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로렌조 피오로니(오른쪽)가 내년에 국립오페라단이 선보이는 ‘링 시리즈’ 4부작의 첫 작품인 ‘라인의 황금’을 연출한다. 사진은 지난 6월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초연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는 피오로니의 모습. ⓒ국립오페라단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국립오페라단이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중 하나로 평가받는 벤자민 브리튼의 ‘피터 그라임스’를 내년에 한국 초연한다. 또한 2028년까지 리하르트 바그너의 ‘링 시리즈’ 4부작을 순차적으로 선보이는 가운데 1탄 ‘라인의 황금’도 새해 무대에 오른다. 이밖에도 운명적 사랑에 몸부림치는 쥘 마스네의 ‘베르테르’, 한 여인을 둘러싼 부자(父子)의 갈등을 그린 주세페 베르디의 ‘돈 카를로스’도 관객을 찾아온다.
국립오페라단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파도에 빗대어 2026년 정기공연의 키워드를 ‘WAVES(파도)’로 정하고 네 편의 강렬한 오페라를 선보인다고 17일 밝혔다.
2024년부터 초연작과 대작을 집중적으로 소개해 온 국립오페라단은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통해 바그너의 세계관을 단계적으로 선보이며 해외 유수의 오페라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현대 오페라를 선보이며 동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왔다. 내년에도 국립오페라단은 이러한 행보를 이어 나가 도전적이고도 신선한 작품을 준비했다.
● 타오르는 감정 가득한 ‘베르테르’...지휘 홍석원·연출 박종원
새해에 선보이는 첫 번째 파도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프랑스 작곡가 마스네의 ‘베르테르’(4월 23일~26일)다. 원작은 괴테의 젊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로 18세기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작품 속 노란 조끼를 입었던 베르테르의 패션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베르테르 효과’라는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많은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만드는 시도를 했지만 ‘마농’ ‘돈키호테’ 등을 작곡한 마스네의 ‘베르테르’가 관객 뇌리에 가장 강력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베르테르가 사랑하는 샤를로테를 메조소프라노가 노래하게 함으로써 베르테르의 사랑에 응답하지 못하는 인물의 심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베르테르’는 관현악, 오페라, 현대음악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젊은 명장 홍석원이 이끈다. 그는 국립오페라단과 ‘나부코’ ‘한여름 밤의 꿈’ 등 다양한 작품을 함께하며 국내외에서 명성을 쌓아왔다. 또한 부산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을 역임하며 지역에서 클래식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다.
연출에는 ‘구로 아리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시대의 얼굴을 담아낸 작품을 연출해 왔던 영화감독 박종원이 맡아 오페라 연출가로 데뷔한다. 영화적 감성과 오페라가 조우하는 새로운 무대가 펼쳐질 예정이다.
● 알렉산더 조엘·줄리앙 샤바스 조합이 선사하는 ‘피터 그라임스’
국립오페라단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파도에 빗대어 2026년 정기공연의 키워드를 ‘WAVES(파도)’로 정하고 네 편의 강렬한 오페라를 선보인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2024년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했던 ‘한여름 밤의 꿈’에 이어 브리튼의 대표작 ‘피터 그라임스’(6월 18일~21일)를 역시 국내 최초로 선보인다. 이 작품은 사회적 편견과 고립, 집단의 폭력성 등을 탐구해 해외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중 하나로 평가받아 왔다. 국립오페라단은 3년 연속 현대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며 오페라가 가진 동시대성을 꾸준히 뽐낸다.
포디움에는 영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알렉산더 조엘이 선다. 그는 “악보 속 다채로운 뉘앙스를 들려주는 지휘”로 찬사를 받아온 음악가로, 작품에 담긴 복합적이고도 모순적인 정서를 견고하게 이끌 예정이다.
연출에는 2024년 ‘죽음의 도시’에서 회색 도시 속 따스함을 포착해 주목받은 줄리앙 샤바가 다시 참여한다. 그는 ‘죽음의 도시’에서 집착과 광기, 죽음과 사랑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바 있어 이번엔 관객들에게 어떤 설득력 있는 무대를 보여줄지 관심이 쏠린다.
● 링 시리즈의 서막 ‘라인의 황금’...로타 쾨닉스·로렌조 피오로니 ‘호흡’
‘링 시리즈’(라인의 황금·발퀴레·지크프리트·신들의 황혼)의 서막이 오른다. 국립오페라단은 ‘라인의 황금’(10월 29일~11월 1일)을 기점으로 2028년까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를 순차적으로 선보이며 관객들과 긴 여정을 함께한다. 특히 2026년은 링 시리즈 4부작 전편이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된 지 150주년을 맞는 해로, 이번 공연의 상징성을 더욱 높인다.
국립오페라단은 2024년부터 바그너 작품을 통해 제작 역량을 강화해 왔으며 2026년에는 오페라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는 링 시리즈를 통해 국립예술단체로서 한 단계 도약한 모습을 선보인다.
2024년 ‘죽음의 도시’에서 강렬한 지휘로 깊은 인상을 남긴 로타 쾨닉스가 다시 한 번 포디움에 선다. 타협 없는 지휘로 밀도 높은 음악을 뽐냈던 그가 바그너의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2025년 국내 초연으로 선보였던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에서 유쾌함과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동시에 담아냈던 연출가 로렌조 피오로니도 합류한다. 거대한 무대 장치와 화려한 의상 등으로 호평 받았던 그는 바그너의 신화적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펼쳐낼 예정이다.
● 발레리오 갈리·야니스 코코스가 펼치는 스페인 최전성기의 ‘돈 카를로스’
베르디의 작품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단비 같은 작품도 준비했다. 한 여인을 두고 부자간에 벌어지는 비극적 경쟁을 다룬 ‘돈 카를로스’(12월 3일~6일)다. 베르디의 웅장한 합창과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인 아리아가 더해져 그의 작품 중 가장 드라마틱한 오페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번 무대는 베르디의 의도를 충실하게 담아내기 위해 오리지널이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어 버전으로 준비해 원형에 가까운 무대를 구현한다.
푸치니와 베르디 오페라 지휘에서 활약하여 국제적 명성을 얻은 지휘자 발레리오 갈리가 다시 한 번 오페라극장을 찾는다. 2022년 베르디의 ‘아틸라’로 국립오페라단과 첫 연을 맺은 그는 베르디 특유의 에너지를 웅장하게 풀어내며 현대적 감각과 고전적 해석을 조화시키는 스타일로 유명하다.
연출에는 80대 거장 야니스 코코스가 맡는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스 초연, ‘나부코’ ‘투란도트’ 등 세계 주요 극장에서 굵직한 작품들을 선보였으며 그의 무대와 의상 디자인 역시 대중들의 찬사를 받았다.
극장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국립오페라단의 행보는 계속된다. 국내 최초 오페라 공연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크노마이오페라(https://www.knomyopera.org/ott/liveList)에서 2026년 정기공연 모든 작품을 스트리밍하고 추후 VOD로 제작해 감상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또한 유튜브 등을 통해 온라인에서 국립오페라단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온라인 공연을 기획해 오페라 저변 확대에 기여할 계획이다.
최상호 국립오페라단 단장은 “2026년의 공연 키워드는 ‘WAVES’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인간의 모습을 담은 오페라 작품들로 엄선했다. 특히 내년부터는 바그너의 링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으로 국립오페라단이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공연을 제작할 수 있도록 관객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린다. 높아진 관객 수준을 충족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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