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제가 음악을 만들었지만 정작 촬영지는 처음 왔습니다. ‘첫눈 오는 날 여기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던 서연(배수지 분)과 승민(이제훈 분)은 끝내 못 만났지만, 저는 이렇게 음악으로 팬들을 만나게 돼 기쁩니다.”
작곡가 이지수가 지난 17일 ‘송영민의 월간 고택음악회-K영화음악개론’에 출연해 영화와 드라마 음악의 작곡과정을 들려줬다. 자신이 만든 음악과 그것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곁들인 렉처 콘서트였다. 그는 ‘건축학개론’뿐만 아니라 영화 ‘올드보이’ ‘실미도’, 그리고 드라마 ‘겨울연가’ ‘봄의 왈츠’ 등의 음악을 작곡해 OST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음악회 진행과 연주를 맡은 송영민은 요즘 가장 핫한 예술감독이자 피아니스트다. 입담이 좋아 KBS FM ‘생생클래식’ 코너를 진행했고 ‘최인아 책방콘서트’의 총감독을 맡고 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이현웅·첼리스트 장우리와 함께 피아노 삼중주로 호흡을 맞춰 이지수 작품을 연주했다.
음악회 장소가 특별하다.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5가길 11-4(누하동 103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서촌의 아담한 한옥이다. ‘건축학개론’의 대표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영화에서는 대학 새내기였던 서연과 승민이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키우던 집으로 나온다. 첫사랑 가득한 핫플레이스다.
클래식공연 기획사 리한컬쳐는 올해 초 한옥을 인수해 보수를 마치고 지난 5월 복합문화공간이자 한옥스테이로 오픈하며 ‘클래식고택’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한옥이 낯선 MZ세대나 외국인을 위한 체험숙박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도심 한복판 아름다운 한옥 고택에서 클래식 음악을 즐기며 힐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음악회를 만들었다. 리한컬쳐 최유리 대표는 앞으로 꾸준히 음악회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고민 끝에 영화 속에 등장한 타일을 걷어내지 않고 자갈을 덮었습니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려고 했어요. 영화 촬영지라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이 한옥은 한국의 전통유산이기에 모든 문짝, 문고리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오랜 전통과 현대적 편리함이 공존하도록 애를 썼죠. 앞으로 클래식고택은 쪽마루에 옹기종기 앉아 할머니 이야기를 듣던 감성적 기획과 국악·클래식음악이 공존하는 새로운 공연을 릴레이 형식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올해 론칭한 ‘송영민의 월간 고택음악회’는 이날이 세 번째 무대로 ‘이지수의 건축학개론’이라는 서브타이틀로 열렸다. 오프닝은 송영민이 피아노 솔로로 ‘Purple Solitude’를 연주했다. 모두 12곡이 들어있는 이지수의 앨범 ‘Dream of...You’의 첫 번째 트랙이다. 이지수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음악 스타일의 감성을 담고 싶었다”고 밝혔다. 송영민이 건반을 누를 때마다 가을에 어울리는 ‘보랏빛 고독’이 흘러 나왔다.
두 번째 곡은 2002년 초 배용준, 최지우, 박용하, 박솔미 등이 출연해 빅히트한 KBS2 TV 드라마 ‘겨울연가’를 수놓았던 ‘처음’을 피아노 삼중주로 들려줬다. 이지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정말 우연하게 기회를 잡았다고 말했다.
“2001년 대학 2학년 때였어요. 친구 세 명이 알바를 갔죠. 저는 배용준(이민형 역)의 손 대역으로 출연하기로 했어요. 오전 9시에 도착했는데 오후 6시가 넘도록 찍지를 않는 거예요. 너무 늦어지는 이유를 물었더니, ‘아직 이 장면에 쓰일 곡이 안 나와 촬영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 써 놓은 곡이 있는데 그냥 그걸 연주할 테니 빨리 촬영하면 안되겠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촬영을 시작했는데 ‘어 괜찮은데’ 하면서 OK를 받았어요. 그래서 졸지에 드라마에 삽입하게 됐죠.”
원래 피아노 치는 손만 나오기로 했는데, 이 덕분에 배용준의 뒷모습 역할도 맡는 신분상승을 이뤘다. 윤석호 감독의 눈에 든 덕에 계속해서 계절 시리즈인 ‘여름향기’ ‘봄의 왈츠’에 음악으로 참여했다. 송영민 트리오는 ‘봄의 왈츠’에 나온 ‘One Love’를 연주했다. 5~7개월 정도 앞당겨 봄을 선물했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2012년에 개봉됐다. 트리오는 OST에 수록된 ‘오래된 집’ ‘체념’ ‘기다림’ 세 곡을 잇따라 선사했다. 감성적 선율이 흐르는 동안 두 주인공의 설렘과 아픔이 교차됐다. 이지수는 쪽마루 문 뒤에 서서 음악을 들었다. 그는 “음악이 나오면 항상 작곡했을 당시의 모습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시나리오가 넘어오면 상상의 나래를 펴고 멜로디를 구상합니다. 하지만 화면을 봐야만 곡이 써집니다.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올 때까지 무한 반복해 영상을 봅니다. 그래야만 이 장면을 살려줄 수 있는 음악, 이 장면에 딱 들어맞는 음악을 만들 수 있습니다.”
‘Sentimental Waltz for Arirang’을 연주한 뒤 영화 ‘실미도’에 나왔던 ‘684부대’를 연주했다. 역동적이다. 다이내믹하다. 이지수는 “워낙 곡이 활기차 스포츠센터서 자주 들었을 것이다”라고 말해 웃음을 안겨줬다. 그리고는 2003년 영화 ‘올드보이’에 수록된 ‘Cries and Whisper’을 들려줬다.
“대학 3학년 때 알바로 편곡 일을 많이 했어요. 우연히 조영욱 음악감독이 제 곡을 듣고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해서 참여한 게 ‘올드보이’ OST 중 유지태 씨의 테마곡이었죠. 솔직히 이렇게 잘 될 줄 몰랐어요. 첫 영화 음악에서 홈런을 날린 셈이죠. 칸 영화제 대상을 받을 때 시상식장서도 흘러나와 개인적으로 너무 큰 영광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송영민도 이지수와 닮은 구석이 있다. 손 대역 피아니스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2014년 방송된 jtbc 드라마 ‘밀회’에서 유아인의 손 대역 및 라이브 연주를 맡았고, 또한 2018년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박정민과 한지민의 오리지널 피아니스트와 OST 연주를 담당했다.
“2000년 중학교 때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어요. 어리 나이였죠. 극심한 향수에 시달렸어요. 그 당시 어머니께서 ‘한국 음악을 들어보라’며 CD 몇 개를 보내줬어요. 그때 ‘겨울연가’를 처음 들었는데 외로움이 이기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언젠가 나도 음악가가 되어 이 작곡가를 만날 날이 있겠지’라고 생각했어요. 4년 전에 처음 연락을 했고, 오늘 연주한 곡들을 모두 피아노 트리오로 편곡해 줬어요. 큰 영광이죠.”
2019년 이영애가 주역을 맡은 ‘나를 찾아줘’라는 작품이 있다. 6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스릴러 영화다. 송영민 트리오는 거기에 수록된 ‘Dream...illusion’을 들려줬다. 이지수는 “영화음악을 만들려면 극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영상을 많이 봐야 하고, 다양한 곡도 많이 들어야 한다. 미디(MIDI)도 잘 다뤄야 한다”고 영화 음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트리오를 이뤄 함께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 이현웅은 “말 안하는 조건으로 무대에 섰는데 말을 시켜 난감하다. 너무 귀한 시간이다. 행복하다. 잘 간직하겠다”고 말했고, 첼리스트 장우리는 “와 주셔셔 감사하다”고 담백하게 인사했다.
피날레 곡은 ‘Arirang Rhapsody’. ‘진도아리랑’ ‘밀양 아리랑’ 등을 모티브로 대규모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만든 곡이다. 이지수는 “70명이 연주해야 하는 것을 단 세 사람이 연주하는 곡으로 편곡해 너무 미안한다. 연주자들이 너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멤버는 3명이었지만 음향은 70명의 열기를 능가했다. 다소 쌀쌀한 밤공기 속에서도 자리를 지킨 관객들의 호응은 1000점이었다.
한편 ‘송영민의 월간 고택음악회-K영화음악개론’은 오는 11월2일(목)에 네 번째 공연이 열린다. ‘우리 소리, 그리고 한국영화’라는 부제목으로 국악신동에서 소리꾼으로 성장한 신동재와 영역을 뛰어 넘는 인플루언스로 활약하고 있는 해금연주자 천지윤이 꾸민다. 고택음악회는 1인 6만원이며 30석 한정 공연이다. 티켓에는 보자기 도시락과 음료가 포함돼 있다.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