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2부에서는 d마이너(라단조)로 이루어진 3곡을 연주합니다. 조성은 작품의 성격을 결정 짓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d마이너는 ‘브론즈(동) 색깔’을 닮았습니다. 바흐·멘델스존·베토벤의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안드라스 쉬프의 피아노 리사이틀은 즉흥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곡을 연주할지 미리 알려주지 않고 공연 당일의 전체적인 컨디션을 고려해 최적의 곡을 초이스한다. 콘서트장과 피아노의 상태, 자신의 기분, 관객의 호응도 등을 두루 살펴 연주할 곡을 그 자리에서 정한다. ‘저를 믿고 따라 오세요’라는 맡김차림 프로그램을 내놓는다. 또한 친절하게 직접 곡을 설명해주는 렉처 콘서트 형식을 취한다.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독주회에서도 자신의 이런 루틴을 그대로 적용했다.
그는 지난해 내한공연과 똑같이 오스트리아의 명품 피아노 뵈젠도르퍼를 사용했고, 평소처럼 자신의 전속 조율사를 대동했다. 통역은 피아니스트 문지영이 맡았다. 문지영은 작년 쉬프 내한 당시 마스터클래스를 받은 인연이 있다.
2부 프로그램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를 보여줬다. 바흐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멘델스존 ‘엄격 변주곡’, 베토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를 잇따라 연주했는데 모두 d단조 조성으로 된 곡들이다. 즉흥의 아름다움을 앞세우고 있지만 처음부터 마음먹고 이런 정교한 상차림도 준비했다.
쉬프는 “바흐의 곡은 대성당 같은 건축물과 같다”며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를 들려줬다. 그 어느 연주자보다 구조적으로 촘촘하게 음악을 이끌어갔다. 그의 이름 앞에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 ‘피아노의 교과서’라는 별명이 늘 붙어 다니는 이유를 입증했다.
이어 터치한 곡은 멘델스존의 ‘엄격 변주곡’. 그는 “멘델스존은 과소평가됐다. 바그너 때문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깎아내렸다. 나도 유대인이라 바그너가 싫다. 그는 천재지만 형편없는 사람이다”라고 소신 발언을 했다.
그리고 베토벤의 ‘템페스트’를 들려줬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 곡을 연주하게 돼 죄송하다. 베토벤의 유일한 d마이너 소나타라서 고르게 됐다. 하지만 연주는 작년과 다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베토벤은 이 곡을 이해하려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어보라고 했지만, 정작 어디를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1악장에서는 일부러 화음을 겹치게 하려는 듯 길게 페달링을 구사했다. 대부분의 연주자가 격정적으로 빠르게 연주하는 3악장은 상대적으로 슬로우 패턴을 고수했다. 그는 “3악장은 ‘조금 빠르게’라고 적혀 있다. 빠르게 치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연주를 마치고 난 후에는 오랫동안 동작 멈춤 자세를 유지했다.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피아노에 두 차례나 고개를 숙여 리스펙트의 마음을 보여줬다.
1부 역시 쉬프의 특징이 고스란히 표현됐다. 느릿느릿 걸음으로 무대로 나온 그는 첫 곡으로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집 1권’ 중 1번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했다. 전주곡에서는 페달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담백한 맛을 선사했고 푸가에서는 적절하게 페달링을 구사해 마법 수준의 터치를 선사했다.
이어 바흐가 19세에 작곡한 ‘카프리치오’로 이어졌다. 스웨덴 궁정에 취직해 떠나는 형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가득한 곡이다. 바흐 스페셜리스트답게 1부와 2부에서 모두 3곡의 바흐를 연주했다.
“오늘 브람스를 연주하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이 피아노와 이 홀에선 모차르트를 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쉬프는 즉흥성을 좋아하는 취향을 드러내며 모차르트 소나타 17번을 연주했다. 그는 “하이든이 말하는 작곡가라면 모차르트는 노래하는 작곡가다”라며 피아노 건반으로 노래했다.
이어 하이든의 ‘안단테와 변주곡’을 선사했다. “비극적이다. 장송행진곡이 생각난다”고 했지만 오히려 더 로맨틱하게 다가왔다.
1부의 마지막 곡은 슈만의 ‘다비드 동맹 무곡’. 글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슈만은 라이프치히에서 ‘음악신보’를 창간하고, 이 저널을 통해 가상의 예술가 모임인 ‘다비드 동맹’을 만들었다. 당시 유행하던 얄팍한 상업주의를 배격하고 진정한 낭만주의 음악을 추구하는 동맹이었다. 슈만은 쇼팽, 파가니니, 클라라를 멤버로 상정했고, 자신이 평론에서 사용했던 2개의 필명인 플로레스탄과 오비제비우스도 동맹의 일원으로 참가시켰다.
‘다비드 동맹 무곡’은 슈만의 이중적 자아를 나타내는 격정적·열정적인 플로레스탄과 낭만적·서정적인 오이제비우스의 대화로 이루어진 18개의 성격 소품으로 구성돼 있다. 쉬프의 손가락을 타고 거칠고 드라마틱한 선율과 부드럽고 시적인 선율이 서로 교차하며 흘렀다.
허명현 평론가는 “저만큼 여린 소리가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컨트롤 되는 게 놀라웠다. 슈만의 곡들은 마법의 샘물 같아서 어설프게 손을 대면 댈수록 흙탕물이 된다. 작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고, 무슨 매력인지도 알기 어려워진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쉬프의 연주는 투명했다. 음악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훤하게 보이고 그 깊이가 어디까지인가가 보였다. 슈만의 이런 작품들을 잘 살펴내는 연주자가 진짜 맛집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쉬프 오마카세가 그랬다”고 평가했다.
앙코르는 모두 4곡을 선물했다. 바흐 ‘이탈리안 협주곡’ 1악장, 모차르트 ‘소나타 16번’ 1악장, 브람스 ‘3개의 인터메조(Op.117)’ 1번, 슈만 ‘어린이를 위한 앨범’ 중 10번 즐거운 농부를 연주했다. 렉처 콘서트 형식을 따른 영향이 컸지만 이날도 황홀한 3시간 30분의 러닝타임을 기록했다. 멈추지 않는 환호에 다섯 번째 앙코르곡을 연주하는 척 하면서 피아노 뚜껑을 닫는 재치를 선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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