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아우구스틴 하델리히(1984년생)가 무대에 섰다. 부모는 독일인이고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독일과 미국 시민권자다. 다섯 살에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했고 일곱 살에 협연 연주회를 열었던 음악영재다. 열다섯 살에 끔찍한 화재사고를 당했다. 수차례에 걸쳐 얼굴과 상반신 피부 이식수술을 받았다. 왼팔은 괜찮았지만 오른팔은 계속 물리치료를 받아야했다. 의사는 다시 연주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겉으로 드러난 깊은 상처보다 바이올린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청천벽력이었다.
하지만 ‘포기는 배추 셀 때만 쓰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초인적 힘으로 일어섰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하고 열여덟 살에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2006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LA필하모닉,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뉴욕필하모닉과의 첫 연주는 모두 대타로 이루어졌다. 그냥 행운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어마어마한 제안을 오케이할 수 있도록 평소 준비된 상태를 유지했기에 가능했다.
26일 롯데콘서트홀. 클래식 음악 온라인 매거진 ‘바흐트랙’이 2023년 가장 바빴던 바이올린 연주자로 꼽은 아우구스틴 하델리히가 한국팬을 만났다. 유카페카 사라스테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호흡을 맞춰 장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Op.47)’를 들려줬다. 25일에도 똑같은 프로그램을 연주했다.
하델리히는 서울시향이 발행하는 ‘SPO’ 4월호에서 이 곡에 대해 “색채, 질감, 성격이 모두 풍성하며 바이올린 작품들 가운데 독보적이다”라며 “작곡가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형식인 관현악적 교향시와 낭만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을 하나의 작품으로 결합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각 악장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1악장은 음악적으로 묘사된 들쭉날쭉한 절벽, 안개 낀 숲과 서사시적 투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도입부의 바이올린 선율이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인간을 표현한 주인공 같아요. 안개 같은 관현악적 텍스처 위를 떠가다가 솟구치죠.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항하며 싸웁니다. 듣는 즉시 이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사시임을 알게 됩니다. 느린 악장은 치밀하고 따스합니다. 우리는 실내로 옮겨와 자연의 폭력적인 힘으로부터 보호받습니다. 주제는 천천히 팽창합니다. 느린 속도지만 전진을 계속하는 내면의 박동감과 함께요. 마지막 악장은 비르투오소적인 불꽃같은 기교로 가득 찬 거친 질주입니다. 저역 현은 말 타는 듯한 리듬을 새기고 팀파니는 그와 대조되는 리듬을 연주합니다. 덜컥대는 감촉을 자아냅니다. 우아하게 일제히 움직이는 게 아니라 빠른 속도로 마구 뛰는 전체 무리처럼요.”
스칸디나비아의 안개를 연상케 하는 현악기군의 조용한 트레몰로를 타고 하델리히의 바이올린 독주가 우아하면서도 냉기 감도는 주제를 연주하며 1악장이 시작됐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애수와 엄청난 격정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중간에 등장한 카덴차는 일반적인 카덴차에 비해 훨씬 악상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전체 곡에 잘 녹아들었다. 하델리히는 뽐내지 않았다. 자신이 계획한 구상을 충실히 따르며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2악장은 차이콥스키를 방불케 할 정도로 낭만적 사운드가 펼쳐졌다. 매우 서정적인 바이올린의 주제 선율은 풍부한 감성이 꿈틀거렸다. 관현악 위로 자신의 환상을 자유롭게 펼쳐 나갔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동안에는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리듬을 타기도 했다.
3악장은 뚜렷한 리듬과 민속풍 선율 때문에 다분히 춤곡처럼 들렸다. 활기와 추진력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바이올린 독주가 관현악과 효과적으로 맞물리면서도 화려한 기교를 펼칠 수 있도록 적절히 안배했다.
하델리히의 연주는 하나씩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폭발적 소리보다는 점점 그라데이션으로 색채가 짙어졌다가 적절한 포인트에서 터지는 묘미를 보여줬다.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협연자는 일종의 손님이다. 하지만 서울시향에게 하델리히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다. 한 식구나 다름없다. 2022년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로 활동했다. 모차르트 협주곡 2번, 아데스 ‘동심원의 길’, 차이콥스키 협주곡과 ‘피렌체의 추억’을 서울시향과 함께했다. 그는 “당시 한국에 있을 때 생일을 맞이했는데, 실내악 공연 직후 몇몇 연주가들이 생일 축하곡을 연주해 줘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기분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연주했으리라.
앙코르 두곡은 과감한 선택이었다. 미국 컨트리 가수 자니 캐시의 ‘Orange Blossom Special’과 영화 ‘여인의 향기’에 삽입돼 더 유명해진 카를로스 가르델의 탱고 ‘Por Una Cabeza’를 들려줬다. 그리고 하델리히는 주세페 과르넬리가 1744년 제작한 바이올린을 메고 들어와 객석에서 2부 공연을 감상했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시벨리우스 협주곡에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아주 드라마틱한 포인트가 될 만한 부분을 공략하기 보다는 작품 전체를 꼼꼼하게 바라봤다”라며 “힘껏 내지르며 극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어렵지만, 한음한음 꾹꾹 누르면서 혹은 나긋나긋하게 노래하며 완주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끝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텐션을 유지해야 하고 그 긴 시간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주가 요즘 얼마나 귀한지 잘 알고 있어서 연주자의 위대함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앙코르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절제된 음악보다는 발산하는 음악들이었다. 첫 번째 앙코르를 연주할 땐 그 많은 소리를 전달하는 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두 번째 앙코르가 연주되는 순간에는 웨인 린 부악장이 가장 부러웠다. 그 자리에서 이걸 직관하다니”라고 적었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도 찬사를 보냈다. “하델리히의 연주는 차원이 다른 연주였다. 정확하면서도 따듯했다”라며 “첫 앙코르는 하모니카 소리까지 내는 듯 기교적이면서 흥겨웠고, 두 번째 앙코르는 익숙한 곡이었지만 왠지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1956년생)는 지난해부터 헬싱키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 겸 예술감독을 맡아 조국 핀란드의 청중을 만나고 있다. 2~3년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서울시향을 객원지휘하는 그는 이번에 카를 닐센의 ‘교향곡 5번(Op.50, FS.97)’을 연주했다. 이 곡의 특징을 짚어줬다.
“저는 닐센이 음악적 동기면에서 브람스와 말러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브람스는 표제음악 작곡가가 전혀 아니었고 말러는 일종의 계획적인 작곡을 했죠. 사람들에게 알려진 요소를 사용했습니다. 닐센은 교향곡 5번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감정, 그러니까 아마도 작은 마을이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이 곡은 두 개의 악장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악장에서 군대의 작은북과 행진곡의 울림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의 뒤에 오는 기쁨 같은 2악장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말러와의 연결고리라고 봅니다. 교향악적인 소재지만 이러한 계획에 따른 음악의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악장은 비올라의 희미한 트레몰로 음형이 전반부를 지배했다. 이어 바순이 약간 어둡고 신비로운 주제를 연주했다. 이윽고 스네어 드럼의 위협적인 연주와 함께 작곡가가 ‘악의 동기’라고 부른 모티브가 등장한다. 심벌즈, 트라이앵글, 탬버린, 첼레스타 등이 가세하며 독특한 선율을 풀어냈다.
이 동기는 머잖아 잦아들고 악장의 후반부이자 사실상 느린 악장의 역할을 하는 ‘느리게 지나치지 않게’ 단락은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띤다. 연주 후반부에 드럼 연주자가 대열에서 이탈해 밖으로 나갔다. 출입문도 완전히 닫히지 않고 살짝 열어뒀다. ‘반다’였다. 무대 밖에서 연주하는 드럼과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클라리넷이 귀를 사로잡았다.
닐센은 2악장에서 ‘그림자와 빛의 분열, 악과 선의 투쟁 같은’ 근본적인 대립을 표현했다. 거칠고 격렬한 첫 단락 다음에는 다소 냉소적인 ‘극도로 빠르게’가 나타나며, ‘걷는 빠르기로 다소 고요하게’ 단락은 차분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지닌다. 마지막 단락인 ‘빠르게’에서는 악상이 점차 고조돼 웅장하고 격동적으로 마무리된다.
사라스테는 1부에서 덴마크의 국민 오페라로 꼽히는 닐센의 ‘가면무도회’ 서곡을 연주했다. 오페라에 등장하지 않는 악상들을 주된 주제로 삼은 이 곡을, 서울시향은 경쾌하면서도 화려한 소리로 잘 드러냈다.
허명현 평론가는 “지난해 일본에서 토시유키 카미오카와 요미우리 닛폰 심포니의 연주를 들었는데, 사라스텐과 서울시향의 연주가 훨씬 더 뛰어났다. 오늘의 음향효과들이 더 닐센 교향곡 원곡에 가까웠다. 앞으로 음반을 들을 때 오늘의 연주가 상상될 것 같다”고 적었다.
류태형 평론가도 “음반과는 비교가 안되는 스텍터클한 연주였다. 곳곳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비경을 선보이며 북구의 지휘자는 ‘내 전문’이라는 듯 자신감이 넘쳤다. 내일도 간다”라고 평가했다. 류 평론가는 25일과 26일 공연을 모두 다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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