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서울시향 살린 ‘슈퍼스타 대타’...힐러리 한 4일연속 똑같은 드레스 감동

손열음 대신해 긴급투입 ‘브람스 바이올린협주곡’ 연주
​​​​​​​협연 2번·리사이틀 2번 등 모두 네 차례 퍼펙트 공연

민은기 기자 승인 2024.05.13 16:40 | 최종 수정 2024.05.14 06:13 의견 0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9일 서울시향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뒤 얍 판 츠베덴 지휘자와 손을 잡고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8일 서울시립교향악단에 비상이 걸렸다. 오전에 리허설을 진행하던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인후통과 고열로 중간에 연주를 멈춘 것. 몸상태를 지켜봤지만 호전되지 않고 더 악화돼 결국 9일(롯데콘서트홀)과 10일(예술의전당) 예정된 협연에 나설 수 없게 됐다.

서울시향은 일단 홈페이지와 SNS 등에 이런 사실을 올리고 곧 대체 협연자를 공지하겠다고 알렸다. ‘손열음 티켓파워’ 덕에 이틀 공연 모두 일찌감치 매진됐는데, 오후 늦게 하차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부 관객은 티켓을 환불하기도 했다.

속이 바싹 탔다. 식은땀이 흘렀다. 레이더를 총가동해 백방으로 새로운 협연자를 찾아 나섰다. 한줄기 빛이 보였다. 마침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11일(예술의전당)과 12일(남한산성아트홀)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해플리거와 듀오 리사이틀을 위해 한국으로 오는 중이었다.

SOS를 쳤다. 오후 5시쯤 힐러리 한이 인천공항에 도착해 휴대폰을 켜니 ‘서울시향과 협연할 수 있느냐’는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바로 ‘오케이 답장’을 보냈다. 그는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이 뉴욕 필을 이끌 당시 상주음악가(2023~2024 시즌)로 활약했고, 또한 함께 세계투어를 하는 등 이미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다. 판 츠베덴이 직접 섭외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휘를 맡은 것을 보고 흔쾌히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인연은 이렇게 소중하다.

서울시향이 새 협연자로 힐러리 한을 결정했다고 알리자 놀랍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이거 실화냐” “섭외력 미쳤다” “바꿨더니 힐러리 한이라니” 등의 폭발적 댓글이 줄을 이었다. 힐러리 한은 자닌 얀선, 율리아 피셔와 함께 ‘21세기 3대 바이올린 여제’로 불린다. 평생 한 번 받아볼까 말까 한 그래미상을 세 번이나 품에 안은 아티스트다. 서둘러 티켓을 취소한 관객들 입장에선 땅을 칠 노릇이다.

힐러리 한의 등판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컴플리트 브람스(Complete Brahms)’가 됐다. 손열음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연주하려 했는데, 긴급 투입된 힐러리 한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골랐다. 올 시즌 그의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곡인데다, 리사이틀에서도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안성맞춤 선곡이었다. 거기에다 서울시향도 브람스 교향곡 2번을 준비했기 때문에 ‘올 브람스(All Brahms)’가 자연스럽게 완성됐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9일 서울시향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사한 뒤 앙코르를 연주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푸른 드레스를 입은 ‘슈퍼스타 대타’가 서울시향 무대에 올랐다. ‘꿩 대신 닭’이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꿩 대신 꿩’이었다. 살짝 더 큰 꿩이었다. 9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에 선 힐러러 한은 시원하게 한방을 터뜨리며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을 살렸다. 이렇게 친절하니 ‘얼음공주’라는 별명도 이제 굿바이할 때가 됐다. 리허설은 공연 당일 오후 3시 단 한차례였지만 베테랑들의 케미는 완벽했다. 월마다 발행하는 프로그램북 SPO를 새로 찍을수 없어, 삽지 형태로 끼워 넣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소개와 힐러리 한의 프로필도 정겨웠다. 서울시향 직원들의 애씀이 한눈에 보였다.

브람스가 자신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한 것은 1878년 여름, 오스트리아 남부의 휴양지 푀르트샤흐에서였다. 이곳은 그가 한해 전 교향곡 2번 D장조를 작곡했던 곳이기도 했다. 드넓게 펼쳐진 뵈르트 호수와 그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친 산봉우리들, 수려한 자연경관과 여유로운 분위기를 간직한 그곳을 브람스는 “많은 선율이 떠다니므로 그것을 밟지 않으려면 매우 조심해야 하는 곳”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음악 영감을 샘솟게 하는 핫플레이스였다.

또한 1878년은 브람스가 생애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그 해 봄, 브람스는 로마와 나폴리를 중심으로 각지를 돌아보며 눈부신 풍광과 찬란한 문물에서 신선한 자극과 풍부한 영감을 받았다. 나아가 인생과 예술의 새로운 전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체험은 자연히 그 직후에 쓴 바이올린 협주곡에 투영됐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9일 서울시향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힐러리 한은 자기 파트가 없을땐 오른쪽 겨드랑이에 바이올린을 낀 채 서울시향 연주자들의 음악을 충분히 느꼈다. 선율에 맞춰 몸과 고개를 살짝살짝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오보에, 플루트 등의 관악 파트가 흐를 때는 뒤를 돌아 연주자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판 츠베덴 감독과도 수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음을 만들어 나갔다. 월클의 여유가 넘쳤다.

1악장은 장대했다. 어느덧 중년에 이른 브람스의 인생에 관한 통찰이 엿보이는 악장이다. 명확한 소나타 형식의 논리 속에서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가 교차하고, 끝없이 세파를 헤쳐 나가며 이상을 향해 전진하는 어떤 영웅의 투쟁과 고뇌, 휴식과 사유가 때로는 강렬한 드라마로, 때로는 유유한 파노라마로 절묘하게 변화하며 펼쳐졌다. 힐러리 한은 과장된 제스처 대신에 단아한 몸짓을 드러냈다. 카덴차에서도 현란함을 뽐내기 보다는 온전히 음악 그 자체에만 집중했다. 기교 대신에 담백함과 깔끔함으로 승부했다. 반찬이 없어도 밥 그 자체로만으로 충분히 맛있는 흰쌀밥이었다.

브람스는 2악장을 ‘연약한 아다지오’로 불렀다. 이 느린 악장은 따사로운 햇살과 은은한 목가적 정취로 가득했다. 꿈결 같은 오보에의 서주 선율이 아련한 애상을 자아내고, 마치 벨칸토 아리아처럼 흐르는 힐러히 한의 바이올린 선율이 섬세와 중후, 온화와 격정을 오가며 다양한 정서의 스펙트럼을 만들었다. 본질은 그대로 유지한 채 그 형과 질만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녹아 들었다.

아카타로 이어진 3악장은 브람스 특유의 헝가리풍 피날레다. 집시풍의 경쾌하고 자극적인 악상들이 어우러지면서 흥미진진한 흐름을 이어갔다. 터키 행진곡풍으로 시작되는 코다는 절묘한 리듬의 유희와 유머러스한 아이디어로 짜릿한 흥분과 쾌감을 자아내며 마무리됐다.

힐러리 한은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사라방드를 앙코르로 선사했다.

판 츠베덴은 2026년부터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도 겸임할 예정이다. 그 때문인지 서울시향 객원 악장으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박지윤도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9일 서울시향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9일 서울시향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은기 기자


음악평론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브람스 음악을 듣다 보면 답답하고 무뚝뚝하고 형식적이고 의뭉스러운 때가 많다. 바이올린 협주곡도 평소 듣는 오이스트라흐, 느뵈, 하이페츠, 밀스타인 같은 초명연들조차 곡에 완전히 빠져들기보다는 굵직한 형식 때문에 문밖에서 서성일 때가 있다”라며 “그러나 힐러리 한의 브람스 협주곡 실연은 이 선입견을 완전히 부숴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음도 허투루 들리는 게 없었다. 모든 음들이 설득력으로 무장하고 정연하게, 호소력 있게, 때로는 다정하게 귓가에 들어왔다. 기억하고 있는 계속 먹고 싶은 어떤 맛과 닮아있는, 그런 음색을 바이올린이 내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판 츠베덴이 리드하는 서울시향의 굽이치는 반주 속에서 그의 바이올린은 깊은 심해와 흰 구름 뜬 창공까지 엄청난 심리적 거리를 다이내믹하게 오갔다. 지극히 짧은 시간에 무대에 서야 했던 드라마틱한 상황 속에서 그는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다. 존경할만한 점은 이렇게 아티스트에게도 찾을 수 있다. 토요일 리사이틀에서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로 그를 계속 볼 수 있다는 게 무척 기쁘다”고 덧붙였다.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9일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9일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순진하고 낙천적인 소품으로...푸른 하늘과 졸졸 흐르는 시냇물, 햇빛과 서늘한 그늘...사실 교향곡이 아니라 그저 신포니에타.” “견디기 힘들 정도의 멜랑콜리한 작품이오. 이보다 더 슬픈 곡은 쓴 적이 없소.”

1877년 여름, 푀르트샤흐에서 불과 4개월만에 교향곡 2번을 완성한 브람스는 지인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스스로 작품의 본질을 잘 짚어냈다. 당대의 음악가와 청중은 이 교향곡을 ‘브람스의 전원 교향곡’으로 불렀다. 하지만 그의 전원에는 곳곳에 어두운 그늘과 먹구름이 있다. 판 츠베덴과 서울시향은 2부에서 교향곡 2번을 연주했다.

1악장은 한적한 시골 동네의 병아리를 꾸벅꾸벅 졸게 만드는 봄볕 같은 느낌이었다. 시작 부분에서 첼로와 베이스가 연주하는 세 음표는 전곡의 핵심으로, 이 단순한 음형은 모습을 바꿔가며 계속 등장했다. 호른과 바순이 낭만적인 선율을 노래하면 곧 다른 악기들이 가세해 강렬한 포르테에 도달하고, 자장가를 닮은 2주제가 나온다. 다채로운 악상은 코다에서 정점에 달하는데, 트럼본과 튜바는 목가적 풍경을 위협하는 먹구름처럼 묵직하고 애상적인 색채를 더했다.

2악장은 모란과 작약 활짝 핀 봄날의 오후였다. 브람스의 네 교향곡 중 가장 긴 느린 악장이다. 한숨을 쉬는 듯한 도입부의 첼로 선율은 영감에 차 있지만 불안정하며, 장조와 단조를 넘나드는 조성과 모호한 박자는 빛과 어둠의 교차를 표현하는 듯하다.

3악장은 일종의 인터메조(간주곡)다. 작곡가는 도입부에서 오보에가 예의 세 음표를 뒤집어서 연주하도록 하고, 다시 트리오에서 이를 변주하는 정교한 구성을 선보였다. 처음에 렌들러에 가까웠던 리듬은 두 박자의 갤럽을 거쳐 빠른 왈츠로 변신했다.

4악장에서 브람스는 다시 첫 주제를 활용해 활기찬 하이든풍의 음악을 끌어냈다. 재현부에서는 그때까지 아꼈던 트럼본이 등장해 기쁨과 환희를 표출하며 피날레로 이끌었다. 밝고 시끌벅적한 마지막 악장에 관해서는 자연스러운 극적 결론이라는 견해와 극장식의 연출이라는 견해가 공존하는데, 판단은 각자의 몫이리라.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하는 서울시향이 9일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서울시향은 1부에서 니나 세이커의 ‘루미나’를 아시아 초연했다. 인도계 이민자의 딸인 그는 자신의 음악을 ‘팔락 파니르(인도 채식요리)와 매시트포테이토(으깬 감자)가 함께 차려진 식탁처럼 다양한 요소가 혼합된 하이브리드’라고 말한다.

서울시향은 작곡가의 의도대로 빛과 어둠, 그리고 그 중간의 흐릿함을 잘 담아냈다. 조밀한 화성, 그리고 하나의 음표를 여러 악기가 다른 억양으로 연주하면서 생기는 미분음을 통해 안개처럼 모호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그림자처럼 흐릿한 음향은 빛을 상징하는 밝고 예리한 음향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뤘다.

류태형 평론가는 브람스 교향곡 2번에도 박수를 보냈다. “박지윤 악장을 비롯한 현악군의 두꺼우면서 시린 음색에 깜짝 놀랐다. 이미성 오보에 수석을 비롯한 목관군, 그 외 금관과 타악도 발군이었다”고 말했다.

<백브리핑> 나흘 연속 공연...졸지에 ‘푸른 드레스 단벌숙녀’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과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해플리거가 11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과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해플리거가 11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이쯤되면 에너자이저 힐러리 한이다. 이틀(9일과 10일) 동안 서울시향과 협연을 마친 힐러리 한은 쉴 틈도 없이 다시 이틀 동안(11일과 12일) 리사이틀 무대에 올랐다. 나흘 연속 공연이다. 대단한 체력이다.

그는 11일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해플리거와 브람스 듀오 리사이틀로 한국 관객을 만났다. 브람스 소나타 1, 2, 3번 전곡을 들려줬다. 예상치못한 서울시향과의 협연 때문에 힐러리 한은 나흘 내내 푸른 드레스를 입었다. 원래 예정이 이틀 공연이었기 때문에 드레스를 한벌만 준비한 것. 졸지에 ‘단벌숙녀’가 됐지만 한국 관객에겐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했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같은 브람스였지만 서울시향과의 긴장감 넘치는 협연과는 또 다르게 힐러리 한의 속내를 표현한 멋진 연주였다”며 “비 오는 날이라 더 운치 있었던 브람스 소나타 1번 ‘비의 노래’, 우아하고 정감이 깃든 소나타 2번, 애절하게 다가온 소나타 3번은 한 곡의 다른 악장들처럼 착착 정리되며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무엇보다 힐러리 한의 바이올린 한 대가 콘서트홀을 가득 채우는 모습은 연주를 들으면서도 잘 믿기지 않았다. 잘 보이는 게 있는 것처럼 잘 들리는 게 있다. 명곡은 잘 들리게 하는 사람들로 인해 그 명성을 얻는다. 누가 연주하는지가 이렇게 중요하다. 해플리거의 반주도 인상적이었다. 함께 걷는 사람이 속도를 맞추고 이야기를 건네듯 두런두런 도란도란 브람스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했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