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보스트리지 “렉처로 한번, 노래로 또 한번 ‘전쟁의 아픔’ 담아내겠다”

내달 ‘힉엣눙크’서 강연 이어 브리튼 ‘일뤼미나시옹’ 연주
“제 목소리 예전보다 어둡고 커져...이번에도 새로운 해석”

박정옥 기자 승인 2023.10.24 17:22 | 최종 수정 2023.11.08 16:23 의견 0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다음달 ‘힉엣눙크’에서 렉처뿐만 아니라 메인무대서 벤저민 브리튼의 ‘일뤼미나시옹’을 연주한다. ⓒ워너클래식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노래뿐만 아니라 렉처도 진행하게 돼 더 기대됩니다. 페스티벌에서 제가 부를 작품을 쓴 벤저민 브리튼과 전쟁의 연관성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브리튼은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보면서 다양한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귀띔해줘도 될까요?”

영국의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1964년생)가 올해 여섯 번째를 맞이하는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을 앞두고 강연 내용을 살짝 공개했다. 라틴어 ‘힉 엣 눙크(Hic et Nunc)’는 얼핏 보면 발음이 어렵지만 영어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 즉 ‘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뜻이다.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은 비정형성(非定型性)을 특징으로 하는 차별화된 클래식 음악 축제다. 형태를 정의하지 않고 경계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하는데 두려움이 없다. 이번에 준비한 렉처도 그 연장선상에서 올해 처음 시도하는 프로그램이다.

24일 클래식비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보스트리지는 벤저민 브리튼(1913~1976)은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라고 존경의 마음을 보냈다. 20세기 전체를 조망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음악가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브리튼은 경력 초기부터 여러 작품에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담았다. 그의 곡을 듣고 있으면 최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분쟁·다툼·갈등을 해결할 솔루션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폭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브리튼은 1·2차 세계대전 이후 걸작으로 꼽히는 ‘전쟁 레퀴엠’를 발표해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보스트리지는 오는 11월 9일 개막 첫날 ‘음악, 인문학으로의 초대’(거암아트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펼치고, 14일(화)에는 축제 호스트인 세종솔로이스츠와 메인 공연(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꾸민다. 그가 부를 노래는 브리튼의 ‘일뤼미나시옹’(‘채색된 판화’라는 뜻).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1854~1891)의 동명 시집에서 발췌한 9개의 산문시에 곡을 붙였다.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다음달 ‘힉엣눙크’에서 렉처뿐만 아니라 메인무대서 벤저민 브리튼의 ‘일뤼미나시옹’을 연주한다. ⓒBen Ealovega


가곡 역사상 시인과 음악가의 매혹적 만남을 꼽으면 늘 거론되는 작품이며 하이 보이스와 현악을 위한 편성으로 작곡됐기 때문에 테너뿐 아니라 소프라노의 무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2005년 사이먼 래틀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일뤼미나시옹’ 앨범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브리튼은 성악 작곡에 능했고 언어에서 영감을 받았다. 독특한 방식으로 랭보를 조명하고 있다”며 “다른 한편으로는 뜻을 몰라도 소리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즉각적으로 이해되고 마음을 끄는 소리의 세계를 창조했다. 랭보의 시도 그렇지만 브리튼의 작품에서 언어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시어의 의미만큼이나 중요하다. 가사를 사전에 읽고 오면 그 소리와 뜻을 결합해서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라며 감상팁을 줬다. 그러면서 자신의 해석도 시간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또한 환각적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관능적이고, 재미있으면서, 어둡기도 하죠. 인간사를 거울처럼 온전히 담고 있어요. 규모가 큰 음악이기는 하지만 슈베르트나 슈만 못지않게 세세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저는 오랜 시간 여러 단체들과 이 곡을 연주했는데 해석은 매 연주마다 다릅니다. 어쩌면 제 입장에서는 변화를 알아차리기가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예전보다 목소리가 더 어둡고 커졌는데 그런 점이 음악에도 변화를 줄 것 같습니다.”

보스트리지는 독특한 커리어로 유명하다. 음악가가 되기 이전에 역사학자로 옥스퍼드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학자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이름 앞에 늘 ‘노래하는 인문학자’ ‘역사학 박사 테너’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제가 두 가지 경력을 다 쫓던 시기에 음악계에서는 노래 잘하는 박사 정도로 알려지고, 학계에서는 음악으로 외도하는 박사 정도로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어요. 어딜 가든 아웃사이더였지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프로페셔널 음악가로 시작하던 시점에는 이런 표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데에 도움이 된 건 사실입니다.”

풍부한 인문학 경험은 글을 쓰는데 유용하다고 했다. 그는 “다른 성악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글을 쓸 때 비교적 자유롭게 느낀다는 점이다. 학자적 관점에서 집필할 때보다 예술가로서의 관점을 가지고 있을 때 폭넓게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라며 “학자였을 때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고 분석했던 습관과 훈련 역시 지금 음악가로서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물아홉 살에 데뷔했다. 한참 늦은 나이였다. 1993년 전설적인 독일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1925~2012)의 권유로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첫선을 보였다. 199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 강단에 서면서 성악가 활동을 병행하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물랑루즈’ ‘로미오와 줄리엣’ ‘댄싱 히어로’ 등의 각본가이자 연출가인 바즈 루어만 예술감독의 오페라 ‘한여름밤의 꿈’에 캐스팅되면서 성악가로 전업했다.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다음달 ‘힉엣눙크’에서 렉처뿐만 아니라 메인무대서 벤저민 브리튼의 ‘일뤼미나시옹’을 연주한다. ⓒKalpesh Lathigra


“저는 음악에 늦게 입문했죠. 늦깎이 입문해서 좋았던 점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아주 어린 시절에 음악을 한 친구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어느 하나가 좋고 나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각기 다른 시간에 각기 다른 것들을 발견해내니까요. 하지만 지금 시대의 기악 연주자들은 저와 조금 다른 생각일수도 있겠네요. 요즘 기악 연주는 네 살 정도면 이미 시작을 하잖아요. 자기답게 하시되 배움을 소홀히 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성악가라면 선생님을 찾아서 꼭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음악가로서의 인생은 단순히 내 목소리와 씨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꾸준한 일관성과 나에 대한 확신과의 싸움입니다.”

보스트리지는 한국과 인연도 깊다. 지난 2018년 서울시향의 상주음악가(Artist in Residence) 제도인 ‘올해의 음악가’에 선정되는 등 그동안 여러 차례 방문해 공연했다. K클래식 파워의 활약에 대해서도 입을 뗐다.

그는 “한국 음악가들은 오케스트라 단원이든, 앙상블 멤버든, 독주자이든 무대가 원하는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 그리고 음악적 능력은 전 세계의 음악 무대에 막대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세계 어디에도 한국처럼 음악에 목말라하고 열광하는 젊은 층으로 가득한 청중은 없다. 작년에 롯데콘서트홀에서 줄리어스 드레이크와 함께 ‘겨울 나그네’를 공연했다. 그날의 관객들이 슈베르트의 작품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고 전했다.

이와 아울러 “몇 년 전에는 통영의 훌륭한 홀에서 공연을 했는데, 연주홀은 물론이고 반짝이는 바다 위의 무수한 푸른 섬까지 아름다웠다.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다. 더 많은 곳을 찾아가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은 다음달 9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리사이틀홀, JCC아트센터, 거암아트홀, 코스모스아트홀 등에서 열린다.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베이비 콘서트’(15일) ‘NFT 살롱’(15일) ‘장한경 바이올린 리사이틀’(16일) ‘스티븐 뱅크스 색소폰 리사이틀’(19일) 등을 진행한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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