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김계영과 테너 이현재가 지난 9월 공연한 라벨라오페란의 콘서트 오페라 ‘라보엠’에서 연기하고 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1830년대의 파리, 어느 초라한 아파트의 다락방이다. 때는 12월 크리스마스 이브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창백한 얼굴의 미미가 초를 들고 들어오면서 이 방에서 촛불을 붙여가도 좋으냐고 묻는다. 친구들이 모두 나간 뒤 홀로 방에 있던 로돌프는 불을 빌려준다.

잠시 후, 미미는 집 열쇠를 떨어뜨렸다며 다시 들어온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미미의 촛불과 집안을 밝히는 촛불이 한꺼번에 꺼진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바닥을 훑으며 열쇠를 찾는다. 미미와 로돌프의 손이 부딪힌다. 찌릿 전기가 통한다. 로돌프의 ‘고의적 접촉’ 의혹도 든다.

미미가 “아!”하고 깜짝 놀라면서 손을 빼려고 하지만, 로돌프는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시만 쓰는 샌님인줄 알았는데 완전 직진남 로돌프다.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mina)’을 부르며 작업에 시동을 건다.

“오 그대의 손은 작고 차갑군요. 당신의 손을 따뜻하게 해 드리고 싶어요. 달빛이 참 좋군요. 저 달은 우리 곁에 있어요. 저는 시인이에요. 글을 쓰죠. 시가 저의 꿈과 미래와 상상 속에 찾아올 때, 제 영혼은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랍니다.”

‘로돌프 이현재’의 솔직한 자기소개에 ‘미미 김계영’의 마음도 누그러진다. 싫지 않은 표정이다. ‘내 이름은 미미(Si. Mi Chiamano Mimi)’로 화답하며 은근슬쩍 수작을 받아들이는 여우 본색을 드러낸다.

“네, 그래요. 사람들은 저를 미미라고 불러요. 하지만 진짜 이름은 루치아입니다, 저는 천에 수를 놓아요. 백합이나 장미를 수놓은 것은 큰 즐거움이에요. 저는 그런 달콤한 기쁨을 찾는 것과 사랑과 봄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해요.”

라벨라오페라단이 지난 9월 콘서트 오페라 ‘라보엠’을 공연하고 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소프라노 김계영과 테너 이현재가 1막에서부터 ‘심쿵 플러팅’을 펼치며 관객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라벨라오페라단이 지난 9월 1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애서 선보인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의 주역을 맡아 박수갈채를 받았다.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하는 2025년 서울대표예술축제 선정작으로 공연됐다.

소프라노와 테너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아리아에 이어 두 사람은 아름다운 이중창 ‘오 사랑스러운 아가씨(O Soave Fanciulla)’를 선사하며 고막여친·고막남친으로 변신했다. 난로에 불을 지피지 못해 방은 시베리아 한복판이고, 월세를 내지 못해 금방이라도 쫓겨나야 할 처지지만, 사랑마저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미미와 로돌프 커플의 노래 속에는 차가운 겨울을 뚫고 올라오는 푸릇푸릇 봄의 기운을 품고 있다.

이날 ‘라보엠’은 콘서트 오페라 형식으로 진행됐지만 정식 오페라 공연에 전혀 꿀리지 않았다. 무대장치와 영상·조명을 효과적으로 활용했고, 약 200여명의 출연진이 참여해 전막 오페라 공연에 버금가는 풍성함을 선사했다.

연출을 맡은 홍민정은 무대 왼쪽과 오른쪽에 계단식 구조물을 설치해 성악가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로 활용했다. 구조물 아래에 오케스트라를 배치해 단원들이 출연자와 관객 두 가지 역할을 맡도록 하는 센스를 보여줬다. 또한 벽에 영상을 비추어 단조로움을 해소하는 등 미니멀하면서도 집중도 높은 무대를 구현했다.

홍민정은 연출노트에서 밝힌 것처럼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노래가 꽁꽁 얼어붙은 겨울 끝에 닿아지기를, 그 끝에서 눈부신 청춘들이 눈부시게 꽃 피울 수 있도록 기도하는” 연출을 보여줬다.

라벨라오페라단이 지난 9월 콘서트 오페라 ‘라보엠’을 공연하고 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라벨라오페라단이 지난 9월 콘서트 오페라 ‘라보엠’을 공연하고 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지휘는 박해원이 맡아 만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안정적이고 깊이 있는 연주를 이끌었다. 또한 메트 오페라 합창단과 브릴란떼 어린이 합창단도 힘을 보탰다.

히트의 일등공신은 역시 젊은 주역 성악가들의 열연이었다. 미미 김계영과 로돌포 이현재는 뛰어난 기량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현실적 갈등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 큰 찬사를 받았다. 미미가 죽어가는 마지막 4막에서 ‘모두 떠났나요(Sono Andanti)’를 부를 때는 객석을 긴장과 침묵으로 이끌며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로돌프가 “미미~”를 외치며 새드엔딩이 최고조를 찍은 순간에는 관객 모두는 로돌프로 빙의하며 깊은 슬픔에 공감했다. 미미의 침대로 가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모습은 강렬한 스냅 사진이 되어 관객들 가슴에 박제됐다.

무제타 역의 소프라노 박현진은 극적 개성을 잘 살려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막 모무스 카페 장면에서 ‘나 홀로 길을 걸을 때면(Quando men vo)’를 부르는 모습에서 팜프파탈의 매력을 마음껏 뽐냈다. ‘무제타의 왈츠’는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의 애간장을 녹였다.

마르첼로 역의 바리톤 고병준은 풍성한 음색으로 무대를 채웠다. 콜리네 역의 베이스 양석진, 쇼나르 역의 베이스바리톤 우경식은 따뜻한 우정을 보여줬다. 베누아와 알친도르 역을 맡은 베이스 금교동은 코믹한 연기를 안정감 있게 소화했고, 피피뇰은 테너 추덕원이 맡았다.

라벨라오페라단이 지난 9월 콘서트 오페라 ‘라보엠’을 공연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이번 공연에서 특히 돋보인 것은 팀워크다. 출연 성악가 대부분이 ‘라벨라와 한솥밥’을 먹은 사이라서 더욱 끈끈한 힘을 발휘했다. 김계영은 제1회 라벨라 성악 콩쿠르 3위 입상자다. 또한 이현재를 비롯해 고병준, 양석진, 금교동, 추덕원 등은 라벨라오페라단의 인재 육성 프로그램인 ‘라벨라오페라스튜디오’를 통해 성장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3막 미미, 로돌포, 무제타, 마르첼로의 사중창 ‘정말 이별인가요(Dunque E Proprio Finita)’에서 보여준 4인 케미는 이들의 이런 오랫동안의 찰떡 호흡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공연을 본 관객들은 “완전히 빠져든 무대였다” “오랜만에 완성도 높은 작품을 감상했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