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70분 동안 쏟아 부은 쇼스타코비치 7번...듣는 사람이 오히려 기 빨릴 지경

얍 판 츠베덴 지휘로 서울시향 ‘레닌그라드 교향곡’ 연주
히틀러·스탈린의 파괴에 저항하는 인간의 숭고함 담아내
​​​​​​​다니엘 밀러-쇼트는 낭만 가득 엘가의 첼로협주곡 선사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4.08 12:24 | 최종 수정 2024.04.08 17:20 의견 0
얍 판 츠베덴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을 연주했다. 스네어 드럼 연주자 3명이 첼로와 더블베이스 사이에 위치한 이색 포메이션이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는데도 모두 원점타격이다. 호른 8대, 트럼펫 6대, 트럼본 6대다. 거기에 더해 팀파니를 기본으로 실로폰, 스네어 드럼, 베이스 드럼, 트라이앵글, 탬버린, 탐탐, 심벌즈 등 타악기가 자리를 차지했다. 하프 2대에 피아노도 1대다. 무대가 꽉 찼다. 음의 융단폭격이지만, 그 속에서도 원하는 목표물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맞췄다.

얍 판 츠베덴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으로 다시 파워업을 보여줬다. 4일과 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공연했다. 5일 무대를 감상했다.

교향곡 7번은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독소전쟁(1941~1945) 중 가장 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레닌그라드 전투’(1941~1944)를 배경으로 작곡됐다. 작곡가의 지인들에 따르면 이 작품, 특히 첫 악장에 나오는 유명한 ‘침공의 주제’는 이미 전쟁 전에 구상됐다고 한다. 이 곡에 담긴 저항 정신은 히틀러뿐만 아니라 스탈린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방증이다.

쇼스타코비치는 독일군과 소련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이 곡의 스케치를 진행했다. 자연히 작품에는 참혹한 전투의 과정, 평화로운 시절에 대한 회상, 국토에 대한 애정 등 전쟁의 한복판에서 체험할 수 있는 장면, 감정, 상념이 투영됐다. 그는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처음 세 악장을 작곡했고, 마지막 네 번째 악장은 모스크바로 대피한 뒤 완성(1941년)했다.

전체 연주시간은 70분에 달한다. 작곡가에 의하면 이 작품은 거의 표제음악에 가깝다. 각 악장은 차례대로 ‘전쟁’ ‘추억’ ‘광야’ ‘승리’의 이미지를 그린다. 처음에 이런 제목을 붙였지만 곧 지워버렸다.

얍 판 츠베덴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판 츠베덴의 지휘에 따라 서울시향은 러닝 타임 30분 정도의 1악장(조금 빠르게)을 시작했다. 장대한 소나타 형식인데 처음부터 강렬했다. 시작되자마자 큰 거 한방을 맞았다.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음악의 얼얼함은 마지막 악장까지 연결됐다.

일명 ‘인간의 주제’로 불리는 남성적 분위기의 활기와 인생을 긍정하는 선율로 힘차게 출발했고, 이어 밝고 평온한 두 번째 주제가 등장해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목관의 모놀로그로 나아갔다.

발전부는 긴박하고 광포한 ‘전쟁 행진곡’이다. 첼로와 더블베이스 사이에 스네어 드럼 3대가 위치했다. 이색적 포메이션이다. 드럼의 집요한 연타에 맞춰 ‘침공의 주제’가 계속 반복됐다. 라벨의 ‘볼레로’를 연상시키며 음악이 차츰 고조됐다. 벌크업! 악기가 하나씩 더해지며 음의 근육이 늘어났다. 1에서 시작해 2, 3, 4, 5, 6, 7을 거쳐 8, 9. 10으로 사운드가 점점 커졌다. 귀로 듣고 있지만 눈앞 가상의 스크린에 한 단계씩 높아지는 숫자가 계속 보일 정도다. 무대 양쪽에 배치된 브라스 밴드가 가세해 파괴, 죽음, 멸망 등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거기에 가장 처음에 나온 인간의 주제가 저항하면서 절정에 도달했다.

재현부에서는 전화가 휩쓸고 지난간 뒤의 고요, 회상, 애도가 흘렀다. ‘이제 핏빛 아픔은 없겠지’라며 잠시 안심했지만, 이내 종결부에서 다시 침공의 주제가 고개를 내민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출구 없는 전쟁이 오버랩됐다. 연주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듣는 사람이 기가 빨릴 지경이었다.

2악장(적당히 빠르게)은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굴절된 스케르초와 서정적 간주곡이 결합됐다. “이것은 유쾌한 일이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관한 추억이다. 아픔과 슬픔의 아지랑이가 이 추억을 감싸 안고 있다.” 작곡가는 스스로 이런 역설적인 설명을 남겼다.

가슴 시린 코랄 선율로 시작되는 3악장(아주 느리게)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혜에 대한 외경의 마음, 그리고 희생자를 위한 애도의 정이 담겨있다. 요란하게 흘러가는 중간부에서는 전쟁 혹은 숙청의 악몽과 저항 정신이 교차했다.

4악장(빠르되 지나치지 않게)에서는 전투가 재개됐다. 전개 양상이 첫 악장에서보다 다채롭고 열광적이다. 긴박한 흐름 속에서 거의 굉음에 가깝게 작열하는 음향 효과가 압도적이다. 절정부에서 울려 퍼지는 팡파르에 베토벤의 ‘운명의 동기’와 유사한 이미지가 각인돼 있다. 작곡가는 이 장엄한 피날레에 대해 “다가올 승리를 표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얍 판 츠베덴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을 연주한 후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1942년 쿠이비셰프와 모스크바에서 초연됐다. 작품이 잉태된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연주된 것은 그해 8월, 이미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던 그 한가운데서였다.

레닌그라드에 남은 유일한 악단이었던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단원 중에서 생존해 있고, 연주가 가능했던 이들이 모였다. 연주자도 일했던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차출되기도 했다.

8월 9일, 죽음이 만연한 도시에서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콘서트홀로 몰려들었다. 연주장 바깥에서는 독일군을 향해 확성기를 타고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흘러 나갔다. 청중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그들의 삶이 새겨진 이 교향곡을 들었다. 멀리서 음악을 들은 독일군들은 아마도 “우린 절대 이 사람들을 이길 수 없을 거야”라며 패전을 예감했으리.

류태형 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는 “충격과 공포의 명연주였다. 판 츠베덴은 군더더기 없는 토스카니니, 강렬하고 날카로운 므라빈스키, 껑충껑충 뛰어 오르는 번스타인으로 빙의한 듯 서울시향으로부터 엄청난 에너지를 끌어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불길한 작은 북과 싸늘하게 울부짖는 목관과 금관, 착착 맞아 떨어지며 제3의 악기 소리 같은 현악의 유니슨, 괴수의 울음 같은 더블베이스와 첼로의 연주가 당대의 엄혹한 분위기를 살리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디오에서 들을 수 없었던 움직임들이 이 곡에 대한 이해를 상당한 정도로 도왔다”고 설명했다.

허명현 평론가는 “준비를 많이 한 것 같고, 저렇게 빠른 속도로도 앙상블을 이루는 모습이 멋졌다. 1악장은 정말 톱니바퀴처럼 척척 맞았다.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 트럼펫 수석과 취리히 톤할레 트럼본 수석에 힘입어 흔들림 없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갔고, 이 두 사람이 앙상블을 만드는 것도 명장면이었다”라며 “지난번 5번처럼 오락적 요소와 쾌감이 가득한 판 츠베덴의 쇼스타코비치였다. 이거 만드느라 단원들 진짜 고생했을 것 같다”고 했다.

첼리스트 다니엘 뮐러-쇼트가 얍 판 츠베덴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첼리스트 다니엘 뮐러-쇼트가 얍 판 츠베덴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1부에서는 다니엘 뮐러-쇼트가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 곡은 오늘날 안토닌 드보르자크, 로베르트 슈만의 곡들과 더불어 첼로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히지만 처음에는 실패작에 가까웠다. 광범위한 청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자클린 뒤 프레가 등장한 1960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전반적으로 너무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탓이다. 그렇다면 곡에 감도는 수수께끼 같은 우수 혹은 비애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엘가가 이 곡을 쓴 것은 나이 예순을 넘긴 1918년부터 1919년 사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다. 유례없는 참혹한 전쟁은 크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대영제국의 영광은 황혼을 향해 가고 있었고, 엘가의 건강도 내리막길이었다. 빛나는 시대와 생애에 작별을 고하는 한 작곡가의 회한과 우수의 결정체였다.

뮐러-쇼트는 지휘자 판 츠데덴, 부악장 웨인 린과 수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베네치아에서 1727년 제작된 마테오 고프릴러 첼로로 긴밀하게 호흡을 맞춰나갔다. 첼로의 고독하고 강렬한 선율로 문을 연 1악장은 그림자가 드리운 파스토랄(목가적 악곡)이다. 어두운 주부 사이에 밝은 중간부가 삽입된 3부 형식으로 구성됐다. 독주 첼로의 피치카토로 시작된 2악장은 사뭇 심각한 표정의 전반부를 지나 스케르초풍의 후반부에 이르면 생기와 활력이 감돈다. 독주 첼로의 기교적 움직임이 부각된다.

3악장은 독주 첼로가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가요풍이다. 사연 많은 사람의 쓸쓸한 고백처럼 애틋하게 이어지는 흐름이 가슴을 파고든다. 마지막 4악장은 관현악의 행진곡풍 반주로 출발한다. 리드미컬한 진행 속에 앞선 악장들을 회상하면서 차츰 악상을 심화시켜 나가다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면 절박한 표정으로 느린 악장의 선율과 촉 첫머리의 주제를 재현한다. 그리고 템포가 빨라져 단호하게 마무리한다.

뮐러-쇼트는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 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무반주 챌로 모음곡 3번’ 중 지그를 앙코르로 연주했다.

류태형 평론가는 “뮐러-쇼트의 앨가 협주곡은 부드럽고 사려 깊은 연주가 고급스러움을 자아냈다. 서울시향의 비르투오시티(연주 기교)가 잘 느껴진 반주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백브리핑> 롯데콘서트홀 공연 감상한 히딩크...판 츠베덴과의 우정 과시

서울시향 홍보대사인 거스 히딩크가 4일 서울시향 공연을 감상한 뒤 백스테이지를 방문해 단원들과 셀카를 찍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서울시향 홍보대사 거스 히딩크와 서울시향 음악감독 얍 판 츠베덴이 1일 MBC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배철수와 사진을 찍고 있다. ⓒ배철수의음악캠프 제공


“앗! 히딩크다.” 2022 월드컵 4강 신화의 영웅 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 4일 롯데콘서트홀을 깜짝 방문해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한 서울시향 공연을 감상했다.

공연 시작 전 히딩크 감독이 로비에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의 출현에 관객들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또한 일부는 “대박”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히딩크는 같은 네덜란드 사람이자 오랜 친구인 판 츠베덴과의 인연으로 지난 1일 서울시향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그는 4일 직접 공연장을 찾음으로써 홍보대사로서의 진정성을 보여줬다.

공연이 모두 끝난 뒤 히딩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멋진 일을 해낸 친구에게 따뜻한 응원을 보냈다. 두 사람의 참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히딩크는 공연이 끝난 뒤 백스테이지를 방문해 서울시향 단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사진 촬영을 해주는 등 특급서비스도 제공했다.

이에 앞서 히딩크는 판 츠베덴과 함께 MBC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고, KBS 1TV ‘아침마당’과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 등에도 나올 예정이다.

/eunki@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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