면 위에 떠있는 작은 배는 연인들의 콩닥콩닥 속마음처럼 살랑살랑 흔들렸다. 피아노의 시인이 건져 올린 사랑의 즐거움과 환희가 눈앞에 펼쳐졌다.

‘환상 폴로네즈 내림A장조(Op.61)’는 연인 조르주 상드와의 결별을 앞둔 시기의 작품이다. 심신의 피로와 절망이 새겨져있다. 흔들리는 작곡가의 심리가 흐르고 멈추기를 반복하는데, 거장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 복잡한 쇼팽의 마음이 잘 드러났다.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쇼팽을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녹턴 2번→4번→7번→14번→15번→18번의 황홀함에 잠시 정신을 잃은 뒤, 프로그램 마지막 곡 ‘폴로네즈 내림A장조(Op.53)’를 선사했다. 흔히 ‘영웅 폴로네즈’라고 불리는 곡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특별하게 대하는 것처럼 폴란드 사람들은 이 곡을 제2의 국가처럼 생각한다. 내면의 뜨거운 감성이 용암처럼 넘실대는 전주와 이윽고 등장하는 당당한 주제 선율은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앙코르는 두 곡을 선물했다. 먼저 글린카의 곡을 발라키레프가 편곡한 ‘The Lark’를, 그리고 모슈코프스키의 ‘에튀드 F장조(Op.72-6)’를 연주했다.

지난해 2월 이후 플레트네프는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러시아가 일으킨 우크라이나 침공이 잘못됐다고 자신의 의지를 확실하게 표명한 후 모스크바로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됐다. 지난 1990년 창설부터 30년 넘도록 함께해온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RNO)와의 인연도 끝나고 말았다.

이날 그의 피아노에는 이런 비극이 오버랩돼 울컥했다. 하지만 슬퍼만 할 수는 없는 법. 스위스 국적을 새로 취득한 그는 라흐마니노프 인터내셔널 오케스트라(RIO)를 새로 만들고 다시 음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그의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는 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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