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젊다. 첼리스트 한재민은 17세(2006년생),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은 24세(1999년생), 피아니스트 김수연은 29세(1994년생)다. 내로라하는 국제 콩쿠르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세 사람이 나란히 무대로 걸어 나왔다. 그들 뒤에는 다부진 역삼각형 체격의 얍 판 츠베덴(63)이 지휘봉을 들고 입장했다.
11월의 마지막 날인 30일 롯데콘서트홀.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은 한재민·김동현·김수연과 함께 베토벤의 ‘삼중 협주곡(Op.56)’을 들려줬다. 으레 협주곡이라고 하면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이 오케스트라와 1대1로 상대하는 형태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 곡은 특이하게도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3대의 악기가 관현악과 대결하고 협력하며 음악을 전개해 나간다.
삼중 협주곡은 베토벤에게 ‘쓰린 기억’이다. 시대를 앞서간 새로운 형식의 걸작임에도 출판사는 악성의 다른 곡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선뜻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1804년에 완성됐지만 3년이 지난뒤 1807년에 악보가 나왔다.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롭코비츠 공에게 헌정됐다. 초연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사후에 진가를 인정받았다.
1악장 ‘빠르게’는 비교적 긴 악장이다. 러닝타임 18분 정도. 저음 현악기가 매우 여리게 행진곡풍 선율을 풀어 놓으며 시작됐다. 첼로가 먼저 수줍게 등장하고, 뒤를 이어 바이올린이 가볍게 인사하고는 금세 얼굴 표정을 바꾸며 경쟁하듯 소리를 만들어갔다. 피아노가 나오면서 두 악기의 신경전은 막을 내리고 화합의 앙상블을 펼쳤다.
피아니스트 김수연은 이번이 서울시향과 첫 협연이다. “가장 일찍 나오는 첼로가 메인으로 이끌어 가지만 피아노의 역할도 매력적이다. 솔리스트로서의 존재감이 있다. 피아노는 첼로와 바이올린의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마지막에 이야기를 한다. 비유를 하자면 맏이 같다. 실제로도 제가 두 사람보다 누나다”라며 마지막 악장까지 맏이로서 든든하게 중심을 잡아줬다.
2악장은 ‘폭넓게 느리게’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아름다운 멜로디를 함께 합작하며, 피아노는 이를 반주한다. 한재민은 지난해 9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에네스크 필과 3악장 모두를 연주한 적이 있다. KBS교향악단 신년음악회에서는 3악장만 연주했다.
“난해한 곡이지만 좋아한다. 곡에 담긴 것이 많다. 2악장은 말도 안되게 아름답다. 첼리스트에게는 각별하다. 독립된 세 악기가 합쳐져야 하고 오케스트라와도 하나가 돼야 한다. 첼로는 하이 포지션이 재미있으면서도 어렵다. 다른 곡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연주하곤 하는데 베토벤을 할 때는 ‘정신 줄’을 붙잡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베토벤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한재민은 아직 10대이다 보니 패션에도 나름 액센트가 있다. 멀리서도 빨간 양말이 눈에 띄었다. 공연에 앞서 몇 가지 루틴이 있음을 고백했다. 그는 “30분 전에 옷을 갈아입고 15분 전에 신발을 신는다. ‘잘해야갰다’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즐기고 내려오자’ 다짐한다. 성격이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편이다. 무대에서 시도해 놓고 ‘하지 말걸’ 할 때도 있지만 잘 맞아떨어지면 희열이 세 배다”라고 말했다. 도전하는 한재민이다.
그는 삼성문화재단에서 대여해준 1697년 밀라노산 조반니 그란치노 첼로를 쓴다. 음색이 우아하고 부드럽다. 울림도 풍부하다. "다루기 어렵기도 한데 1년이 되어가는 요즘 친해지는 단계다"라고 귀띔했다. 완전히 익숙해지면 얼마나 더 멋질까. 성장을 지켜보는 클래식 팬들을 기대에 들뜨게 했다
2악장에서 3악장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부분은 스르륵 녹는 초콜릿같다.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폴란드풍의 론도’라는 지시어가 붙은 3악장은 민속 춤곡인 플로네즈 스타일의 리듬을 타고 발랄하고 생기 있게 진행됐다.
김동현은 세 번 정도 삼중 협주곡을 연주했다. “협주곡의 형태지만 첼로, 피아노와 실내악처럼 주고받으며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 많고, 오케스트라와 소통하는 부분 또한 공존하기 때문에 실내악과 교향악의 매력을 동시에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투트랙으로 연주해야하니 난곡이기도 하다.
그는 2016년부터 금호문화재단이 후원으로 1763년산 과다니니 파르마 바이올린을 사용하고 있다. 따듯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전달력도 탁월하다. “제가 원하는 소리를 내고자 했을 때의 반응이 빠르기에 날렵함도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얍 판 츠베덴이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준 덕에 오랜만에 영파워의 매력을 고스란히 즐겼다. 서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밀어주고 끌어주는 호흡이 흐뭇하다. 서울시향이 이들의 성장을 돕는 자양분이 됐다. 햇볕은 관객들의 몫이다.
세 사람의 싱실케미는 앙코르에서 한번 더 빛났다. 멘델스존의 피아노 삼중주 1번 2악장으로 젊음의 음악을 선물했다.
얍 판 츠베덴과 서울시향은 2부에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Op.64)’을 연주했다. 선율미가 풍성해 대중음악에서도 슬쩍 카피해 사용했다. 민해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와 존 덴버의 ‘Annie’s Song’을 들어보면, 5번과의 유사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도대체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1악장에 ‘느리게-빠르게 영혼을 담아’라는 지시어를 적었다. 첫 주제에서 엄숙한 운명이 들리고 곧이어 저항의 목소리가 들린다. 2악장 ‘느리게, 노래하듯이, 약간 자유롭게’는 호른의 선율이 가슴을 파고 든다.
일반적인 왈츠 리듬과 다르게 ‘약-강’으로 진행하는 3악장은 색다른 운치를 선사했다. 4악장 피날레는 비극적인 운명을 삶의 의지로 바꾼 인간 승리의 악장이다. 변화무쌍했다. 모든 악기가 잠시의 싐도 없이 내달렸다. 카멜레온 서울시향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다시 실감한 무대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얼마전 내한공연을 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의 비단결 같은 차이콥스키 5번이 귀에 생생하다"며 "오늘은 작은 RCO처럼 RCO 트럼본 수석, 과거 RCO 팀파니 수석, 그리고 과거 RCO 악장이 한자리에 모였다.판 츠베덴이 지휘봉만 잡으면 단원들이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들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긴장감이 넘친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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