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박혜상 “살아있는 동안 빛나자”...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찾은 행복

하루 20~30km 걸으며 근원적 삶 성찰
세이킬로스 비문에서 치유의 힘 깨달아
​​​​​​​4년만의 새 앨범 ‘숨’에 희망메시지 가득

박정옥 기자 승인 2024.02.05 18:00 | 최종 수정 2024.02.05 18:20 의견 0
소프라노 박혜상이 5일 열린 새 앨범 ‘숨’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앨범을 관통하는 주제는 ‘결코 슬퍼하지 말라. 살아있는 동안 빛나라’입니다. 음반을 준비하던 재작년 8월 산티아고 순례길을 하루 20∼30㎞씩 25일간 걸었어요. 에어비앤비 숙박을 계기로 우연히 알게 된 이탈리아 왕족의 도움으로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피에타도 봤어요. 이런 경험들이 영감이 됐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베를린 국립오페라 등 세계무대를 누비며 ‘차세대 디바’로 불리는 소프라노 박혜상이 새 앨범 ‘숨(Breathe)’을 발매했다. 그는 한국인 성악가 가운데 최초이자 유일하게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과 전속 계약을 맺은 아티스트다. 이번 앨범은 2020년 낸 1집 앨범 ‘아이 엠 헤라(I AM HERA)’ 이후 4년 만의 새 음반이다.

박혜상은 5일 서울 서초구 코스모스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기에 준비한 새 앨범에는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에서 시작된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담겨있다고 입을 뗐다.

소프라노 박혜상이 5일 열린 새 앨범 ‘숨’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소프라노 박혜상이 5일 열린 새 앨범 ‘숨’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그는 “코로나를 겪으며 좋아하는 사람들을 잃으면서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부정적인 마음이 가슴을 가득 채우던 시기였고, ‘왜 사는가’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고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섰다”며 “영적인 체험도 하고, 외로움도 강렬하게 느끼면서 ‘살면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처음에 박혜상은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등의 단계를 앨범의 스토리라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죽음을 어둡고 우울한 것으로만 바라본다면 삶이 너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악보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음악으로 평가받는 그리스 세이킬로스의 비문이었다. 세이킬로스라는 인물이 아내 혹은 어머니를 잃고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글이었다. 여기서 희망을 찾았다.

“세이킬로스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기리며 쓴 것으로 보이는 ‘살아 있는 동안은 빛나라/결코 슬퍼하지 말라/인생은 잠시 동안만 존재한다/그리고 시간은 그 대가를 요구한다’라는 구절을 접했어요. 세이킬로스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이 묘비명을 듣는 순간 갑자기 힐링이 됐어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연하지 않게 다가오더라고요. 그 철학이 좋아서 ‘살아있는 동안 빛나자’라는 테마로 앨범을 만들게 됐죠.”

소프라노 박혜상이 5일 열린 새 앨범 ‘숨’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소프라노 박혜상이 5일 열린 새 앨범 ‘숨’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소프라노 박혜상이 5일 열린 새 앨범 ‘숨’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음반에는 현대음악 작곡가 루크 하워드의 곡 ‘시편’에 세이킬로스의 비문을 넣어 편곡한 ‘당신이 살아있을 동안(While You Live)’을 첫 곡으로 넣었다. 박혜상이 직접 하워드에게 의뢰했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18세 소녀가 감옥에서 엄마에게 쓴 편지 내용을 담은 헨릭 고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가사 없이 ‘아’라는 단어로만 되어 있는 베르나르 비반코스의 ‘보컬 아이스’, 쥘 마스네의 오페라 ‘타이스’의 관현악곡인 명상곡에 ‘아베마리아’ 가사를 붙인 ‘마스네: 아베마리아’ 등이 담겼다.

한국 가곡인 우효원의 ‘어이 가리’도 눈에 띈다. 이 곡은 아쟁 연주에 목소리를 얹었는데 죽은 자를 위한 추모하는 레퀴엠(진혼곡)이다.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박혜상은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의 피아노 반주로 ‘마스네: 아베마리아’와 ‘가시리’를 불렀다.

오는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앨범 발매 기념 리사이틀에서는 음반에 담기지 않은 우효원의 ‘가시리’와 ‘새야새야’도 선보인다.

소프라노 박혜상이 5일 열린 새 앨범 ‘숨’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박혜상은 “저는 애국심이 강한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가곡을 부르거나 한복을 입을 때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힘이 있는 것 같다”며 한국가곡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어제 친구와 전화하며 곡에 쓰인 아쟁이라는 악기에 관해 설명을 해줬다”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 뿌리를 알고, 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는 역할을 할 수 있어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박혜상은 앨범 작업을 하며 신기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꿨던 꿈속에서 숨을 참아야 하는 물속에 들어가자 오히려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영적인 체험을 했다고 전했다. 앨범 제목을 ‘숨’이라고 지은 것도 이 꿈 때문이다. 앨범의 재킷과 뮤직비디오에도 수중장면을 넣었다. 이것을 촬영하려고 태국에서 프리다이빙 교육도 수료했다.

그는 “이번 앨범은 저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아무도 안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며 “그만큼 제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메시지를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며 “두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앨범이다”라며 웃었다.

그는 지금까지 ‘노마드’였다. 일정한 거처 없이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떠돌며 살았는데 얼마 전에 정착민이 됐다. 뉴욕과 베를린의 창고에 짐을 보관해 두고 달랑 캐리어 2개만 싸 들고 영국, 독일, 미국, 한국을 오가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 살 곳을 마련한 것.

“7년 동안의 노마드 생활을 끝냈어요. 집은 마음속에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였지요. 비록 집에 머무는 기간이 1년에 3개월 정도에 불과하지만, 막상 집과 제 침대가 생기니 이렇게 편할 줄 몰랐어요.”

소프라노 박혜상이 5일 열린 새 앨범 ‘숨’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박혜상은 올해도 바쁘다. 해외 공연 일정이 연말까지 꽉 차 있다. 다음 달 영국, 아르헨티나를 시작으로 4월엔 영국, 프랑스에서 공연하고 여름엔 영국으로, 가을엔 독일, 헝가리 등으로 이동한다. 30대 중반, 박혜상은 한 뼘 더 성장했다.

“이번 앨범엔 죽음을 각각 다르게 바라보는 작품들을 골랐어요. 한국가곡, 현대음악 등이 다양하게 담겼지만, 그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 하나입니다. ‘사랑하자. 슬퍼할 시간에 빛나게 살자.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니’라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저는 제가 앨범을 내는 음악가가 되거나 오페라 가수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모든 순간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무겁게 다가오기도 해요. 앨범이 갖는 의미가 뭔지도 고민하게 됐죠. 잘 팔리는 곡으로 대중적인 앨범을 낼 수도 있었겠지만, 제가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낸 앨범이에요.”

“지금까지 ‘행복해야 해’ ‘잘해야 돼’ ‘잘할 수 있어’라는 중압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꼭 행복하지 않아도 살아지는구나’를 배웠습니다. 배부름은 배고프지 않고서는 알 수 없고, 음악은 고요함 없이는 알 수 없고, 부유함도 가난함 없이는 모르는 거잖아요. 겸손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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