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인기 없는 하이든을 살려냈다...파보 예르비 지휘한 도이치캄머필 ‘엑설런트 선물’

교향곡 96번 ‘기적’·104번 ‘런던’으로 연말인사
강주미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 갈채

박정옥 기자 승인 2022.12.19 11:00 | 최종 수정 2023.03.17 10:40 의견 0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이 15일 예술의전당에서 내한공연을 열고 있다. ⓒ빈체로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지휘자 파보 예르비의 손끝에서 이미 200여년 전 세상을 떠난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The Deutsche Kammerphilharmonie Bremen)은 ‘교향곡의 아버지’가 남긴 96번 과 104번 연주를 통해, 고전은 낡고 진부하다는 편견의 꼬리표를 떼어냈다. 선뜻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 진입 장벽을 깨뜨리며 ‘클래식은 늘 새로울 수 있다’는 선물을 안겨줬다. 인기 없는 하이든을 최고의 연말 기프트로 만들었다.

지난 2004년부터 호흡을 맞추고 있는 파보 예르비와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은 특정 작곡가의 작품을 깊이 파고드는 프로젝트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그동안 베토벤, 슈만, 브람스를 진행했고 2022/2023 시즌에는 하이든의 ‘런던 교향곡’ 시리즈에 집중하며 유럽과 아시아 투어에 나섰다. 12월 15일(목)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찾은 관객들은 이 위대한 여정의 행복한 목격자가 됐다.

하이든은 모두 100편이 넘는 심포니를 남겼다. 그의 작품에는 유머와 위트가 숨어있다. 하이든만의 독특한 예술적 구성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쌓아 올린 유머와 위트를 어떻게 꺼내. 어떤 방식으로 펼쳐내는 가에 따라 두 가지 방향으로 흐른다. 하나는 생동감 넘치는 혁신이 될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진부한 고전 레퍼토리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예술감독 예르비와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은 솜씨 좋은 장인이다. 촘촘하게 짜인 강력한 팀워크를 앞세워 감동을 안겨줬다. 놀라움을 자아내는 리더십과 차별화된 실내악적 접근 방식으로 더할 나위 없는 음악을 선사했다.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이 15일 예술의전당에서 연주를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것을 예르비는 동작으로 보여줬다. 그는 항상 반걸음 먼저 달려가 음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올 사람이 누구인지, 혼자 올 것인지 또는 둘이 올 것인지를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었다. 지휘는 무심한 듯 했지만 우아했다. 이날 선보인 세곡 모두 라장조로 되어 있어 음향적 일관성과 연속성도 돋보였다.

첫 곡은 교향곡 96번 ‘기적’. 단원들이 무대로 나온 뒤 모두 함께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예의 바른 도이치 캄머필이다. 뒤를 이어 살짝 근육질 프로필 사진보다 슬림한 모습의 예르비가 들어왔다. 초연 당시 잘로몬 악단과 비슷한 규모(40여명)였고, 일부 시대악기 편성도 눈에 띄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결국 ‘팽’을 당한다. 새로운 후작은 하이든의 월급을 깎는 등 음악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마음이 상했다. 이때 공연기획자인 요한 페터 잘로몬으로부터 ‘런던으로 와서 음악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생애 처음 바다를 건넌 하이든에게 런던은 신세계였다. 두 차례 방문한 시기(1791~1792년, 1794~1795년)에 모두 12편(93번~104번)의 교향곡을 만들었다.

96번 ‘기적’은 이른바 ‘런던 교향곡’ 시리즈 12편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돼 1791년 3월 하이든의 첫 런던 연주회에서 초연됐다. 청중의 열광적인 반응과 앙코르 요청으로 2악장이 한번 더 연주됐다. 비교적 후반 작품에 속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형식과 진행이 돋보인다. 도이치 캄머필은 전반적으로 경쾌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악상을 매끄럽게 이어갔다. 김연아가 트리플 점프 뒤 한쪽발로 자연스럽게 빙판을 지치는 모습을 닮았다.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이 15일 예술의전당에서 연주를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1악장(아다지오-알레그로)은 부드러운 포물선이 연상되는 진행과 수직적인 박자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선율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바꿔가며 가슴을 파고들었다. 2악장(안단테)은 상행 모티브가 반복되는 느린 악장이다. 슬로 패턴이지만 저 높은 곳으로 끊임없이 올라가려는 몸짓이 가득하다. 독특하게 끝부분에 바이올린 솔로가 붙어 있다. 3악장(미뉴에트:알레그레토)은 오보에 솔로가 빛났고, 4악장(피날레:비바체)은 소나타 형식의 요소가 일부 포함된 론도 형식으로 구성됐다.

하이든은 잘로몬 악단의 뛰어난 오보이스트를 염두에 두고 ‘96번’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보에 파트가 인상적이다. 도이치 캄퍼필의 오보에 주자도 그에 못지않은 실력을 뽐냈다. 1악장 서주의 구슬픈 솔로 선율, 2악장 종결부의 짧지만 화려한 카덴차, 3악장 중간 트리오 부분의 쾌활한 춤곡품 독주 등에서 오보에의 다채로운 매력을 맛보게 해줬다. 확실한 ‘고막남친’ ‘고막여친’ 역할을 멋지게 소화했다.

‘기적’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도 재미있다. 초연 당시 많은 관객이 가까이서 하이든의 얼굴을 보려고 우르르 무대로 몰려들었다. 이때 객석 중간에 매달려있던 대형 샹들리에가 떨어졌지만 다들 앞쪽에 있어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 순간 누군가 “이건 기적이야!”라고 외쳤다. 그 후 ‘기적’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는 전설의 고향급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더 정확한 기록에 따르면 그건 96번이 아니라 102번의 초연 당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바이올리니스트 강주미가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다음 무대는 바이올리니스트 강주미가 협연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단 하나만 남겼다. 바로 ‘D장조, 작품번호 61번’. 베토벤은 당대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프란츠 클레멘토를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 초연을 앞두고 베토벤은 클레멘토에게 너무 늦게 솔로 악보를 보냈다. 클레멘토는 공연 당일 거의 초견(初見) 수준으로 곡을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혹평도 있었고 호평도 있었지만 결국 첫 선을 보인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랫동안 ‘죽어있는 작품’이 됐다.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 덕분이다. 그는 10대 때부터 평생에 걸쳐 이 작품을 연주했고 이후 많은 음악가들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봤다. 부조니, 크라이슬러, 생상스, 이자이, 시닛케 등은 그저 일부일 뿐이다.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가들이 이 작품의 카덴차를 남겼을 만큼 지금은 베스트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베토벤 유일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다른 바이올린 협주곡과 조금 다른 맥락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솔리스트의 테크닉적 기량을 드러내는 화려한 패시지나 마음을 자극하는 선율만이 아니라, 이 곡을 지탱하는 ‘구조의 아름다움’에 주목해야한다. 즉 베토벤을 하나의 선율로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음악의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 즉 건축가에 더 가깝게 이해해야 한다.

바이올리니스트 강주미가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협연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강주미는 베토벤의 심중을 정확히 관통했다. 1악장에서는 음악의 골조만으로 뷰티플 진행을 만들어냈다. 둥둥둥 가슴을 두드리는 팀파니의 도입을 오보에와 바순이 이어 받았다. 꽤 오래 연주된 오케스트라의 화음 뒤로 강주미의 바이올린이 수줍은 듯 합류했다. 팀파니가 “환영합니다” 인사를 건넸다. 후반부 애간장 녹이는 바이올린 솔로 파트는 귀로 사로잡았다.

2악장에서는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 위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투명한 아름다움이 심장을 저격했다. 사색적인 선율 때문에 눈물도 찔끔 나왔다. 관객 모두는 수능 만점을 부르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무대를 응시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강주미가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앙코르를 연주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잠시 쉬지 않고 곧바로 이어진 3악장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빠른 호흡을 주고받으며 훨씬 다채로운 움직임을 선사했다. 이것저것 입맛 당기는 과자들로 가득 찬 종합선물세트다. 견고한 아름다움이다. 숨이 멎을 듯한 카덴차에 정신이 혼미했다. 강주미는 앙코르로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3번’ 라르고를 연주했다.

하이든의 ‘런던 교향곡’은 그를 초대한 잘로몬의 이름을 붙여 ‘잘로몬 교향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열두편의 교향곡 중에서 마지막 곡이 바로 104번 ‘런던’이다. 하이든이 직접 제목을 달지는 않았지만, 런던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곡이기 때문에 런던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이 15일 예술의전당에서 연주를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하이든도 104번 초연 이후 만족스러운 일기를 남겼다. “공연장은 최상의 청중들로 가득 찼다. 모두들 기뻐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에만 4000굴덴(독일어권의 금화 단위)을 벌었다.” 하이든의 개인사에서도 뜻 깊은 순간이었지만 교향악의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한 음악학자는 교향곡 104번이 교향곡의 규범으로 자리 잡은 최초의 작품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기준’ ‘스탠더드’ 역할을 한 교향곡인 셈이다.

어떤 본론이 이어질지 섣불리 예측하기 어려운 느린 서주와 즐거운 분위기가 가득한 1악장(아다지오-알레그로), 가볍고 부드러운 선율로 시작해 점차 밀도를 더해간 2악장(안단테), 소박함과 함께 생동감이 넘실댄 3악장(미뉴에트:알레그로), 탄탄한 형식을 잘 풀어낸 4악장(피날레:스리피토소)까지 도이치 캄머필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펼쳐냈다.

앙코르 역시 베스트였다. 비교적 현대적인 작품을 골랐다. 레오 베이네르의 ‘디베르티멘토 1번’ 1악장은 광활한 우주의 기운이 뻗어 나왔고, 장 시벨리우스의 ‘축제풍의 안단데’는 투명한 얼음의 결정체들이 오버랩됐다. 메인공연에서 선보인 고전주의 음악에 대비되는 20세기 음악을 배치해 신선함과 청량감을 줬다. 공연을 마친 뒤 단원 모두가 앞뒤를 번갈아 가며 관객에게 90도 폴더 인사를 했다.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끝날 때도 친절한 도이치 캄머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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