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무서운 집중력이다. 1부에서 11곡을 쉬지 않고 약 45분 동안 연주했다. 2부에서도 마찬가지. 13곡을 역시 45분간 멈춤 없이 터치했다. 멀리서 봐도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근육이 살짝 뻐근한 느낌이 들었을까. 양손을 살짝 흔들며 뭉친 곳을 풀어주고 다시 연주를 이어갔다. 보는 사람들도 피아니스트와 한몸이 됐다. 다음 곡으로 넘어가려는 아티스트의 세밀한 감성을 깨뜨리지 않으려 박수를 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와 관객이 함께 만든 감동 무대다.
‘M 아티스트’ 김도현이 꿈결 같은 90분을 선사하며 이름 석자를 뚜렷이 각인시켰다. 5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마포문화재단이 주최한 ‘제8회 M 클래식 축제’의 하이라이트 음악회인 ‘3 PEACE CONCERT’의 첫 주자로 나서 엑설런트 피아니즘을 선사했다. ‘M 아티스트’는 마포문화재단이 될성부른 떡잎을 선발해 키워주는 아티스트 육성 프로젝트다.
1부는 가브리엘 포레의 곡을 준비했다. 1860년대 초반부터 1910년대 중반 사이에 쓴 ‘뱃노래’ ‘녹턴’ ‘즉흥곡’ ‘전주곡’ 등을 연주했다. 무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의 흐름을 겪은 곡들이지만 김도현의 손끝을 타고 싱싱하게 살아났다. 부드럽고 단정한 마음을 피아노로 옮겨 놓은 포레의 의도를 잘 꿰뚫으며 자신의 색깔을 덧칠했다.
오프닝은 ‘뱃노래 12번(Op.106bis)’이 장식했다. 김도현이 만든 화성과 선율이 물결을 따라 유유히 흘렀다. ‘녹턴 1번(Op.33-1)’은 여리게 연주되는 오른손이 옅은 슬픔을 드리웠고, 단호하게 마음먹은 왼손이 격정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3개의 로망스 무언가 3번(Op.17)’은 2분이 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아름다운 선율을 펼쳐 놓았다. “한 번 더 연주해주세요”라고 요청하고 싶을 정도다.
비슷한 음형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긴장감을 높이는 도입부와 왼손의 너른 아르페지오 위로 아름다운 음이 흐르는 전개부가 반복되는 ‘즉흥곡 2번(Op.31)’을 거쳐, 보통 템포의 따스한 분위기가 가득한 ‘전주곡 4번(Op.103)’으로 이어졌다. 솜씨 좋은 장인이 귀호강 사운드를 배달했다.
포레의 녹턴은 약간 정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만 ‘녹턴 8번(Op.84)’는 훨씬 더 유려한 선율로 구성됐다. 꿈을 꾸는 듯한 정서는 여전했다. ‘전주곡 2번(Op.103)’은 왼손과 오른손을 속도감 있게 교차하며 오밀조밀 사운드를 만들었고, ‘전주곡 8번(Op.103)’은 스타카토를 사용해 묘한 리듬감을 선물했다.
오른손과 왼손이 주선율을 나누어 들려주며 ‘뱃노래 1번(Op.26)’이 넘실거렸다. ‘즉흥곡 5번(Op.102)’에서는 양손이 온음계를 번갈아 연주하며 마법과 같은 분위기로 시작해 점점 격렬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깜짝 반전도 있었다. 돌연 이 모든 상황이 농담이었다고 말하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왈츠 카프리스 1번(Op.30)’은 수줍게 도입부로 들어선 뒤 이내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나풀거리는 주제 선율은 우아한 왈츠 리듬과 함께 펼쳐졌다. 점차 분위기를 끌어올리더니 후반부에 잠시 숨을 죽이고서는 막바지에 준비된 화려한 화성과 함께 춤을 끝냈다.
2부는 ‘피아노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1부 첫 곡과 마찬가지로 ‘뱃노래(Op.60)’로 시작했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의 모습은 물론 하얗게 이는 파도의 포말과 바다 위에 떠있는 햇살의 분위기까지 눈앞에 오버랩됐다.
관객의 매너도 빛났다. 연주자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1부와 2부가 모두 끝난 후 박수를 쳤다. 다만 쇼팽의 뱃노래를 연주한 뒤에만 유일하게 중간 박수를 보냈다. 모처럼 ‘관크’(‘관객 크리티컬’의 준말로, 아티스트의 연주를 방해하는 행위)없는 콘서트를 보게 돼 흐뭇했다.
쇼팽의 연습곡은 기술 연마에 치중하는 보통의 연습곡과 달리 연주자의 예술성까지도 고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각 12곡으로 이루어진 2개의 연습곡 세트 ‘Op.10’과 ‘Op.25’를 남겼다. 김도현은 그 중 ‘Op.10’에 들어있는 12곡을 들려줬다.
김도현은 아르페지오를 부드럽게 펼쳐내며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 멜로디를 역시 부드럽게 이어갔다.(1번) 왼손에도 나름의 캐릭터를 부여해 오른손과의 균형을 맞추며 쇼팽의 마음을 헤아렸다.(2번)
3번은 상쾌했다. 나비처럼 날아가는 듯한 오른손의 빠른 움직임 이후 조용하게 끝을 맺었다. 4번에서는 재빠르게 널을 뛰는 듯이 움직이는 왼손 도약의 스킬이 빛났고, 5번에서는 스케르초풍의 매력을 아낌없이 풀어 놓았다.
슬픔을 머금은 왼손 선율이 돋보이는 6번이 흘렀고, 첼로 소리처럼 깊이 있는 음을 뽑아낸 7번은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줬다. 8번은 기술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6도 화음을 잘 소화했다.
명료하면서 산뜻한 단계(9번)를 지나니, 처음부터 무지막지한 파도 몰아치는 구간에 진입(10번)했다. 11번은 느린 코랄풍의 서주 이후 음표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12번은 사무치는 멜로디가 청중의 마음을 격렬하게 파고들었다.
앙코르는 두 곡을 선사했다. 쇼팽의 ‘녹턴 2번’과 포레의 ‘꿈을 꾼 후에’로 애프터서비스도 균형을 맞췄다.
<백브리핑1> 마포문화재단은 올해 창립 이래 최초로 올해의 아티스트 제도인 ‘M 아티스트’를 운영했다. ‘M 아티스트’는 매년 거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클래식 연주자 1명을 선정, 여러 번의 공연을 통해 연주자의 다채로운 매력을 관객에게 알리기 위해 도입했다. 비슷한 사례로 금호문화재단, 롯데콘서트홀 등이 상주 음악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민간 기업이 아닌 기초문화재단에서 이 같은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처음이다.
2021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와 함께 현대 작품 최고 연주상을 수상하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린 피아니스트 김도현은 첫 ‘M 아티스트’에 선정돼 마포문화재단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지난 6월 김도현 리사이틀을 시작으로 9월 제8회 M 클래식 축제 야외 수변무대 리사이틀 ‘Moon Sonata’, 10월 M 클래식 축제 메인콘서트에 섰다. 그리고 12월 5일 ‘3 PEACE CONCERT’까지 모두 4회 기획 공연을 통해 그의 음악세계를 집중 조명했다.
<백브리핑2> 마포문화재단은 한국, 대만, 일본의 실력파 피아니스트 3인방의 릴레이 리사이틀인 ‘3 PEACE CONCERT’를 준비했다. 먼저 12월 5일에는 김도현이 공연했고, 6일에는 21세기 모차르트의 환생으로 불리는 대만계 피아니스트 킷 암스트롱이 6년 만에 내한해 무대에 선다. 7일에는 2019 인터내셔널 텔레콤 베토벤 콩쿠르 준우승을 차지한 일본의 떠오르는 신성 타케자와 유토가 처음으로 한국 관객을 만난다.
특히 6일 킷 암스트롱 리사이틀 2부에서는 축제의 방점을 찍는 장면이 실현된다. 한국, 대만, 일본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한 대의 피아노에서 ‘라흐마니노프 6개의 손을 위한 로망스’를 함께 연주해 ‘흰 건반, 검은 건반이 하나 되어 전하는 아시아 3국 평화와 화합의 클래식’이라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여섯 개의 손이 연출하는 ‘역사적 6분’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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