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생략·압축·비약의 예술...한수진 새 이름표 된 ‘막스 리히터의 리컴포즈드 사계’

영국 레퍼토리만으로 꾸민 ‘브리티시 오리지널’
비발디 원곡 능가하는 재작곡의 싱싱한 라이브

아드리엘 김 지휘한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
​​​​​​​에릭 코츠 ‘런던 모음곡’으로 경음악 매력 선사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2.11 10:13 | 최종 수정 2024.02.13 08:43 의견 0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7일 열린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에서 막스 리히터의 ‘리컴포즈드 사계’를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은 지휘자 아드리엘 김. ⓒ에스에이치아트앤클래식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생략과 압축과 비약.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연주한 ‘리컴포즈드 사계’가 그랬다. 안톤 비발디 불후의 걸작 ‘사계’를 독일 태생의 영국 작곡가 막스 리히터가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2012년 앨범으로 발매돼 히트했다. 비발디 고유의 음악적 DNA는 남겨 놓고 루핑기법, 리듬의 변칙적 구성 등 지금 시대의 다양한 작곡법을 새로 넣었다. 그래서 다시 작곡했다는 뜻의 ‘리컴포즈드(recomposed)’라는 단어가 붙었다.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접목한 굿 케이스다.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한수진이 아드리엘 김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과 호흡을 맞춰 2부에서 리컴포즈드 사계를 들려줬다. 군더더기는 과감하게 떼어냈다. 한가하게 느껴지는 파트는 줄이고 줄여 핵심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귀를 사로잡은 부분은 더 크게 만들었다. 음을 굴리고 굴려 음뭉치로 만들었다. 리히터가 100을 생각하고 재작곡했는데, 한수진은 200으로 연주했다. 앞으로 한수진하면 리컴포즈드 사계와 동의어로 연상될 만큼 임택트 있는 무대였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브랜드화하는데 강력한 무기를 득템한 셈이다.

‘봄’ 1악장은 사계의 시그니처다. 사계하면 바로 1악장을 떠올린다. 한수진과 단원들이 함께 힘을 합쳐 내는 짧은 반복 선율은 점점 우주의 음악으로 확장됐다. 땅을 뚫고 나온 새싹과 메마른 나무에서 움튼 꽃망울이 모두 음으로 변신했다. 뒤를 받쳐주는 하프(조윤희)의 둥둥둥 소리를 타고 모든 소리들이 우주 공간을 떠돌았다. 신비감은 더블이 됐다.

기돈 크레머는 한수진을 “비범한 테크닉과 다양한 표현력으로 진정성 있는 음악을 선사하는 인상 깊은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평가했다. 숭고함이 녹아있는 묵직한 무게감의 쳄발로(송은주) 사운드가 새로 가세하며 2악장이 시작됐다. 크레머의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한수진의 손을 타고 애절한 선율이 뿜어져 나왔다. 짧은 봄날의 아쉬움이다. 햇살 좋은 날, 아무 이유 없이 울컥해지는 마음을 닮았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7일 열린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에서 막스 리히터의 ‘리컴포즈드 사계’를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에스에이치아트앤클래식 제공


그래도 봄 아닌가. 3악장은 하프와 쳄발로가 중심을 잡아주며 모든 악기들이 산과 들을 초록의 아우성으로 만들었다. 꽃들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내가 가장 예쁘다며 서로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란스럽거나 어지럽지 않았다. “나 찾다가/텃밭에/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예쁜 여자랑 손잡고/섬진강 봄물을 따라/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김용택의 ‘봄날’)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여름’이 됐다. 쳄발로 고유의 음색과 바이올린 특유의 보잉 덕에 바로크 필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1악장) 신기하다. 그냥 줄일 뿐인데, 거기에 무엇을 대고 소리를 냈을 뿐인데, 이토록 육중한 울림이 퍼지다니. 이번엔 현악기의 매력이 가슴을 울렸다.(2악장) 뜨거운 여름을 고스란히 담았다. 긴박한 사운드 위로 바로크 선율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 틈 사이에 숨어있던 아련한 음들이 언뜻 언뜻 비치며 갑작스럽게 악장이 끝나는 묘미도 놀라웠다. 여름휴가 끝에 찾아오는 아쉬움이다.(3악장)

얼핏 봄 1악장이 오버랩되는 ‘가을’ 1악장이 시작됐다. 봄보다는 훨씬 활기찬 모습이 계속되는가 싶었지만, 중간에 얼굴 표정이 갑자기 바뀌면서 가을날의 애상을 쏟아냈다. 멜랑콜리한 분위기로의 느닷없는 전환에 갸우뚱했지만, 하프 소리에 맞춰 흐르는 한수진의 섬세한 바이올린은 어느새 ‘고막여친’이 됐다. 2악장은 쳄발로가 열일을 했다. 3분 정도의 러닝타임을 지배하며 비애감 감도는 비장함을 연출했다. 결국 비극으로 끝맺음하는 멜로드라마의 주제음악 같았다. 3악장은 계속 똑같은 음이 되풀이되면서 1분30초 정도에서 스르륵 끝났다. 가을날도 이렇게 덧없이 지나가는 시즌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와~ 함성이 쏟아졌다. 한수진은 각 악기 군의 수석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퍼펙트 클로징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다. 마이크를 잡았다. “시간 관계상 사계 중 ‘겨울’ 연주를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앙코르로 2악장만 들려줄게요”라고 말했다. 가수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에도 삽입돼 익숙한 선율이다. 지금의 계절에 딱 맞는 안성맞춤 앙코르다. 몇 차례의 커튼콜에도 빅수 소리가 멈추지 않자 지휘자와 눈빛을 교환한 한수진은 한 번 더 ‘여름’ 3악장을 들려줬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7일 열린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에서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에스에이치아트앤클래식 제공


이에 앞서 한수진은 1부에서 영국 국민주의 작곡가 본 윌리엄스의 ‘종달새의 비상’을 선사했다. 영국 시인 조지 매러디스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작곡가는 날아오르는 종달새의 모습을 관찰하며 떠오르는 악상을 담았다. 처음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듀오 버전으로 선보였으나 후에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다시 편곡됐다.

한수진은 1666년산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자유분방한 리듬과 민요조의 선율을 풀어나가며 물기 잔뜩 머금은 풍경화를 그렸다. 처음과 중간에 등장한 호른 선율도 예뻤다. 종달새의 비상은 피겨 여왕 김연아가 미끄러지듯 빙판을 누비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김연아는 2006·2007시즌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프리 부문 배경음악으로 이 음악을 사용해, 한국에 널리 알리는데 한몫했다. 한수진의 바이올린 소리는 마지막에 공중을 빙빙 돌고는 아득히 날아갔다. 음악은 끝났지만 한수진도 관객도 ‘얼음’이 돼 여운을 즐겼다.

음악평론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리컴포즈드 사계는 MR 위에 바이올린만 라이브 같았던 기존 연주자들의 이미지와는 달리 전체가 싱싱한 실황으로 녹아들어갔다”며 “루핑기법의 반복적인 연주는 싸늘하게 도회적이고 현대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희미하게 여울지는 현의 하모니스, 신디사이저음을 연상시키는 하프 등이 인상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7일 열린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에서 막스 리히터의 ‘리컴포즈드 사계’를 연주한 뒤 지휘자 아드리엘 김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에스에이치아트앤클래식 제공


이날 공연의 전체 타이틀은 ‘브리티시 오리지널(British Original)’이다. 한수진은 ‘영국파’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유학을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두 살 때 가족 모두 영국으로 이주했다. 세살 때 바이올린을 처음 잡았지만 곧 중단하고 대신 5세 때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여덟 살에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모두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유전의 힘이 어디 가겠는가. 8개월 만에 런던의 소수 정예 영재 음악학교인 예후디 메뉴힌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악보를 처음 본 상태에서 연습하지 않고 곧바로 연주하는 초견(初見) 테스트를 봤다. 연주 중간에 음악을 멈췄다.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감독관이 “눈으로 읽어보고 다시 해보라”고 말을 건넸다. 힘이 됐다. 끝까지 연주할 수 있었다. 음악을 분석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초견에서 나타나기 마련인데, 한수진은 “아마 그런 잠재력을 보고 뽑아준 것 같다”고 셀프 진단했다.

그 후 퍼셀 음악원, 옥스퍼드 대학, 영국 왕립음악원, 크론베르크 아카데미 국제 솔로 연주자 과정을 거치며 세계적 연주자로 우뚝 섰다. 15세에 5년마다 열리는 세계적 권위의 비에니아프스키 국제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사상 최연소’ 입상했다. 2등 수상과 함께 음악평론가상, 폴란드 방송 청취자상 등 7개의 부상을 받으며 샛별 탄생을 알렸다.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참가 비하인드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최연소 참가자로 이슈가 됐어요. 근데 문제가 생겼죠. 저를 아끼는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장례 추모 연주와 콩쿠르 일정이 겹쳤어요. 은사님 추모가 우선이었기에 주최 측에 메일을 보냈어요. ‘만약 순번이 앞에 배정되면 참가를 포기하겠다’고. 다행스럽게도 주최 측의 배려로 마지막 날에 연주할 수 있게 됐어요. 은사님 추모도 하고 좋은 성적도 거두어 감사한 일이죠.”

그는 선천적으로 왼쪽 귀가 안들린다. 엄마도 왼쪽 귀가 안들린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네 살 때 학교 준비물을 자꾸 빠뜨리고 오지 않자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알았다. “베토벤처럼 중간에 안들렸다면 충격이 컸을 텐데 처음부터 그랬기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다.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라며 긍정 마인드를 보여줬다.

한수진은 새해를 맞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영국 클래식의 찐매력을 소개하는 특별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브리티시 오리지널’을 준비했다. 영국 정서와 문화의 색채를 잘 이해하는 그가 오랫동안 품었던 꿈을 실현한 셈이다. 더욱이 자신이 론칭한 클래식 음악 기획사 에스에이치아트앤클래식(SH Arts & Classic)‘의 첫 공연이라 의미도 깊었다.

공연에 앞서 콜린 크룩스 주한영국대사가 유창한 한국어로 “제가 자란 영국의 클래식 음악을 함께 나누게 되어 기쁘다”라며 “기억에 남는 저녁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해 분위기를 돋웠다.

지휘자 아드리엘 김이 이끄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이 7일 열린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에서 에릭 코츠의 ‘런던 모음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모든 곡을 영국과 관련이 있는 작품으로 골랐다. 아드리엘 김과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은 첫 곡으로 요제프 하이든의 교향곡 92번 ‘옥스퍼드’ 피날레 악장을 연주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하이든이 그 답례로 작곡했기 때문에 ‘옥스퍼드’라는 애칭이 붙었다. 4악장 프레스토는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대조를 통한 긴장감과 치밀한 대위법이 촘촘하게 엮여있다. 밝고 명랑하고 쾌활했다. 완성도 있는 조형미와 특유의 색채감을 잘 표현했다.

다음 곡은 14개의 변주로 구성된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각 변주곡은 엘가의 지인을 비롯해 다양한 인물들을 음악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중 8변주와 9변주를 연주했다. 8변주 ‘W.N.’은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해 들어간 저택의 여주인 위니프레도 노버리를 그렸다. 엘가는 그가 사는 집안의 분위기에 매료돼 종종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9변주 ‘님로드’는 엘가와 가장 각별했던 친구인 출판업자 아우구스투 예거를 담았다. 님로드(Nimrod)는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 ‘니므롯’을 말한다. 노아의 증손자인 니므롯은 ‘힘 센 장사’며 ‘용맹한 사냥꾼’이다. 독일 출신인 예거의 성이 독일어로 ‘사냥꾼(Jäger)’을 말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사냥꾼으로 나오는 니므롯(님로드)을 갖다 붙였다. 느린 템포의 장중한 음악은 숙연함을 자아냈다. 추모곡과 앙코르곡으로도 자주 연주된다.

본 윌리엄스는 16세기 무렵부터 애창됐던 영국 전통민요 ‘푸른 옷소매(그린 슬리브스)’의 선율을 바탕으로 관현악곡을 만들었다. 그게 ‘푸른 옷소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이다. 2021년 해외 유수의 관현악단에서 활동한 젊은 예술인을 주축으로 설립된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은 살짝 한국적 정서가 감도는 이 곡을 더욱 정감 있게 연주했다. 하프와 플루트의 도입부를 거쳐 현악기들이 덩치를 키웠고, 중간을 지나면서 다시 플루트와 하프가 소리를 주고받은 뒤 현악기들이 다시 소리를 이어갔다.

지휘자 아드리엘 김이 이끄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이 7일 열린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에서 에릭 코츠의 ‘런던 모음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아드리엘 김과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에릭 코츠의 ‘런던 모음곡’. 국내 초연이다. 에릭 코츠는 영국 경음악(British Light Music)의 부흥을 이끈 주인공이다. 1933년에 완성됐는데 수도 런던의 대표적 명소 3곳의 모습을 담고 있다. 1악장 ‘코벤트가든’은 “오늘 오페라 뭘 볼까”라며 살짝 들뜬 마음을 탬버린, 트라이앵글, 심벌즈 등의 타악기가 잘 살려냈다. 2악장 ‘웨스트민스터’는 처음에 플루트와 하프가 리드하는 가운데 구슬픈 듯 애절한 듯 이어진 바이올린이 귓전을 맴돌았다. 3악장 ‘나이츠브릿지’는 BBC라디오의 테마음악으로 쓰이며 선풍적 인기를 누렸고, 현재까지도 에릭 코츠의 대표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후반부 모터 달린 듯한 팀파니의 거침없는 연주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모든 음악이 명료하게 잘 들려 좋았다. 심각하지도 무겁지도 않아서 편했다. 적당한 무게와 크기였다. 애써 주제와 의미를 찾지 않고, 그냥 코벤트가든과 웨스트민스터와 나이츠브릿지를 걸었다. 어린 시절 ‘경음악 모음곡’이라고 적혀있던 추억의 카세트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다. 앙코르도 역시 영국스러운 ‘대니 보이’. 영국 변호사 겸 작가였던 프레데릭 웨덜리가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런던데리의 노래’라는 곡에 가사를 붙인 곡이다.

류태형 평론가는 “런던 모음곡은 이날 공연의 발견이었다. 선이 굵고 따뜻하고 포근한 영국적인 관현악이 돋보였다. 영국 음악의 매력에 빠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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