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엄청났다. 웅장한 비장미 가득한 금관파트의 힘이 빛났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가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E장조’을 연주하자 관객 모두는 60여분 동안 자발적 포로가 됐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온몸 감각세포를 총동원해 사운드를 받아 들였다. 한음이라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부릅떴다. 어디 이뿐인가. 생겨나지도 않은 ‘음악 더듬이’까지 만들어 미세한 소리까지 잡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자리를 꽉 채운 관객 2000여명 모두가 그렇게 새로운 감각기관을 급조했다.
14일 오후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사이먼 래틀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은 “이게 바로 그레이트야”를 보여줬다. 거기에 더해 조성진이 피아노 협연자로 나섰으니 금상첨화 무대다. 지휘자, 오케스트라, 협연자 등 그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스리톱의 완벽한 조합이다.
음악감독 래틀은 2023/24 시즌을 끝으로 런던 심포니를 떠나 독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번 무대는 런던 심포니의 수장으로서 한국에서 펼치는 그의 마지막 내한 공연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2부에서 선보인 브루크너 교향곡 7번. 내놓는 작품마다 그다지 호응이 크지 않았던 작곡가에게 늦깎이 성공을 맛보게 해준 인생작이다. 1883년 작곡된 이 교향곡이 뜨면서 브루크너는 19세기의 위대한 작곡가 리스트에 비로소 이름을 올린다.
런던 심포니는 1904년 창단했다. 래틀이 이끄는 118년의 역사는 1악장부터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현악기들의 잔잔한 트레몰로로 시작되는 ‘브루크너의 개시(開始)’는 가슴을 파고들었다. 누군가는 해가 천천히 솟아오르는 모습이 생각났고, 또 누군가는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풍경이 떠올랐으리라. 브루크너는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그러면서 저 높은 곳으로 도약하려는 주제가 이어졌다. 천국으로 올라가는 문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말러는 끊임없이 신을 찾고 있고,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았다”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말이 실감됐다. 런던 심포니는 작곡가의 의도를 알고 있는 듯 훌쩍 속세를 벗어났다. 각기 색깔이 다른 3개의 주제가 제시되며 지상을 초월한 광경을 펼쳐냈다.
7번 교향곡에서 가장 유명한 2악장은 죽음이 임박한 리하르트 바그너를 떠올리며 작곡했다. 전체적으로 장송곡(葬送曲) 분위기다.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에서 사용했던 바그너 튜바를 등장시켜 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곡 시작과 동시에 등장하는 비장한 선율은 청중을 압도한다. 이 서늘한 선율은 모두 4번 등장하는데 시그니처 역할을 한다. 또한 브루크너는 자신의 합창곡 ‘테 데움’의 선율을 빌려와 더욱 경건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맨 뒤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병풍처럼 라인업을 구성한 트럼펫, 트럼본, 튜바, 호른의 금관 파트는 엄숙함과 웅장함을 자유자재로 교차하며 베테랑 실력을 뽐냈다. 자체적으로 소리를 크게, 작게 증폭시키는 스킬은 놀라웠다. 금관파워는 엑설런트였다. 간간히 들리는 플루트와 오보에의 서늘한 비장미는 오랫동안 머리를 맴돌았다.
3악장은 2악장과 완전 딴판이다. 흥겨운 리듬이 등장하는 브루크너식 스케르초를 보여줬다. 생동감과 흥겨움이 폭발했다. 중간에 모든 연주자가 잠시 스톱하는 ‘부루크너 휴지(休止)’도 이채로웠다.
피날레 4악장은 앞서 사용한 주제들을 다시 가져와 통합해 하나의 완벽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1악장에서 가져온 주제는 모습을 바꾸어 다시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곳곳에 오르간의 울림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들이 있는데, 이건 브루크너의 작곡 특징 중 하나다. 그 자신이 오랫동안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런 스타일이 몸에 뱄다.
이에 앞서 런던 심포니는 1부에서 모리스 라벨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무용시 ‘라 발스’로 문을 열었다. 빈의 왈츠(‘발스’는 프랑스어로 왈츠라는 뜻)를 예찬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생명이 태어나듯 조용히 박동하며 시작된다. 심장이 살짝 뛰듯 낮은 음으로 출발한 춤은 멈추지 않고 점점 고조된다. 거대하게 확장되어 앞으로 나아간다. 소리를 층층이 쌓아올리고, 더 쌓아 올릴 수 없을 때까지 끌고 간다. 결국 클라이막스 최후의 순간에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왈츠가 무너지면서 마무리된다. 이런 점진적 확장 이후의 붕괴 포맷은 라벨의 대표작 ‘볼레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장발(長髮) 조성진’이 등장했다. 평소 스타일보다 머리카락을 살짝 더 길게 기른 모습이다. 그가 고른 곡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라이 파가니니가 작곡가들에게 준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의 ‘24개의 카프리치오’ 가운데 마지막 24번째 카프리치오는 악마 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에 매료돼 브람스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리스트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연습곡’을 만들었다. 이런 신드롬은 라흐마니노프도 피해갈 수 없었다. 1934년 여름, 24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세상에 내놓았다.
조성진의 피아노는 자유로웠다. 경쾌하고 굳건한 소리를 뽐내며 활화산 사운드를 들려주더니, 어느새 부드럽고 서정적인 터치로 깜작 변신해 귓속말을 쏟아낸다. 정교한 테크닉과 감상적 설렘을 섞어 24개의 변주를 촘촘하게 엮어나갔다. 그의 변화무쌍한 연주에 런던 심포니는 케미를 맞췄다. 래틀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여러 차례 조성진과 눈빛을 교환하며 곡을 풀어나갔다. 조성진은 2021년 쇼팽 피아노 협주곡 앨범을 내면서 런던 심포니와 호흡을 맞춘 바 있고, 래틀과는 2017년 베를린 필 아시아 순회 공연의 협연자로 함께 무대에 선 인연이 있다.
조성진이 첫 건반을 누르자 “내 음악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여시오”라는 시그널 같았다. 열정적으로 터치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엉덩이도 의자에서 살짝살짝 떨어졌다. 수면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물방울이 사방으로 튕기듯 거친 모습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어느새 클라이막스 18번째 변주에 이르렀다.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로 담아낼 수 있을까. 사실 이 황홀한 음악이 파가니니 주제에서 어떻게 파생됐는지 단박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라흐마니노프는 파가니니 주제를 전조(轉調)시키고 다시 거꾸로 뒤집어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었다. 또한 변주된 주제가 가장 아름답게 들릴 수 있도록 속도를 늦췄다. 없는 연인까지 가짜로 만들어 당장 프러포즈를 하게 만드는 마법의 러브송이다.
연주를 마친 조성진은 래틀과 포옹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래틀의 얼굴에는 아빠 미소가 번졌다. 조성진은 모두 12곡으로 구성된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 제10곡인 ‘가을의 노래’를 앙코르로 들려줬다. 콘서트장으로 금세 붉은 단풍이 떨어졌다. 보통 협연자가 앙코르를 연주할 때 지휘자는 무대에 나오지 않지만, 래틀은 하프 연주자 뒷자리에 앉아 끝까지 연주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몇 차례의 커튼콜에 응한 조성진은 앙코르 요청이 계속되자, 오케스트라 악장에게 “이제 그만 나가시죠”라며 슬쩍 말을 건네는 제스처를 보여 웃음을 선사했다.
한편 래틀, 조성진, 런던 심포니는 지난 11일 대구 콘서트하우스를 시작으로 12일 대전예술의전당, 13일 LG아트센터 서울, 14일 롯데콘서트홀, 1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국내 클래식 팬을 사로잡았다. 래틀은 이번 공연에서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 브루크너 ‘교향곡 7번’, 라벨 ‘라 발스’, 버르토크 ‘중국의 이상한 관리 모음곡’을 들려줬다.
조성진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협연했다. 그는 다채로운 앙코르곡을 선물했다. 쇼팽 에퀴드 작품10 제12번 ‘혁명’, 차이콥스키 ‘사계’ 중 ‘가을의 노래’, 헨델 ‘미뉴에트 g단조, HWV 434/4’, 포레 ‘파반느’를 들려줬다.
/eunki@classicbiz.kr
저작권자 ⓒ ClassicBiz,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