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인 기법으로 한국적 미감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희돈 작가(오른쪽)가 청담 보자르 갤러리 허성미 관장과 함께 ‘롤(Roll) 기법’ 신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청담보자르갤러리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물에 풀린 닥나무 물감처럼, 당신과 나는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서서히 번져왔습니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당신이지 모를 만큼, 우리는 이미 서로의 색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연’ 인가 봅니다.”

26일 ‘서울 아트쇼 2025’가 한창 진행 중인 삼성동 코엑스 A홀. 독자적인 기법으로 한국적 미감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희돈 작가의 ‘롤(Roll) 기법’ 신작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청담 보자르 갤러리(CHUNGDAM BEAUX-ARTS) 15번·16번 부스에서 전시 중인데,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글귀가 가슴을 적신다.

이희돈 작가의 작업은 재료의 혁신에서 시작된다. 그는 ‘천년을 간다’는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 섬유질을 물감과 혼합해 직접 제작한 ‘한지 물감’을 사용한다. 특허까지 획득했을 정도로 재료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희돈 작가가 서울 아트쇼에서 새로 선보인 롤 기법 작품. 닥나무 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에 화면을 자세히 보면 가느다란 실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청담보자르갤러리 제공

캔버스 위에 굵고 거친 삼실로 짠 마대(麻袋) 끈을 얼기설기 엮고, 거기에 직접 만든 닥섬유 물감을 수천 번 중첩하는 과정은 작가만의 고유한 수행적 작업 방식이다. 이를 통해 형성된 두꺼운 마티에르와 화면 곳곳에 가느다란 실처럼 드러나는 섬유질의 질감은 기존 서구의 모노크롬 미술에서는 볼 수 없는 독보적인 입체감과 생동감을 선사한다.

이러한 독창적 기법의 뿌리는 작가의 유년 시절 기억에 닿아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의 따스한 보살핌 속에 멍석 위에서 고추와 콩을 말리며 간식을 먹고 뛰놀던 기억은 작가의 예술적 자양분이 됐다.

특히 놀이가 끝난 후 둘둘 말아 올리던 멍석의 형상은 현재 작가의 대표적인 조형 언어인 ‘롤(Roll) 시리즈’로 승화됐다. 미술평론가들은 “캔버스 위 화면을 말아 올리는 이러한 기법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보적인 기법이다”라며 “작가의 참신한 기법은 현대적 미학으로 발전했으며 한국적 단색화의 외연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서울 아트쇼에 참가한 이희돈 작가의 ‘롤(Roll) 기법’ 신작은 청담 보자르 갤러리 15번·16번 부스에서 전시 중이다. ⓒ청담보자르갤러리 제공
서울 아트쇼에 참가한 이희돈 작가의 ‘롤(Roll) 기법’ 신작은 청담 보자르 갤러리 15번·16번 부스에서 전시 중이다. ⓒ청담보자르갤러리 제공


작가는 독자적인 타공 기법과 섬유질 물감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행위를 통해 우주 속 점과 같은 인간 존재, 그리고 그들 사이의 끊임없는 ‘인연의 관계망’을 시각화한다. 오방색의 중첩이 만들어내는 깊이 있는 색감은 한국적 전통 미감과 세련된 현대성을 동시에 구현하며, 화면 안에는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이 응축된 복층적 서사가 담겨 있다.

서울 아트쇼에서 공개된 신작들은 수행적인 반복을 통해 탄생한 회화적 사유의 결과물이다. 이는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한국적 단색화의 개념을 새로운 지점으로 확장했다. 이희돈 작가는 “수없이 엮이고 쌓인 섬유질의 궤적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인연의 모습이다”라며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이 유년의 따뜻한 정서와 삶의 본질적인 인연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전했다.

보자르 갤러리 허성미 관장은 “이희돈 작가는 전통 재료인 닥섬유를 현대적 매체로 전환해 한국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작가다”라며 “서울 아트쇼를 통해 인연과 삶의 서사가 응축된 작가만의 독보적인 마티에르를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24일 개막했고 28일까지 계속된다.

/eunki@classicbiz.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