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사제인연을 맺어온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지휘자 장한나가 24일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올해 75세의 스승 미샤 마이스키가 첼로를 들고 무대로 나왔다.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1903~1976)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를 모두 사사한 유일한 첼리스트다. 옷이 눈에 띄었다. 완벽한 한복은 아니지만, 연주하기 편하게 디자인된 한복 스타일의 흰색 윗옷을 입었다. 1995년에 발매된 음반 ‘베스트 오브 마이스키’에 한복 입은 모습을 앨범 재킷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도 ‘아이 러브 한복’을 다시 보여줘 반가웠다.
그 뒤를 따라 41세의 제자 장한나가 지휘봉을 들고 나왔다. 1992년 열 살 때, 장한나는 내한공연을 온 마이스키와 인연을 맺은 뒤 30년 넘게 사제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당시 공연이 끝난 후 장한나의 가족이 마이스키 측에 연주 영상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건넸는데, 2주 후 쯤 마스터 클래스에 초대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와 스승과 제자가 됐다.
마이스키는 장하나를 자신의 유일한 제자로 꼽을 만큼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2007년 25세 때 돌연 지휘자로 전향했다. 장하나의 첼로 연주를 가까이서 지켜본 스승의 입장에서는 요즘도 제자를 보면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고 밝혔다. “제자가 첼리스트로서의 경력을 희생한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제자의 결정을 충분히 존중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첼리스트 장한나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30년 사제인연을 맺어온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지휘자 장한나가 24일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한뒤 서로에게 박수를 쳐주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두 사람은 2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첼리스트와 지휘자로 무대에 섰다. 2030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된 디토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다. 사제가 한국에서 함께 공연한 것은 2012년 8월 이후 11년 만이다. 물론 해외에서는 여러 차례 협연했고, 가장 최근 함께 공연한 것은 5월이다. 장한나는 “그동안 지휘자로 선생님과 해외에서 여러 차례 연주해 선생님의 해석과 자유로운 연주가 몸에 뱄다”라며 “혹 11년 전 국내 연주회에 오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새로운 콜라보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기대감을 밝혔다,
마이스키와 장한나는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b단조(Op.104)’로 사제케미를 뽐냈다. 장한나에게도 의미 있는 곡이다.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콩쿠르에서 이 곡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드보르자크는 51세 때인 1892년에 뉴욕 국립 음악원의 원장으로 초청받아 약 2년 6개월 동안 미국에 머물렀다.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사중주 12번 ‘아메리카’와 함께 바로 이 첼로 협주곡이 이 시기에 작곡됐다.
교향곡에 필적하는 매머드 사이즈의 관현악과 러닝타임 40분이 넘는 장대한 길이를 가지고 있다. 낭만시대에 유행했던 ‘심포닉 콘체르토’의 트렌드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음향적으로 압도하거나 극적으로 과장하기보다는, 노래를 부르는 듯한 감성적인 멜로로디로 인간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유럽의 낭만음악을 기반으로 체코 음악, 흑인영가, 인디언 음악이 예술적으로 함께 어우러졌다. 진정한 국제적인 작품인 셈이다. 요하네스 브람스도 이 곡에 찬사를 보냈다. “이러한 첼로 협주곡이 인간의 손으로 작곡될 수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내가 썼을 텐데”라고 말했다.
30년 사제인연을 맺어온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지휘자 장한나가 24일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긴 관현악의 서주로 1악장이 시작됐다. 클라리넷이 1주제를 이끌고, 혼이 2주제를 리드하며 흐르는 동안 마이스키는 숨을 고르며 합주의 시간을 준비했다. 오케스트라가 내뿜는 음을 하나하나 받아들여 자기 몸에 쌓았다. 마이스키의 첼로는 어떤 때는 강력한 영웅의 모습으로, 또 어떤 때는 부드럽게 노래하는 숙녀의 모습을 드러내며 다양한 표정을 보여줬다. 중간 첼로와 플루트의 밀당이 아름답다.
2악장은 첼로의 독주에 집중됐다. 뉴욕에서 두해를 보낸 드로브자크의 마음에 가득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 즉 향수가 강하게 느껴졌다. “아 며칠만 더 있으면 추석이지.” 관객들에게 곧 한가위가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시그널 같았다. 중간 첼로와 호른의 하모니가 감미롭다. 후반부에 관현이 잦아들면서 독주가 카텐차풍으로 진행된다.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24일 앙코르를 연주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3악장 피날레는 ‘빠르고 적절하게-느리게-빠르고 활력 있게’다. 민속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리듬과 깊은 내면의 감정이 깃든 선율이 어우러져있다. 중간 중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동안 마이스키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호흡을 골랐다. 장한나는 섬세하게 오케스트라를 컨트롤하며, 스승의 첼로 소리가 콘서트장을 지배하도록 도왔다. 마지막에 삶을 관조하는 듯한 선율로 음악을 정리한 뒤, 마치 사회자가 등장해 “이제 그만 연극을 마칩니다”라는 선언을 하듯, 화려하게 마무리됐다.
스승과 제자는 손을 맞잡고 관객의 환호에 화답했다. 포옹을 하며 30년 넘게 이어온 인연에 서로 존경의 마음을 표시했다. 앙코르는 바흐의 ‘첼로 모음곡 3번 C장조’를 들려줬다. 그토록 주의를 줬지만 한 관객의 벨소리 때문에 음악이 상처를 입었다.
지휘자 장한나가 24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6번을 연주한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장한나는 2부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5번 c단조(Op.67)를 연주했다. 베토벤의 삶의 과정이 담긴 곡이다. 베토벤은 유명한 ‘운명의 동기’ 부분을 스케치하고 각 악장의 주요선율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시작했다. 1799년에 제자로 만난 요제피네 브룬스비크였다. 베토벤은 5년 후 과부가 된 그와 곧 연인이 됐다. 마음 속이 온통 핑크빛인데 무게감 있는 진지한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귀족이 된 요제피네는 결국 베토벤과의 결혼을 거부했고 1807년에 작별을 고한다. 오랫동안 서랍에 방치됐던 악보를 꺼냈다. 이렇게 베토벤의 머리와 마음 속에 10년 넘게 들어있던 다섯 번째 교향곡은 사랑의 실패에 대한 울분과 이를 극복하려는 삶에 대한 의지가 녹아있다.
30년 사제인연을 맺어온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지휘자 장한나가 24일 공연을 마친뒤 사인회를 열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1악장은 운명에 사로잡힌 비극적인 모습이다. 에너지 넘치는 기운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른다. 2악장에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꿈꾼다. 음악아 자체적으로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 했다. 3악장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또 한번의 관객 벨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지만, 장하나는 음악을 몰아갔다. 4악장에서는 피콜로, 콘트라바순, 3대의 트럼본이 추가된 과거에 볼수 없었떤 거대한 편성으로 힘찬 팡파르를 울리며 승리를 선언한다. 장한나는 ‘운명 교향곡’보다 오히려 ‘승리 교향곡’에 더 잘 어울리는 멋진 피날레를 보여줬다.
장한나는 앙코르를 두곡 선사했다. 마누엘 델 파야의 발레음악 ‘사랑의 마술사’에 나오는 ‘불의 춤’과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연주했다.
장한나는 24일 공연에서는 베토벤 운명 교향곡 대신에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6번 ‘신세계로부터’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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