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 “침묵은 악마...러시아 침공 입 다물 수는 없어”

다음달 체코필과 함께 첫 내한공연
“127년 역사의 남다른 점 보여줄 것”

“자신만의 문화에 갇혀있으면 퇴보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 수용 중요“

민은기 기자 승인 2023.09.20 13:01 | 최종 수정 2023.09.21 07:52 의견 0

다음달에 체코 필하모닉과 첫 내한공연을 여는 세묜 비치코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침묵하는 것은 악마다”라고 말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인류의 실존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대규모 학살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악마일 때가 있어요. 저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말을 소리 내어 말했을 뿐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1952년생)는 ‘행동하는 마에스트로’다. 다음달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 공연(10월 24일 서울 예술의전당)을 여는 그는 20일 서면 인터뷰에서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비난했다.

‘예술과 정치는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라는 규칙에 동의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언급은 정치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를 설명했다.

“길을 걷다가 힘이 없는 약한 사람이 얻어맞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대로 지나칠 것인가요? 아마 최소한 경찰에 신고라도 할 겁니다. 저는 그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요.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인간답게 행동한 것이지요.”

비치코프는 말로만 떠들지 않았다. 실천으로 옮겼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최초의 음악가 중 한명이다.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우크라이나 지지 연설을 한 이후 BBC 하드 토크(HARD Talk) 등 유럽과 미국의 방송에 출연해 전쟁 반대 의견을 공식적으로 피력해왔다. 지난해 3월 프라하 광장에서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우크라이나를 위한 자선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소신 발언과 행동은 가슴 아픈 가족사도 한몫했다. 비치코프는 냉전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당시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오데사의 외가 가족들은 나치에 학살당했다. 아버지는 전쟁 당시 두 차례나 부상했고, 어머니는 나치에 900일 가까이 봉쇄당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지금 침묵한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가치,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의 고귀함에 대한 배신이다”라고 덧붙였다.

체코 필하모닉은 1991년 첫 내한 이후 이번이 여섯 번째 방문이고, 비치코프는 첫 방한이다. 하지만 낯설지 않다. ‘간접 경험’이 많다. 지난 3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함께 유럽투어를 했다. 티에리 에스카이쉬의 피아노 콘체르트 신작을 세계 초연으로 선보였다.

“한국 방문은 처음입니다. 최근 저와 체코필은 조성진과 너무나 감명 깊은 연주를 함께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음악적 파트너이자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저를 포함한 단원들에게 조성진과 함께한 시간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번 내한에서는 서양에서 현지화 된 한국음식이 아닌 진짜 한국음식을 먹어볼 수 있어 기대됩니다.”

다음달에 체코 필하모닉과 첫 내한공연을 여는 세묜 비치코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침묵하는 것은 악마다”라고 말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다음달에 체코 필하모닉과 첫 내한공연을 여는 세묜 비치코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침묵하는 것은 악마다”라고 말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2018년도부터 체코필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그는 단원들에게 ‘대디(Daddy)’로 불린다. 2017년 오랜 지휘자였던 이르지 벨로홀라베크가 별세하고 슬픔에 빠져 있던 체코 필은 비치코프가 이끈 공연에 매우 감동했다. 단원들이 우르르 무대 뒤로 찾아와 “아우어 대디(Our Daddy)가 돼주세요”라고 요청했다. 이후 공식적으로 진행된 단원 투표에서 ‘100% 찬성표’를 받으며 체코필에 합류한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자신만의 색깔, 정체성, 음색을 지닌 유서 깊은 악단(1896년 창단)입니다. ‘체코필이 남들보다 잘 한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만 이러한 점이 ‘체코필의 남 다른 점’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12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체코필의 단원들은 이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꼭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그동안 체코필은 악단과 관계가 밀접한 구스타브 말러, 안토닌 드보르자크,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작품을 내한 때마다 소개하면서도 다른 작곡가의 곡을 같이 연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올 드보르자크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 ‘카니발 서곡-피아노 협주곡-교향곡 7번’으로 이어진다. 가장 관심을 끄는 곡은 피아노 협주곡 g단조. ‘일본의 조성진’으로 통하는 후지타 마오가 협연한다.

“드보르자크 피아노 협주곡이 자주 무대에 오르지 않는 것은 한국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정말 이상할 정도로 연주되지 않고 있어요. 완벽한 걸작이기에 이런 현상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면에서 베토벤과 브람스를 합친 듯 하면서도 여전히 드보르자크의 음악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물론 피아니스트에게는 어려운 작품인 것은 확실합니다.”

한국 아티스트들이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등 K클래식이 주목받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요즘은 한국인 음악가가 없는 오케스트라를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자기가 자라온 것과는 다른 문화를 뼛속 깊이 받아들여야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라며 “누구나 피아노,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지만, 어떤 문화와 민족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라며 한국 음악가들의 학습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비치코프는 1975년 23세 때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 매네스 음대를 졸업했고, 바로 동 대학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1985년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데뷔했고, 여전히 베를린 필하모닉과도 꾸준한 연주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며, 매년 BBC 프롬스 무대에 초대받아 오르는 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음달에 체코 필하모닉과 첫 내한공연을 여는 세묜 비치코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침묵하는 것은 악마다”라고 말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지휘의 매력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과 똑같다. 어떻게 각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내 콘셉트의 타당성을 설득하고, 그들 모두가 한꺼번에 나를 따르게 할 것인지, 그러면서도 동시에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연주하거나 노래하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게 지휘다”라고 말했다.

체코필이 앞으로 추구해야할 음악적 방향에 대해서도 구체적 플랜을 밝혔다. 누구나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에는 자기 자신의 문화와 배경을 떠나 해당 작곡가의 문화적 특색을 처음부터 파고들어 소화해 내야한다. 결국 ‘열린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훌륭한 배우들을 만납니다. 앤서니 홉킨스, 다니엘 데 루이스, 메릴 스트립 등등. 종종 같은 배우가 각 영화마다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른 사람처럼 등장하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들은 매 영화에서 깜빡 속을 정도로 새로운 인물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량이 그들을 훌륭한 배우로 만들지요. 음악가들도 마찬가지며, 이들도 똑같은 만큼의 역량이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배우들은 대사와 몸의 언어로 이를 전달하고, 음악가들은 음악을 통해 전달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오케스트라가 한 작품을 잘 연주해내는 것,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급변하는 모든 것이 열려있는 세상에서는 자신만의 문화에만 갇혀있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알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unki@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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