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헌정 충북도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단원들과 함께 ‘제1회 파안 박영희 현대음악제’ 개막공연에서 연주한 후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파안박영희현대음악제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충북도청 옆에서 청주향교로 올라가는 길(대성로 122번길)은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골목 곳곳에서 흑백사진을 닮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고풍스러운 길이다. 그 중간쯤에 복합문화공간 ‘아트센터 올리브(All-Live)’가 있다. ‘모두 다함께 잘 살자’라는 의미를 담아 이름 지었다.

지난해 8월 오픈한 올리브는 3층짜리 날렵한 건물이다. 2층에 갤러리가 있고 3층에는 아담한 사이즈의 콘서트홀(약 100석)이 있다. 빌딩의 주인은 권오성 대표다. 미국보석학회 공인감정사인 그의 본업은 G&G보석 대표다. 이 사무실도 2층 갤러리 옆에 위치하고 있다.

권오성 대표에게는 또 하나의 소중한 ‘부캐’가 있다. ‘청주하우스콘서트’ 공동대표 타이틀이다. 지난 2013년부터 김향숙 충북대 명예교수, 소프라노 박미경과 함께 단체를 이끌고 있다. 충북뿐만 아니라 서울 등 전국에서 활동하는 수준 높은 연주자를 초청해 꾸준하게 공연을 연다. 13년간 콘서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청주에도 클래식 전문 소공연장이 필요하다고 늘 생각했고, 결국 있는 돈 없는 돈 몽땅 털어 센터를 건립했다. 청주의 메디치 역할에 나선 셈이다.

음악평론가 나성인이 ‘제1회 파안 박영희 현대음악제’ 폐막음악회에서 박영희의 음악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파안박영희현대음악제 제공


10년 넘는 노하우가 쌓인 청주하우스콘서트가 최근 ‘일’을 저질렀다. 올리브에서 ‘제1회 파안 박영희 현대음악제’(10월 15일~24일)를 개최한 것. 통영에서 태어난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통영국제음악제가 시작된 것처럼, 이 음악제는 청주 출신의 세계적 작곡가 박영희(80)의 음악세계를 집중 탐구하는 축제다.

파안(琶案)은 ‘책상 위의 비파’라는 뜻으로, ‘늘 음을 생각하는 작곡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박영희는 한 인터뷰에서 “박씨 성이 워낙 흔해 다른 박씨들과 혼동될 것 같아 일종의 예명으로 생각한 게 ‘파안’이었다. 처음에는 ‘파안대소(破顏大笑)’의 ‘파안’이었다. 우연히 도올 김용옥 씨를 만나 파안의 글씨를 부탁했더니, ‘깨질 파(破)’가 좋지 않다며 대신 ‘비파 파(琶)’자로 바꿔 파안(琶案)이라고 써줬다”고 말했다. 그래서 독일에서 쓰는 공식이름은 ‘Younghi Pagh-Paan(영희 박-파안)’이 됐다.

박영희는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 청주시 남문로1가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가구골목이라고 불리는 옛 약전골목 근처다.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여중·고를 다녔다. 서울대 작곡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4년 독일로 건너가 학술교류처(DAAD)에서 장학생으로 유학했다.

1980년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현대음악 축제 ‘도나우에싱엔’에서 첫 관현악곡 ‘소리’가 위촉·초연되며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며 세계 현대음악 거장으로 우뚝 섰다.

브레멘 국립예술대학 작곡과 교수와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 2020년에는 여성 및 아시아계 최초로 베를린 예술대상을 받았다. 지난달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 무직페스트’에서는 박 작곡가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공동대표 세 사람(권오성·김향숙·박미경)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으로 착실하게 박영희 이름을 내건 음악제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도 멋지게 해내고 싶은 욕심은 있다. 이제 ‘1’이라는 넘버가 붙었으니 앞으로 ‘2’ ‘3’ ‘4’ ‘5’ 등 계속해서 숫자를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박영희 곡을 뼈대로 현대음악의 범주에 속하는 곡들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올해는 모두 다섯 개의 공연을 준비했고, 관객들을 거의 모두 채웠다.

바이올리니스트 겸 음악칼럼니스트 조윤범이 ‘제1회 파안 박영희 현대음악제’ 프리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파안박영희현대음악제 제공
클라리넷 백양지·첼로 윤석우·피아노 손지혜 앙상블은 박영희의 ‘은빛 현들Ⅱ’를 연주했다. ⓒ파안박영희현대음악제 제공


먼저 현대음악을 쉽게 감상하도록 돕기 위해 15일 프리콘서트(Pre Concert)를 열었다. 메인공연에 앞선 맛보기 공연이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변광섭 대표가 ’왜 박영희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이어 바이올리니스트 겸 음악칼럼니스트 조윤범이 피아니스트 김가람과 함께 ‘현대음악 맛 좀 봐라’라는 도발적 제목으로 토크 콘서트를 열었다.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중 행진곡, 쇤베르크 ‘세 개의 피아노 소품’ 중 3번, 메시앙 ‘새의 카탈로그 3번’ 중 네 번째 곡 ‘종달새 블루’를 연주한 뒤 관객과의 질의 응답 등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개막 공연 ‘별빛 속에서’(17일)로 본격적 막을 올렸다. 청주 출신 마에스트로 임헌정(충북도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충북도립교향악단 단원들이 앙상블로 참여했다. 박영희의 ‘아가’ ‘별빛 속에서’를 비롯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극 ‘병사 이야기’를 연주했다. 피아니스트 이선호는 신만식 작곡의 ‘피아노 모음곡’을 들려줬다.

‘은빛 현들’(21일)에서는 피아노 손지혜·바이올린 이윤의·첼로 윤석우·클라리넷 백양지가 참여했다. 박영희의 바이올린(‘판파넬라’), 첼로(‘바람이 임의로 불며’), 피아노(‘목마르다’ ‘물결’) 솔로곡과 이날 공연의 제목으로 사용된 클라리넷·첼로·피아노 앙상블로 구성된 ‘은빛 현들Ⅱ’를 선사했다. 이밖에도 카사도, 시닛케, 풀랑의 곡도 연주했다.

최아현(첼로)과 추원주(피아노) 듀오는 윤이상의 ‘공간Ⅰ’ 등을 연주했다. ⓒ파안박영희현대음악제 제공
소프라노 손가슬, 플루트 오병철, 클래식기타 안용현은 박영희의 ‘그 없음으로 해서’를 연주했다. ⓒ파안박영희현대음악제 제공


내일이 기대되는 샛별 최아현(첼로)과 추원주(피아노)의 무대인 ‘영 아티스트 쇼케이스’(23일)도 눈길을 끌었다. 청주 출신의 최아현은 윤이상의 첼로곡 2개(‘활주’ ‘공간Ⅰ’)와 바흐, 펜데레츠키, 베토벤, 프로코피예프의 곡을 들려줬다. 스무살 첼리스트의 완벽한 테크닉과 곡 해석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24일에는 폐막공연 ‘나성인 렉처 콘서트-드라이잠 노래’가 열렸다. 음악평론가 나성인이 박영희의 음악세계를 설명하고 아티스트들이 곡을 연주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소프라노 손가슬, 피아노 최혜기, 플루트 오병철, 클래식기타 안용현이 출연했다. 박영희의 ‘항상Ⅱ’ ‘드라이잠 노래’ ‘그 없음으로 해서’와 드뷔시, 슈베르트, 생상스, 라벨의 곡도 연주했다.

특히 ‘드라이잠 노래(Dreisam-Nore)’는 절창이었다. 언론들은 “드뷔시의 솔로 플루트 작품 ‘시링크스’ 이후 가장 아름답고 자유로은 플루트 작품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는데, 관객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평가에 백퍼 공감했다. 드라이잠은 박 작곡가가 살았던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강이다. 제목도 한글 ‘Nore’로 적은 것이 반갑다. 또한 노자의 도덕경 철학이 모티프가 된 ‘그 없음으로 해서’는 손가슬의 목소리를 타고 가슴을 적셨다.

작곡가 박영희 선생이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을 대신해 안드레아스 보벨슐테 독일 브레멘 시장으로부터 ‘공로십자훈장 1등급’을 받고 있다. ⓒ온아티스트 제공


첫 번째 파안 박영희 현대음악제를 마치자마자 29일 독일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박영희 선생이 독일 연방정부로부터 ‘공로십자훈장 1급(Bundesverdienstkreuz 1. Klasse)’을 수상했다. 동양 전통음악의 정서를 서양 현대음악과 결합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온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공로십자훈장’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일 사회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된다. 박 작곡가에 앞서 재독 음악가 윤이상이 1988년 ‘대공로십자훈장’을, 차범근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 2019년 ‘공로십자훈장’을 받았다.

지난 9월 독일 ‘베를린 무직페스트’에서는 박영희 작곡가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열렸다. 공연에 참석한 박영희 작곡가가 ‘베를린 무직페스트’ 음악감독과 환하게 웃고 있다. ⓒ온아티스트 제공


박영희는 독일 음악기획사 ‘온아티스트(onArtist)’와의 인터뷰에서 “너무 놀랐다. 내가 이 상을 받기 위해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 귀한 영예를 얻게 되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며 “상을 받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처럼 계속 일하겠지만, 그만큼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예술은 국경과 구분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다”라며 “문화는 그 국경과 구분을 허무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나는 늘 내 일을 하면서도 남의 것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마음을 주려고 했다”며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려는 젊은 세대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독일 정부에서 훈장까지 받았으니 내년 ‘제2회 파안 박영희 국제음악제’는 더 기대된다. 앞으로 아트센터 올리브는 ‘박영희 음악의 메카’로 예약됐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