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이 한국·스페인 수교 75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 1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임준희 작곡의 창작 오페라 ‘천생연분’을 공연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클래식비즈 노유경 박사(독일 쾰른대 출강)] 국립오페라단은 한국의 오페라 문화를 선도하며,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예술 실천으로 독보적인 미학 지평을 열어왔다. 단장 겸 예술감독 최상호는 한국 오페라의 세계화를 견인해온 중심인물로, 시대와 호흡하는 해석을 통해 국제적 신뢰를 쌓아왔다.
2025년, 국립오페라단은 임준희 작곡의 창작 오페라 ‘천생연분’으로 스페인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모누멘탈에 진출했다. 한국·스페인 수교 75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 18일 열린 이 공연은 단순한 해외 무대 진출을 넘어, 예술을 외교의 언어로 확장한 ‘사건’이다.
1500석 규모의 극장은 공연 당일 만석을 기록했으며, 임수석 주 스페인 대사 내외와 신재광 주 스페인 문화원장 등이 자리해 문화 외교의 무게를 더했다.
‘천생연분’은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를 바탕으로 이상우 대본, 임준희 작곡으로 200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됐고, 이후 7개국 해외 공연을 거치며 다듬어진 작품이다. 특히 2014년 수정본은 3막 8장 40곡 구성으로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해학을 담아냈고, 이번 마드리드 공연에서는 전통악기 없이도 연주 가능한 서양악기 편곡으로 한국적 정서를 절묘하게 상기시켰다.
이번 무대는 오페레타적 요소가 강조된 콘체르탄테 형식의 세미스테이지 오페라였다. 예산과 제작 현실을 고려한 선택이었으나, 오히려 음악과 인물 중심으로 깊은 감동을 선사하며 본질에 근접했다. 스페인 밀레니엄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차웅 지휘자의 세밀한 리더십, 예술감독 임재식이 이끌고 있는 스페인 밀레니엄합창단의 정확한 한국어 발음과 해석은 외국인 연주자들이 이 작품에 얼마나 깊이 몰입했는지를 증명했다.
국립오페라단이 한국·스페인 수교 75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 1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임준희 작곡의 창작 오페라 ‘천생연분’을 공연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서곡은 글로켄슈필의 투명한 소리로 시작돼 유쾌함을 예고했고 맹진사(바리톤 윤희섭), 이방(테너 강도호), 서향(소프라노 오예은), 이쁜이(소프라노 김효주), 몽완(테너 유신희), 김판서(바리톤 김원), 맹진사 부인(메조소프라노 김세린), 서동(바리톤 정제학) 등 인물들이 등장하며 각자의 정체성과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냈다.
태평소처럼 변주되는 트럼펫 선율, 그리고 ‘영상회상’을 변주한 혼례 장면의 선율은 동양적 시간성과 정서를 음악적으로 실현했다. 이색적 화음과 선율은 아라비아 타크심이나 마캄을 연상시키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로 그 순간, 청나라 유학을 다녀온 인물로 설정된 몽완이 등장하며 울려 퍼진 우드블록 리듬은 공기를 압도했고, 장면 전환의 강렬한 전조가 됐다.
‘천생연분’의 자유의지는 서양 철학, 특히 칸트가 말한 ‘자율적 이성에 기반한 도덕적 자유의지’와는 궤를 달리한다. 칸트의 자유는 인간이 외부 조건과 본능을 초월해 스스로 도덕법칙을 설정하는 힘에 기반하지만,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자유는 이성의 명령보다는 관계의 조율과 정서적 흐름 속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공동체를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틀어내는 ‘여백의 자유’다.
최상호 예술감독은 외국 관객이 “왜 두 커플이 바뀌는가”에 대해 깊이까지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단순한 커플 교환이 아니라, 한국적 질서 속에서 감정과 욕망이 조화롭게 스며드는 방식이며, 이는 한국형 자유의지의 미학적 형상화이기도 하다.
‘천생연분’은 신분을 위장하거나 정체성을 유예하는 서양 오페라들의 전통-‘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로엔그린’—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도, 긴장을 해학과 유머로 녹이며 한국적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한국 오페라가 국제 관객과 정서적으로 만나기 위한 탁월한 전략이다.
국립오페라단이 한국·스페인 수교 75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 1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임준희 작곡의 창작 오페라 ‘천생연분’을 공연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이 공연은 단순한 오페라의 해외 진출이 아니다. ‘천생연분’은 웃음으로 부조리를 건너는 한국적 미학으로, 고야가 화폭에 담았던 웃음 너머의 고통과 기묘하게 호응했다. 그리고 그 공명은 마드리드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맞닿으며 깊이를 더했다.
무대 위에서는 한국어로 노래가 흐르고, 관객의 눈에는 스페인어 자막이 펼쳐졌지만, 그 언어적 장벽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공연이 끝나자, 마드리드 테아트로 모누멘탈은 말 그대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기립박수는 끝날 줄을 몰랐고, 관객들은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를 그렸으며, 누군가는 “브라보!”를 넘어서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코레아!”를 외쳤다.
그 순간 극장은 더 이상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다. 천장이 열리는 듯한 해방감, 국적을 잊은 감정의 폭발, 예술이 이룬 완전한 공감의 현장. ‘천생연분’은 그 밤, 한국 오페라의 이름으로 마드리드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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