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출국 비행기를 타지 않고 공항에서 호텔로 돌아왔더니 두툼한 악보가 퀵서비스로 배달됐어요. 밥 먹을 때 빼고는 나흘간 방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하루에 14시간, 15시간씩 악보를 봤어요. 처음엔 압도됐어요. 악보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죠. 베토벤의 음악이 그래요. 음표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하죠.”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김선욱이 드디어 꿈을 이룬다.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첫 지휘 무대에 오른다. 1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과 15·16일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세 차례 공연한다. 당초 서울시향 오스모 벤스케 음악감독이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벤스케 감독이 지난 7일 낙상 사고로 골절상을 입으면서 급작스럽게 대타 지휘를 맡았다.
공연을 앞두고 13일 종로구 서울시향 리허설룸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지휘 제안을 받은 당시를 “만 34년 일생(김선욱은 1988년생이다)에서 가장 깊은 고심을 했던 순간이다”라고 회상했다. 공연을 일주일, 리허설은 나흘 가량 앞두고 SOS 요청을 받은 것이다. 공연을 준비하기엔 턱없이 촉박한 시간이라는 생각에 반나절 정도 고민을 했으다. 수락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결국 베토벤이라서”였다.
“지난 6일 한국공연예술경영협회 40주년 연주를 마치고 7일 출국하려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에 서울시향에서 전화를 받았어요. ‘합창’ 공연이 14~16일인데 지휘를 맡아 12일부터 리허설을 해줄 수 있겠냐는 거였죠.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그 30~40분이 34년 제 일생에서 가장 고심을 많이 한 시간이었어요. 리허설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죠.”
김선욱은 공항에 도착했지만 결국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이유는 그가 부탁받은 곡이 다름 아닌 베토벤 ‘합창’이었기 때문. 그는 지난 8월 광복 77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지휘자로 서울시향 포디엄에 처음 섰으며, 내년 10월 서울시향 정기공연 지휘 데뷔 무대를 앞두고 있었다. 이번 공연 지휘로 서울시향 정기공연에 미리 데뷔하게 됐다.
“1999년 12월 31일 예술의전당이었어요. 정명훈 선생님의 지휘로 처음 ‘합창’ 실연을 들었죠. 지휘자를 꿈꾸는 초등 5학년 꼬마 시절이었어요. 그때부터 ‘내가 이 곡을 지휘할 날이 올까’라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합창’ 교향곡은 원한다고 해서 쉽게 지휘할 기회가 오는 곡이 아니에요. 오케스트라의 사이즈도 워낙 크고 합창단 등 수많은 노고와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공연이죠. 이번 기회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제안을 수락한 김선욱은 첫 리허설 전까지 나흘간 호텔 방에 종일 스스로 갇힌 채로 악보 공부를 시작했다. 기꺼이 자발적 감금생활을 선택한 것.
“오로지 악보만 봤습니다. 3악장쯤에서는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뜨거워지고, 쿡쿡 찌르고, 아팠어요. 4악장에선 하늘에 있던 어떤 신성한 존재가 접속을 시도하는 느낌까지 들었어요. 정신이 혼미해졌죠. 첫 날, 둘째 날은 곡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셋째 날, 넷째 날은 불덩이를 조절하는 과정이었어요. 과장한다고 느껴지겠지만 아니에요.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요.”
그는 “살면서 이렇게까지 온 영혼과 정성을 바쳐서 한 게 얼마 만인가 싶을 만큼 열중해서 했다”고 털어놨다.
피아니스트로서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지만 지휘자로서는 지난해 초 처음 데뷔 무대(KBS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번·교향곡 7번 연주) 가진 ‘신인’이다. 갑작스럽게 서게 된 큰 무대에 긴장할 법도 하지만 떨림보다는 베토벤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이 더 느껴졌다.
이미 10여년 전 피아니스트로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마친 그는 “베토벤이란 작곡가에 대한 개인적 생각과 해석은 이미 있고, 이것이 교향곡으로 옮겨진다고 해서 더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현악 사중주, 교향곡은 모두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어요. 특정 악기를 위해 작곡을 한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이상을 순간순간 음악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작곡했을 테니, 연주할 때도 항상 마음에서 우러나왔을 소리와 음향이라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이건 피아노를 칠 때든 교향곡 연주든 똑같아요.”
현재 김선욱처럼 국내에서 피아노 연주와 지휘를 모두 하는 음악가는 흔치 않다. 그는 “피아노와 지휘는 모두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며 연주자와 지휘자로서의 모습 모두 ‘음악가 김선욱’임을 강조했다.
“가끔 지휘를 하면 이제 피아노는 안치는 거냐고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없어요. 저는 피아노를 칠 때든 지휘할 때든 ‘피아노를 친다, 지휘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둘 다 음악을 내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만드는 행위죠.”
어린 시절부터 원래 지휘자를 꿈꿨다는 그는 “어쩌다 보니 피아노 연주가 많이 잡혀서 피아니스트로 살아왔던 것일 뿐이다”라며 웃었다.
“피아노만 한 대 있는 무대도 굉장한 설렘을 주지만 연주자들이 무대에 가득차서 하나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은 굉장한 매력이죠. 결국 피아노도 축소된 오케스트라고, 오케스트라도 팽창된 피아노라고 생각해요. 지휘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2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지휘에 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선욱은 “저는 항상 한계와 싸우고 있지만 그 과정이 힘들지는 않다. 어려서부터 너무 좋아한 음악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게 이미 꿈을 이룬 거라, 주어진 것에 정말 후회 없이 하려고 한다”며 “이번 ‘합창’ 교향곡도 준비도 기간은 짧았지만 후회 없이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리지만 재능 있는 후배 음악가들에 대해선 “자기들이 가야 할 길을 잘 아는 것 같다”면서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줬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클래식 산업에서 오래 삼아 남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음악 하는 사람 모두가 공감할 것입니다. 그 쉽지 않은 길에 너무 많은 고통과 절망, 환희가 있어요. 정말 고립되고 외로운 감정들을 연주나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작업들을 매번 반복해야 합니다. 2~3년 뒤 연주(일정)가 잡혀있어도 4~5년 뒤는 아무도 모르는 게 이 바닥입니다. 여기저기서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안 보이고, 한동안 안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나기도 하고.”
김선욱은 “저도 콩쿠르를 통해 많은 연주 기회를 얻었지만 (그런 기회를) 10년, 20년, 30년 계속 유지한다는 건 코끼리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며 “모든 것이 장기전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허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편성을 줄이고 소규모로 진행됐던 합창 교향곡은 이번에 제 모습으로 관객을 맞는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 87명, 성악가 4명(소프라노 황수미·메조소프라노 이아경·테너 박승주·베이스 박종민), 합창단 119명(안양시립합창단·서울모테트합창단·그란데오페라합창단) 등 모두 211명이 무대에 올라 공연의 풍성함을 더할 예정이다.
“물론 아직 음악가로서 갈 길은 멉니다. 정명훈 선생님께 조언을 구해보면 해주시는 말은 항상 ‘시간이 걸린다’는 것 하나뿐이에요. 이번처럼 공연할 때마다 최대한 많이 배우고 체득하려고 합니다. 베토벤을 사랑하고 자주 연주한 저와 단원들의 ‘합창’을 들으며 한 해를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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