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지난 3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백건우와 모차르트-프로그램Ⅱ’에서 연주하고 있다. ⓒ판테온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모차르트의 유명한 곡도 있었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선곡했다. 익숙한 곡에서는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해줬고 낯선 곡에서는 다른 모습을 찾게 해줬다. 작곡된 시기가 서로 다른 곡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하나의 큰 이야기로 만들었다. 거장의 엑설런트 스킬로 ‘모차르트의 음악 초상화’가 완성됐다. 신동의 밝음과 어둠을 고루 드러낸 덕에 음영과 윤곽이 뚜렷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지난 3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생애 첫 모차르트 음반 발매를 기념해 ‘백건우와 모차르트-프로그램Ⅱ’를 열었다. 지난해에 이은 두 번째 무대다.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한 공연은 오후 9시 전에 끝났다. 1부에서 3곡, 2부에서 4곡을 들려줬다. 곡을 마칠 때 몸을 풀지 않고 바로 다음 곡을 연주했다. 박수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집중력 있게 공연을 이끌어 가려는 의도다. 앙코르 없이 1시간 30분 동안 임팩트 있게 진행됐다.
1부 첫 곡은 ‘피아노 소나타 16번 C장조(K.545)’.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가장 많이 흘러 나왔던 바로 그 ‘쉬운 소나타’다. 1악장은 한 번만 들어도 누구나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주제로 시작됐다. 곧이어 경쾌하고 기분 좋은 음계와 아르페지오로 발전했다. 오른손과 왼손이 대화하듯 재잘거리는 모습이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기쁨의 감정이 넘실댄다. 2악장은 화사한 슬픔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모차르트 특유의 멜랑콜리가 담겨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살짝 고개를 내미는 아름다움이 감칠맛을 자극했다. 짧은 3악장은 특별하지 않지만 모차르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간결함과 웃음이 배어 있다. 탁탁탁 큰 소리에 맞춰 흐르는 선율은 은근 중독성 있다.
이어 ‘론도 a단조(K.511)’가 흘렀다. 모차르트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다. ‘건반의 구도자’는 어두운 내면적 감정을 다채롭게 펼쳐냈다. 섬세한 꾸밈음 사용과 놀라운 반음계 사용을 잘 드러내며 터치했다. 소나타 16번과 마찬가지로 왼손을 누르면 순수가 솟았고, 오른손을 누르면 슬픔이 흘렀다. 앞모습은 당당했으나 뒷모습은 한없이 쓸쓸한 모차르트의 본질을 그려냈다.
모차르트는 18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다. ‘피아노 소나타 2번 F장조(K.280)’는 초기 곡이지만 독특했다. 오른손과 왼손이 마치 두 명의 서로 다른 음악가들이 대화를 나누는 실내악처럼 들렸고(1악장), 시칠리아노 리듬을 이용한 느린 악장에 흐르는 슬픔은 비극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2악장). 빠른 3악장에 등장하는 두 개의 주제는 모두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흐르는 듯한 리듬은 기쁨을 더욱 반짝이게 만들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지난 3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백건우와 모차르트-프로그램Ⅱ’에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판테온 제공
2부는 ‘글래스 하모니카를 위한 아다지오 C장조(K.356/617a)’로 시작했다. 매우 단순한 선율에 약간의 반음계가 사용됐다. 마치 생의 마지막을 느끼지만, 건강이 악화된 비참한 현실에서도 어린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모차르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단지 몇 개의 음만으로도 순수함과 투명함이 분수처럼 샘솟는 음악을 쓸 수 있는 신비를 목격한다.
이 작품에는 두 개의 K번호가 붙어 있다. 모차르트 작품 리스트를 작성한 루트비히 폰 쾨헬이 이 곡은 1781년 혹은 1782년에 작곡했다고 생각해 K.356를 붙였다. 하지만 최근 이 곡은 모차르트 생애 마지막 해인 1791년에 작곡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래서 617a가 새로 붙었다.
‘작은 장례식 행진곡 c단조(K.453a)’는 2분 정도의 짧은 곡이다. 모차르트가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친 제자 바바라 플로이어의 악보집에서 발견됐다. 누구의 장례식이었을까? 이 곡에는 ‘대위법 대가의 장송곡’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모차르트가 플로이어에게 작곡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이 곡을 쓰면서, 유머 넘치게 이런 제목을 단 것으로 추측된다. 장난꾸러기 모차르트다.
‘피아노 소나타 10번 C장조(K.330)’는 변화무쌍했다. 1악장은 즐겁고 명랑하지만, 동시에 평온하면서도 온화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줬다.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는 슬픔을 안으로 삼켰다. 3악장은 즐거움과 기쁨을 더욱 부풀어 오르게 했다. 모두 27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어법이 3악장에 압축돼 있다. 호로비츠, 짐머만 등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소나타를 즐겨 연주했고, 지금도 연주하고 있다.
피날레 곡은 모차르트 작품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심오한 감정을 담고 있는 걸작 중 하나인 ‘환상곡 c단조(K.475)’. 다섯 개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한쪽 편에는 극적이고, 어둡고, 엄격하고, 무거운 것이 포진했다. 또 다른 편에는 부드럽고,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위치했다. 이 두 파트가 충돌을 일으키며 유려하게 흘렀다.(아다지오) 음악적 긴장감이 극대화됐다. 감정이 승화되면서 자유의 감정도 고개를 내민다.(알레그로)
안단티노 부분은 이전 부분의 강렬한 감정과는 대조적으로 평화롭고 차분하다. 폭풍우 뒤의 고요함이다. 피우 알레그로는 ‘환상곡 c단조’의 클라이맥스다. 음악적 밀도와 긴장감을 더하더니 차차 잠잠해진다. 하지만 불안정한 분노를 품은 듯한 화음의 연타가 교차하면서 절망의 감정이 심화된다. 다시 곡의 첫 부분에서 연주됐던 주제가 나오는 아다지오로 돌아갔다. 저음부분으로 가라앉았다가 매우 빠르고 격정적으로 마무리된다. 모차르트의 내면의 외침이다.
<백브리핑> 열 살에 데뷔...피아노와 함께 69년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지난 3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백건우와 모차르트-프로그램Ⅱ’에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판테온 제공
‘백건우와 모차르트-프로그램Ⅱ’는 공연기획사 판테온이 주최했다. 하얀색 표지의 깔끔한 프로그램북 안에 백건우의 프로필이 잘 정리돼 있다. ‘거장 백건우’가 걸어온 길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차원에서 정리해 본다.
<피아니스트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지 올해로 69년, 세계적인 권위의 콩쿠르에서 수차례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백건우.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매일 피아노 연습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곡에 도전하는 그를 사람들은 ‘건반 위의 구도자’라 부른다.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건우는 1956년 열 살의 나이에 김생려가 지휘하는 해군교향악단(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데뷔했다. 이듬해 자신의 이름을 건 연주회에서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을 한국 초연으로 선보여 큰 관심을 모았다.
15세에 콩쿠르 참가를 위해 처음 미국으로 건너가, 이후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러시아 피아니즘의 위대한 계보를 잇고 있는 로지나 레빈을 사사했다. 1969년 부조니 국제 콩쿠르에서 ‘장래가 기대되는 피아니스트’라는 심사평과 함께 금상을 수상한 백건우는 1971년 뉴욕 나움부르크 콩쿠르 우승이라는 값진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 뉴욕 링컨 센터 앨리스 툴리홀에서 독주회를 개최했고, 1972년에는 링컨 센터에서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 전곡을 연주하며 뉴욕타임스 등의 주요 매체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 1974년 런던 위그모어홀, 1975년 베를린 필하모니홀 등에서 독주회를 열었고 일로나 카보스, 빌헬름 켐프, 귀도 아고스티 같은 대가들을 사사하며 꾸준히 음악에 정진했다.
1987년 BBC 프롬스 폐막무대에 초청받아 BBC 심포니와 협연했고, 1991년 5월에는 폴란드 TV로 중계된 ‘프로코피예프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안토니 비트가 지휘하는 폴란드 국립 방송교향악단과 함께 프로코피예프의 5개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했다.
1992년 1월 스크랴빈 피아노 작품집으로 디아파종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집으로 디아파종상을 포함한 프랑스 3대 음반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2000년 데카 클래식과 계약을 맺은 백건우는 부조니 편곡의 바흐 오르간곡집을 시작으로 포레, 쇼팽 등 다양한 작품으로 음반을 발매했는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 전곡집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기념비적인 성과다. 2010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변주곡집을 발매했다.
2016년에는 60년 연주 인생의 동반자였던 관객들을 향한 감사의 뜻을 담아, 청중들의 사연과 신청곡을 공모로 선발해 연주하는 리사이틀 ‘백건우의 선물’을 선보였다.
2007년과 2017년, 8일 동안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 리사이틀 무대를 선보이며 뜨거운 성원을 받았고, 2019년 2월에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쇼팽 녹턴 전곡 음반을 발매하며 15개 도시에서 ‘백건우와 쇼팽’ 리사이틀 투어를 성료했다. 2020년에는 슈만 신보 발매와 함께 ‘백건우와 슈만’ 리사이틀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2022년에는 스페인 작곡가인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대표작 ‘고예스카스’를 담은 신보가 발매됐는데 발매에 앞서 고예스카스의 영감이 된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스페인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원에서 리사이틀을 선보이기도 했다. 2022년 9월,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발매된 음반과 전국 리사이틀 투어를 통해 한국 관객에게 그 만의 그라나도스-고예스카스를 소개했다.
2024년 5월 생애 첫 모차르트 앨범을 발매한 그는 이번 앨범 커버에 초등학생이 그린 자신의 자화상을 입혀 색다른 이슈를 만들어냈다. 국내 클래식 음악 앨범에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첫’ 행보다.
2024-25년 총 3개의 시리즈로 탄생한 백건우의 모차르트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2024년 17개의 전국 투어를 마치고 2025년 15여개의 전국 투어를 앞두고 있다.
예술적 업적을 인정받아 200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화 기사 훈장’을 수여받고 2023년 제6회 성정예술인상을 수상한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연주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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