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광철 “전기도 없던 시골길서 흥얼흥얼...무반주 ‘고향의 봄’은 나를 되찾게 해줘”

세계적 베이스 30년 만에 첫 한국 가곡집 발매
20주년 풍월당과 우리가곡 부활 프로젝트 진행

200명 후원제작으로 신작 2곡 등 총 18곡 수록
​​​​​​​“소리·발성보다 시를 낭송하듯 자연스럽게 노래”

민은기 기자 승인 2023.11.06 00:08 | 최종 수정 2023.11.08 08:35 의견 0
베이스 연광철과 피아니스트 신미정이 ‘고향의 봄’ 음반에 사인을 하고 있다. ⓒ풍월당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 그대 그대 있음에 그대 있음에 / 내맘에 자라거늘”

월드 클래스 성악가 연광철이 노래한 ‘그대 있음에’(김남조 시·김순애 곡)가 흘러 나왔다. 지금이야 유튜브에 그가 노래하는 모습이 여럿이지만, 여러 해 동안 ‘유일한 한국 가곡 동영상’으로 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곡이 바로 ‘그대 있음에’다.

“오, 그리움이여 / 그리움이여 그리움이여 /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베이스의 묵직한 저음이 아름답다. ‘연광철 한국 가곡=그대 있음에’라는 공식이 헛말이 아니었다. 천천히 읊조리듯 노래하는데 애절함과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성량을 자랑’하거나 ‘열정과 감정을 분출’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다. 듣는 사람이 각자 자신의 지금 심정을 덧칠해 들으면 되는 노래다. 실내 조명을 살짝 어둡게 조절한 덕에 모두들 두 눈을 감고 감상했다.

베이스 연광철, 피아니스트 신미정, 풍월당 박종호 대표가 ‘고향의 봄’ 음반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풍월당 제공


3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자리한 클래식 음반 매장 ‘풍월당’. 연광철의 첫 한국 가곡 음반 ‘고향의 봄’ 발매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앨범을 제작한 풍월당의 박종호 대표는 수록곡을 먼저 들어보자고 제안했고, 첫 곡으로 ‘그대 있음에’를 틀어준 것.

‘한 곡 더’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박 대표는 ‘내 마음’(김동명 시·김동진 곡)과 ‘고향의 봄’(이원수 시·홍난파 곡)을 잇따라 플레이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앨범에는 모두 18곡을 담았다. 나머지 곡들은 모두 피아노 반주로 노래했는데 마지막 트랙인 ‘고향의 봄’은 무반주로 녹음했다. 오직 목소리만으로 승부했다. 성악적인 기교를 모두 빼고 최대한 날 것 그대로 노래했다. 연광철의 아이디어다. 신선하고 청량했다.

그는 “열세 살 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충주 산골에서 자랐다.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며 불렀던 노래를 모았다”며 “그 당시의 자연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시냇물이며 버드나무 등이 또렷하다. 녹음을 하면서 저의 모습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곡가가 반주에 대해 지시해놓은 게 없다. 그래서 원래 선율 그대로 흥얼 흥얼 불러보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한국어는 노래를 부르기에 좋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 작곡하는 분들이 음성학적으로 더 많이 공부하면 충분히 예술적인 가곡들이 나올 것 같다. 앞으로 무한한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라고 한국 가곡이 세계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베이스 연광철이 ‘고향의 봄’ 음반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풍월당 제공


수록곡은 모두 연광철이 선곡했다. “현제명(‘그 집 앞’)이나 김성태(‘산유화’) 작곡가의 곡처럼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곡 위주로 골랐다”라며 “모두 기본적인 곡으로 제 또래와 저의 부모님 세대들이 알 만한 곡들로 추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충주공고와 청주대 음대를 졸업한 후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예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부친이 소를 팔아 유학 자금을 댔기 때문에 당시 다른 유럽 나라보다 물가가 쌌던 불가리아를 선택한 것. 이후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를 거쳐 1993년 오페랄리아 국제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해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 전속가수로 활동했고, 1996년부터 ‘바그너의 성지’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단골로 출연했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편견을 깨뜨리고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하지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무대다”라는 결론에 사직한 뒤 활발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8년엔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으로부터 독일어권 성악가 최고 영예인 ‘카머젱거(궁정가수)’ 호칭을 받았다.

연광철은 “30년 동안 외국에서 활동하며 그들의 작품과 문화를 잘 이해하고 해석해 그들의 정서에 맞는 감동적인 노래를 불러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번 우리 가곡 음반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모든 단어와 뉘앙스, 전체적인 맥락, 여러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들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 불러도 듣는 분들이 공감할 수 있어 기뻤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달빛 이야기를 꺼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생각하면 사람마다 떠올리는 그림이 다 다를 겁니다. 제가 산골에 살면서 봤던 보름달의 느낌과 독일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가는 허허벌판에서 봤던 달은 같은 달이지만 분명 다르죠. 제가 본 달빛은 그 시골의 달이었던 겁니다. 외국에서 저는 이방인으로 그들의 음악을 했지만, 한국 사람으로 우리 가곡을 부를 땐 온전히 저희 것을 부르는 마음이었어요. 굉장히 편안하고 즐거웠어요.”

음반에는 ‘고향의 봄’(1926)을 비롯해 ‘옛 동산에 올라’(1933) ‘진달래꽃’(1947) ‘비목’(1969) ‘청산에 살리라’(1973) 등 대표 가곡과 작곡가 김택수가 쓴 신작 ‘산속에서’(2023) ‘산복도로’(2023) 등을 담았다. 신작 가곡을 2곡 넣은 것은 한국 가곡이 앞으로도 계속 창작되고 가창돼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빠진 곡들도 있을 텐데, 이번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한국 가곡 음반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세계 여러 언어 중에서 우리나라 말처럼 노래하기 좋고 편안한 언어가 없어요. 서양인들이 한국어로 노래하는 게 맞냐고 할 정도죠. 한국 가곡은 시성을 떠나서 말할 수 없어요. 이번에 노래하면서 소리와 발성보다 시를 낭송하는 자세로 임했습니다.”

풍월당 박종호 대표가 ‘고향의 봄’ 음반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앨범 제작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풍월당 제공


앨범이 나온 데는 클래식 음반매장으로 출발해 20년째 클래식 애호가들의 메카 역할을 하고 있는 ‘풍월당’의 역할이 컸다. 한국 가곡이 1990년대 들어 점점 인기가 식고 잊혀져가던 점을 안타까워하던 박 대표가 가곡 부활을 위해 연광철과 손을 잡았다.

박 대표는 “공급이 없기 때문에 수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적 정체성이 담긴 가곡을 누군가 적극 알려야 되지 않을까 해서 음반을 만들었다”며 “서양 클래식 음악이 들어온 지 150년 됐는데 내세울 만한 게 없다. 뛰어난 연주자들이 나왔지만 서양 음악을 하는 것뿐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클래식’이라고 하는 건 모순이고 어떤 면에선 부끄럽기도 하다”며 “한국 정서를 담은 건 우리 가곡이다. 리트(독일 가곡)에 비해서도 수준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앨범 펀딩도 드라마틱했다. 어느 날 풍월당에 미국에 살고 있다는 나이 지긋한 손님이 찾아왔다. 앨범 제작 이야기를 듣고 1만 달러를 쾌척했다. 이게 마중물이 됐다. 박 대표의 뜻에 공감한 풍월당 회원 200여명이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제작비를 마련해 풍월당이 최초로 자체 음반을 제작할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신미정이 ‘고향의 봄’ 음반에 사인을 하고 있다. ⓒ풍월당 제공


‘신박듀오’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신미정이 반주를 맡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난 계기도 리트가 좋아 리트를 공부하러 간 것이다.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에 시의 단어와 정서를 이해하는데 오래 걸렸다. 하지만 우리 가곡은 진정성을 담아 연주하면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뭉클 뭉클 다가왔다. 제 고향은 진도 바닷가다. 녹음했던 1주일이 선물 같았다. 추억과 기억의 힘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녹음은 한국 최고의 레코딩 환경을 자랑하는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진행됐다. 지난 7월톤마이스터 최진 감독과 함께 특별히 가곡의 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소리를 찾아내고, 울림이 긴 베이스에 가장 적합한 음향적 균형을 살려내 음반의 완성도를 최상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음반 표지도 눈에 띈다. 최근 별세한 박서보 화백의 그림이다. 박서보 재단의 후원을 받아 박 화백의 단색화 ‘묘법 No.980308’을 재킷 디자인으로 활용했다. 박 화백 아들과 풍월당의 인연으로 박 화백이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또한 수록된 18곡의 가사는 영어, 일어, 독일어 3개 국어로 번역해 음반에 함께 담았다. 영어의 정새벽, 일본어의 요시카와 나기, 독일어의 박술 등 최고의 번역가들은 우리 시의 독특한 정서와 아름다움을 각 언어권 독자들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범위에서 세심하고 탁월하게 옮겨냈다.

박 대표는 “18곡의 한국 시를 외국어로 새로 번역했고 여기에 어울리는 한국적 그림까지 넣어 한국 정서와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연광철은 오는 12월 3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국가곡 독창회’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직접 우리가곡의 아름다움을 전할 예정이다.

풍월당에서 만든 연광철의 ‘고향의 봄’ 앨범에 수록된 곡은 다음과 같다. 모두 알토란 같은 곡이다.

1. 장일남/한명희 ‘비목’(1969)
2. 김연준/김연준 ‘청산에 살리라’(1973)
3. 김순애/김남조 ‘그대 있음에’(1964)
4. 나운영/김태오 ‘달밤’(1946/76)
5. 이수인/이병기 ‘별’(1965)
6. 김동진/김동명 ‘내 마음’(1944)
7. 홍난파/이은상 ‘옛 동산에 올라’(1933)
8. 장일남/김민부 ‘기다리는 마음’(1951)
9. 홍난파/이은상 ‘사랑’(1933)
10. 현제명/이은상 ‘그집 앞’(1933)
11. 김성태/김소월 ‘산유화’(1946)
12. 윤이상/박목월 ‘달무리’(1949)
13. 김택수/나희덕 ‘산 속에서’(2023)
14. 채동선/이은상 ‘그리워’(1933)
15. 김순남/김소월 ‘진달래꽃’(1947)
16. 이건우/김소월 ‘산’(1948)
17. 김택수/황경민 ‘산복도로’(2023)
18. 홍난파/이원수 ‘고향의 봄’(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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