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은 “왼손으로만 연주하는 1악장...브라이언 필드가 제 마음 꿰뚫어 감동”

스타인웨이 러브콜로 ‘SOUND SCAPE’ 음반 발매
지구환경 생각한 세계적 작곡가 3인의 작품 녹음
​​​​​​​경계 넘나드는 자유분방하면서 절제된 연주 어필

송인호 객원기자 승인 2024.02.20 08:34 | 최종 수정 2024.02.20 08:43 의견 0
피아니스트 김경은이 최근 현대 작곡가 3인의 작품을 수록한 음반 ‘SOUND SCAPE’를 발매했다. ⓒ김경은 제공


[클래식비즈 송인호 객원기자] 유명한 피아노 제작사 ‘스타인웨이 앤 선즈(STEINWAY & SONS)’는 세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를 섭외해 그의 뛰어난 역량을 오롯이 음반으로 담아낸다. 이 스타인웨이가 이번에 피아니스트 김경은과 호흡을 맞춰 새롭게 음반을 출시했다. 타이틀은 ‘SOUND SCAPE’. 말 그대로 ‘소리풍경’이다. 소리를 통해 풍경을 눈으로 담는 것이다. 어떤 소리일까 궁금했다. 지난 2일 스타인웨이 갤러리 서울에서 음반발매 기념 쇼케이스를 열었다.

“2021년에 스타인웨이 아티스트로 선정됐어요. 그리고 작년 여름에 음반을 녹음했어요. 부천아트센터에서 3일간 했어요. 작년 5월 새로 개관한 부천아트센터 중극장에서 녹음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라고 하더라고요. 음향에 최적화된 공연장이라고 이번 앨범 PD이신 톤마이스터 최진 선생님이 강력하게 권해서 했어요. 녹음을 해 보니까 너무 멋지고 훌륭했어요. 중극장은 가변 벽이에요. 아티스트가 원하는 대로 공간을 만들 수 있어요. 객석도 가변이라 제가 녹음할 때는 객석 없이 그냥 스튜디오처럼 만들어서 했어요.”

김경은은 이전에 소니에서 음반 2개를 출시했다. 가장 최근인 2022년 6월에 소니 클래시컬 레이블에서 발매된 두 번째 음반 ‘드림(Dreams)’은 드뷔시, 사티, 라벨, 브람스, 쇼팽, 리스트의 짧은 인기 피아노 작품 14곡이 수록돼 있다. 정통 클래식 음반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 스타인웨이에서 발매한 음반은 전부 현대곡으로 녹음했다. 필립 글래스, 존 코릴리아노, 브라이언 필드 등 당대 최고 작곡가들의 곡이다. 현대음악 작곡가로 유명한 필립 글래스의 ‘메타몰포시스 I, II’ 두 곡을 연주했다. 미니멀리즘의 전형으로 필립 글래스의 특징적인 반본적 패턴과 점진적인 화성의 변화를 그대로 담았다. 또 현대작곡가 존 코릴리아노의 두 곡 ‘오스티나토에 의한 환상곡’과 ‘에튀드 판타지 1-5’를 담았다.

“스타인웨이 미국 뉴욕 본사에서 음반을 내자고 연락이 왔어요. 이번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은 전부 뉴욕에서 활동하는 분들이에요. 저도 뉴욕에서 학교를 다니고 오랫동안 거기서 활동했죠. 아마 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나 봐요. 특히 브라이언 필드 작곡가는 저의 첫 앨범 ‘라벨’을 듣고 따로 연락을 해 오셨어요. 저를 위해 작곡 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피아니스트 김경은은 최근 발매한 새 앨범 ‘SOUND SCAPE’를 지난해 개관한 부천아트센터에서 녹음했다. ⓒ김경은 제공


6개월 후 브라이언 필드로부터 악보를 받았다. 종 3악장으로 구성된 모음곡 ‘고통 받는 지구를 위한 세 가지 열정’이었다. 이 곡은 지구의 기후변화를 주제로 하고 있다.

첫 번째 악장 ‘불’은 캘리포니아와 미국 서부 전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산불을 보고 작곡했다. 지구환경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불꽃’의 오스티나토(ostinato)로 시작해 깜빡거리며 빠르게 퍼져나가 점점 더 복잡하게 발전한다. 불은 요란하게 번지기 시작해 음역을 가로 지르다 궁극에는 통제력의 한계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그렇게 불길은 스스로 타들어가 죽는다.

두 번째 악장 ‘빙하’는 우아한 느낌이다. 남극의 거대한 빙산(얼음)을 묘사한다. 느리고 사색적이며 때론 순간들이 빠르게 떨어지는 천둥과 같은 장면들을 보여주는 곡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곡은 점차 따뜻해지는 기온으로 빙하가 깎이는 모습을 묘사한다.

마지막 세 번째 악장 ‘바람’은 태풍의 파괴력을 지니게 되는 바람으로 시작하는 기교적인 피날레 악장이다. 처음에는 그 무엇보다 강한 바람으로 시작에 나중에는 점차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산들바람으로 사라지며 곡을 마무리한다.

“연주하면서 깜짝 놀랐어요. 어쩌면 이렇게 제 마음을 잘 읽고 작곡을 했을까 했어요. 물론 그 분이 오랫동안 저를 봐 오면서 제 연주 스타일을 잘 파악하고 곡을 썼으니까 제가 연주하기엔 최고의 곡이었죠. 왜냐하면 1악장은 왼손으로만 연주해요. 나중에 얘기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라벨 전곡을 연주했었거든요. 라벨 곡 중에 왼손만 사용하는 피아노 협주곡이 있어요. 어쩌면 브라이언 필드 작곡가가 그걸 염두에 두고 곡을 썼을지도 몰라요. 이번 전체 곡을 연주하는 동안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어요. 곡 자체가 주는 이미지도 있고 곡도 정말 드라마틱해요. 제 스스로 감동을 하면서 연주했어요. 연주를 하고 있으면 작곡가의 느낌대로 그 풍경이 막 그려지는 거에요. 그래서 음반 제목을 ‘사운드 스케이프’라고 제가 지었어요.”

김경은은 부친의 사업으로 인해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여덟 살 때 까다롭기로 유명한 예후디 메뉴인 음악학교에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입학한다. 거기서 러시아 출신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데미덴코에게 배웠다. 이후 퍼셀 음악학교에서 이리나 자리츠카야를 사사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피아니스트 김경은은 최근 발매한 새 앨범 ‘SOUND SCAPE’를 지난해 개관한 부천아트센터에서 녹음했다. ⓒ김경은 제공


런던에 사는 동안 그는 매년 여름마다 당시 생존해있던 라벨의 마지막 제자 블라도 페를뮈테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 인연으로 라벨의 작품에 매료됐고 나중에는 라벨의 피아노 작품 전곡을 연주하고 음반까지 냈다.

부모님이 영국생활을 끝내고 귀국히게 됐다. 그는 한국으로 고잉홈 대신에 미국행을 택했다. 뉴욕 줄리어드 음대를 열여섯 나이의 최연소로 입학했다.

“처음 줄리어드에 입학할 때는 인터넷이 아직 제대로 보급이 안됐어요. 메일이란 것도 없었고요. 9월에 학기가 시작되는데 여름방학 때 저희 집으로 편지를 보내 나이가 어려서 학교 기숙사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한거예요. 할려면 발레과 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에요. 이 서신을 저는 못받고 뉴욕을 간거죠. 가서 보니까 그런 상황이더라고요. 미성년자이다보니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았어요. 결국 발레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에서 2년 있다가 18살에 음악쪽 기숙사로 옮겼어요. 그 당시 발레는 대부분이 어린아이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아마 기숙사도 어린 친구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곳으로 배정한 것 같아요.”

줄리어드를 다니면서 제롬 로웬탈과 세이무어 립킨을 사사해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2004년에는 맨해튼 음대에서 솔로몬 미코프스키를 사사하고 최고 연주자 과정 수료와 음악 예술 박사 학위 취득 등 두 가지를 이루어 냈다.

그는 진은숙의 피아노 협주곡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어린 나이에 부모 없이 홀로 뉴욕생활을 잘 해냈고 또한 20여년 동안 연주생활을 충실히 잘 해냈다.

김경은은 이미 열 살 때 코리안 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데뷔를 하고 이후 서울내셔널심포니, 유스 오케스트라, 스테이트 아카데믹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 오케스트라, 홍콩필하모닉, 흐라데츠 크랄로베 필하모닉, 모라비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포르투갈 북부 오케스트라, 캄머 필하모니 다카포 오케스트라, 스페인 무르시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국 토페카 심포니오케스트라와 알바니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손꼽을 수 없을 만큼 유명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했다.

그는 결혼으로 인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을 하게 된다. 가톨릭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동시에 연주 활동을 통해 현대 작품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최고의 연주가로 1분 만에 전석매진을 만드는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그가 첫 스승이다.

김경은은 다수의 현대 작품들을 한국 초연했다. 예술의전당에서 가진 ‘Afternoon in Paris’ ‘Sonata Journey’ ‘Musical Portraits’ ‘Fantasy and Reality’ 등의 리사이틀 무대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피아노 테크닉을 선보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을 연주했지만 줄리어드를 다니면서 현대음악에 눈뜨기 시작했어요. 뭐랄까 새로운 스타일에 자꾸 끌림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매번 연주회가 있으면 프로그램에 한 두 곡은 꼭 넣었어요. 그러다보니 오늘 이렇게 스타인웨이 레이블에서 현대음악으로 솔로 연주 음반을 내게 됐는지도 몰라요.”

피아니스트 김경은이 최근 스타인웨이 앤 선즈 레이블에 새 앨범 ‘SOUND SCAPE’를 발매했다. ⓒ김경은 제공


모든 연주가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도 역시 연주할 때마다 그 작곡가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한다. 악보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열정과 냉정의 밸런스를 잘 맞추어야 한다. 그는 비단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클래식도 꾸준히 연주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경계에서 넘나들기를 하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연주스타일이 자유분방하면서도 절제된 연주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연주가가 무엇을 가리겠는가. 클래식은 클래식대로의 맛이 있는 것이고 현대음악은 현대음악의 맛이 있는 것이다. 그의 연주를 듣고 내내 행복해 할 사람들이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해 할 것이다.

“저는 언젠가는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3개 전부를 연주하고 싶어요. 30번, 31번, 32번을 한꺼번에 인터미션 없이 연주할 생각입니다. 1시간 조금 넘을 건데 베토벤 후기 음악은 난해해요. 왜냐하면 귀가 먹어 청력을 상실한 가운데서 작곡을 한 것이라 해석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리고 내년이 라벨 탄생 150주년이에요. 그래서 연주회를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라벨 전곡을 6년에 걸쳐 다 연주했거든요. 피아노 협주곡 2개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일단 그 때 상황을 봐서 결정할까 해요. 재미있는 것은 맨 처음에 얘기했듯이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인데요. 이 곡은 왼손만 사용해요. 라벨의 친구인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1차 세계대전 때 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었어요. 이 친구를 위해서 작곡한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는 이 악보를 보고 왼손으로만 연주를 했죠. 너무 아름다운 곡이예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게서 피아노는 무엇인가? 한참 생각 후에 입을 열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어요. 어른이 되어서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키우면서 계속 피아노를 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제겐 다 소중한 것들이죠. 특히 요즘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바라보고 지내는 시간이 참 행복해요. 이와 더불어 피아노는 둘째 아이 같아요. 그전에는 피아노가 행복을 주는 첫 번째였는데 지금은 두 번째네요. 그래서 제게 있어서 피아노는 둘째 아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첫째면 어떻고 둘째면 어떤가.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을까. 언젠가 아이가 자라서 그의 곁을 떠나면 피아노는 다시 첫째 아이가 될 것이다. 피아노의 아름다운 건반 위에서 그의 인생은 마지막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 스타인웨이 레이블에서 나온 ‘SOUND SCAPE’는 오는 4월 한남동에 있는 일신아트홀에서 공연으로 연주될 예정이다. 스타인웨이 홈페이지에서는 프리뷰 형식으로 1분간 녹음한 음원을 다 들을 수 있다. 스포티파이에서는 전곡을 다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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