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당 타이 손은 니키타 마갈로프(1912~1992)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웠다. 손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할 때 마갈로프는 그 대회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1984년 어느 날,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던 손에게 마갈로프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도 마침 토리노에 와있으니 한번 만나고 싶다는 거였다.
마갈로프는 손을 처음 만나 쇼팽 콩쿠르나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스위스에 오게 되면 자기 집을 꼭 한 번 방문해달라고 초대했다. 손은 얼마 뒤, 뜸들이지 않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마갈로프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지게티(1892~1973)의 딸과 결혼했다. 마갈로프가 부인과 함께 사는 집은 주인 내외의 사람됨처럼 따뜻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스위스의 밝은 태양이 커다란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그 집에서 손은 연주도 하고, 거꾸로 마갈로프가 연주회 때문에 연습하고 있던 베토벤 소나타 ‘함머클라비어’를 열심히 들어주기도 했다. 마음이 아주 편안했고 이런 거장들을 무대가 아닌 자연인의 모습으로 접할 수 있으니 음악가가 되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 마갈로프의 피아노 들으면 “음악가 되길 잘했네” 뿌듯
마갈로프는 프로코피에프, 라벨,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등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거나 공연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작곡가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것이다. 손은 마갈로프로부터 이런 작곡가들의 생각을 그대로 전수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갈로프가 치면, 살아있는 듯한 음악이 거기에 있었다.
덧붙여 마갈로프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이 왜 모두 테크닉 우선으로 치는 거냐고 항상 탄식을 했어. 라벨은 말이지, 그 망할 놈의 토스카니니가 ‘볼레로’를 지휘할 때 템포를 지시한대로 연주하지 않아서 자기 작품이 아예 캉캉춤이 되어버렸다고 노발대발했다니까. 하하하...” 이런 이야기들이 퐁퐁 샘솟듯 솟아나왔다.
마갈로프 앞에는 마르타 아르헤리치, 미츠코 우치다, 미셸 달베르토, 장 마르크 뤼사다를 비롯해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고민거리를 들고 찾아왔다. 그들은 물론 기술적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다만, 연주가로서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그것을 찾고 해결하기 위해 거장의 집 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런 훌륭한 피아니스트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야. 작곡가의 생각이나 템포, 리듬에 충실하라고 조언을 해주는 것뿐이지. 요즘은 바빠서 이전처럼 가르칠 시간이 잘 나지 않지만, 그래도 모두들 1년에 한 차례씩은 나를 찾아준다네.” 마갈로프는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손 역시 이 거장과는 약간의 얘기만 나누어도 마음 한가운데서 따뜻한 것이 흘러나오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은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스스로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화려한 커리어를 만드는 것에 별로 흥미가 없다. 다만 음악만을 바라보고 내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할 거다. 나는 결코 스타 기질을 지닌 인간이 아니고, 쇼맨십도 없다. 무대에서 눈을 끄는 존재도 아니야. 그러니까 음악만으로 승부를 걸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속내처럼 말수도 적어졌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던 손에게 마갈로프는 언제나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었다. “자네 말이야. 피아노 치는 동작을 조금 변화시키면 어떻겠나?” 어느 날 마갈로프로부터 충고를 듣고 손은 깜짝 놀랐다.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 지적은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고 있었다. 논리적이고, 손의 결점을 아주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이던 바슈키로프가 했던 것과도 비슷했다. “이전에도 모스크바에서 똑같은 것을 지적받았습니다. 아직도 자세가 이상합니까?” “그렇다네. 좀 더 자연스런 느낌이 나는 게 좋지 않겠나?” 손은 아직도 몸이 약간 구부정하고 손가락을 높이 드는 주법을 하고 있었다. 마갈로프는 피아노를 치는 구부정한 자세와 손가락의 상하운동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서 네 개의 16분 음표를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을 높이 올려서 점프해가며 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흐름이 되도록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 편이 효율이 높고, 빠르게 칠 수 있으며 힘이 덜 들 거라는 얘기였다. 마갈로프는 항상 손가락이 건반에 닿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공중에 날아서 들고 있으면 그것을 컨트롤하기도 어려워진다고 했다.
이즈음부터 손의 주법에 변화가 일어났다. 바슈키로프의 가르침에다가 마갈로프의 조언이 합쳐져서 연주 자세가 완성되어갔다. 등 근육을 쭉 펴고 아름다운 자세를 유지하면서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피아노를 대하게 됐다. 자연히 레퍼토리도 넓어지고, 체력을 요구하는 작품도 쉽게 칠 수 있게 됐다. 주법이 변화하니, 아무리 연주해도 피곤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곡을 마음껏 칠 수 있었다. 손은 러시아 작품을 집중적으로 연주하게 됐다.
● “당 타이 손, 좀 더 쿨하게 해보시오!” 네빌 마리너의 뼈있는 조언
손이 자신의 레퍼토리에 넣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작곡가가 있다. 바로 모차르트다. “모차르트는 매우 좋아하지만, 내겐 정말 어렵다. 음표 수가 적은 데다가 피아니스트 본래의 테크닉이나 음악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만다. 무심하게 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무심함을 가장한 것 정도로 되었다가는 완전히 끝장이다.”
1989년 손은 네빌 마리너의 지휘로 세인트 마틴 아카데미 합주단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협연했다. 마리너는 처음 협연하는 음악가와는 사전에 충분한 이해와 교감을 갖고 서로 맞춰보는 시간을 매우 중요시했다. 손도 간단한 리허설 뒤에 미팅에 불려갔다.
“좀 더 쿨하게 해봅시다.” 마리너가 입을 열고 맨처음 꺼낸 말이었다. “예? 마에스트로! 그건 무슨 뜻입니까?” 모차르트를 쿨하게 하라니... 손은 마리너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당 타이 손, 당신은 템포도 타이밍도 매우 자유롭게 하고 있네요. 하지만, 모차르트의 협주곡은 자기 자신의 개성보다는 악보에 충실하게 기분을 억제해서 치는 편이 효과가 납니다. 쿨하게 하라는 건 이런 의미요.”
“스스로를 드러내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음악에 따라서 자유로움은 중요한 요소지. 하지만 그렇게 모든 걸 노래하듯이 하지는 않아도 좋을 것 같소. 노래하는 것은 2악장만으로 충분한 것 같군요. 오페라의 아리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1악장과 3악장은 오케스트라와 밸런스가 맞게 좀 더 음량을 억제하고 타이밍을 중시하고, 서로의 음을 들으며 맞추는 스타일을 하고 싶소. 괜찮아요. 오케스트라는 억제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큰 음량을 내지 않아도 좋아요.”
손은 새롭게 눈을 뜨는 기분이었다. 협주곡은 언제나 피아노가 음악을 리드해야 한다고 줄곧 생각해왔던 것이다. 마리너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파트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이 커뮤니케이션이 잘 될 때 비로소 모차르트 협주곡이 가진 천상의 아름다움이 생겨나는 거란 사실도 깨닫게 해주었다.
마리너는 일견 온화한 타입으로 보이지만, 연주에서의 타협은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오케스트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목표하는 음악의 방향과 맞지 않는 사람, 환경이나 분위기에 적응 못하는 사람은 단 하루로 그냥 ‘안녕’이었다. 대개 3개월 정도 같이 연주해보고서 오케스트라의 분위기 파악 정도만 할 뿐 실제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원 자리를 그만두고 만다.
거꾸로, 20년 이상 함께 연주해온 사람도 있었다. 마리너는 손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다. “당신은 각지의 여러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하고 있어요. 악단이 가진 이런저런 개성과 방향을 빨리 파악해서 자신의 음악과 결합시켜나가는 것이 힘이 들겠지만, 그것이 솔리스트로서의 중요한 자질이기도 하니까, 잘 해주시오.” 마리너와는 이후 매우 좋은 관계를 쌓아가게 됐다. 이 경험이 실내악을 연주할 때에도 도움이 됐다. 손은 체코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1929~2011),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 보리스 벨킨 등과 실내악 활동을 했다. 거장들의 가르침이 살아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그러한 앙상블들을 성공적으로 했을 때였다.
● “음악이 자네를 사랑하고 있어” 아이작 스턴과의 강렬했던 만남
2001년에 또 한 사람, 위대한 음악가와의 만남이 있었다. 제6회 미야자키 국제 실내악 음악제에서 만난 아이작 스턴(1920~2001)이다. 스턴은 미국에 이주한 유태인계 사람들과 아시아인, 그밖에도 여러 나라의 젊은 음악가에게 관심을 갖고 재능이 꽃필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또한 그가 음악계에서 지닌 막대한 영향력 때문에 비난의 시선도 함께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손은 브라질에서 열렸던 스턴의 연주회에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은 이후로 감동과 존경의 마음을 계속 담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책으로 출판되어 있던 스턴의 자서전을 읽고 그 파란만장한 인생과 음악에의 깊은 애정에도 감동을 받은 터였다. 음악제에서 스턴을 직접 만나게 되고, 스턴이 자신의 모차르트 연주를 들을 거라 생각하니 매우 긴장이 됐다.
손은 음악제에 스턴의 자서전을 들고 갔다. 기회가 되면 직접 사인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악제에서 손이 핀커스 주커만의 지휘로 모차르트 협주곡 23번을 연주했던 날, 손의 대기실로 거동조차 불편해보이는 스턴이 찾아왔다.
“정말 깨끗하고 멋진 모차르트였소. 나는 지금 굉장히 행복해요. 좋은 음악을 들려줘서 고맙소. 나는 음악이 자네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네. 당 타이 손! 자네는 진정한 음악가요. 연주를 듣고 그런 느낌이 들었소. 사실은 내가 좀 더 건강이 좋았다면 꼭 한 번 베트남에 가보고 싶을 정도라니까.” 스턴은 손이 부끄러워하면서 내민 책에 흔쾌히 사인을 하고 덧붙여서 프랑스어로 메시지를 써주었다. ‘브라보! 당신은 진정한 음악가요. 음악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손은 그날부터 스턴을 안내해서 하노이 시내를 걷고 있는 꿈을 꾸게 됐다. 이 인상적인 첫 만남으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9월 22일에 스턴은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손의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오랫동안 앓았던 손목의 병 완치...‘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음악의 가치 실현
손이 자신의 음악 철학으로 삼는 것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였다. 옛날부터 이 말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은 ‘늦게 출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들이 어린 시절에 배웠던 것을 훨씬 더 나중에 배웠으니 더딘 것이지만, 앞으로도 발걸음을 천천히 앞으로 옮겨놓고 싶다고 생각했다.
테크닉 부분은 확실하게 습득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인생의 경험과 철학을 쌓아 그것을 음악에 반영시키는 것이 과제였다. 베트남, 소련, 일본, 캐나다로 생활 장소를 옮기는 새로운 체험을 하고, 음악을 연마하고 자신의 방법으로 인생을 열어갔다. 그것들 모두가 연주에 반영되어 표출되고 있었다. 캐나다에 이사했을 때는 매서운 비평과 마주치기도 했다. ‘당 타이 손은 왜 저렇게 빨리 치는 거야?’ ‘그가 음악으로 말하고 싶은 게 도대체 뭐야’ ‘왜 그런 표현을 하지?’ 등등.
손은 혹독한 비판이라 해도 자신의 결점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는 것에는 마음을 열었다. 앞으로의 참고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개인적인 호불호의 감정으로 쓰는 비평에는 신경을 아예 쓰지 않았다. 유럽이나 미주지역의 비평은 확실히 엄격했다. 하지만 그것이 손을 강하게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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