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얍 판 츠베덴 ‘업그레이드 서울시향’ 보여줬다...포텐 터진 쾌속질주 사운드

SOS 요청받고 벤스케 대타로 예정보다 이른 데뷔
‘오케스트라 트레이너’ 이름값하며 12·13일 환상공연

민은기 기자 승인 2023.01.16 18:29 | 최종 수정 2023.03.16 20:45 의견 0
2024년부터 서울시향 음악감독을 맡은 얍 판 츠베덴이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과 첫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얍 판 츠베덴은 미리 힌트를 줬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악, 더블베이스, 팀파니 파트가 먼저 무대로 나와 ‘합’을 맞췄다. 자발적 복습 겸 예습이다. 플루트 2명·오보에 2명·클라리넷 2명·바순 2명·콘트라바순 1명·호른 4명·트럼펫 2명·트롬본 2명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섬세하게 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른쪽에 위치한 더블베이스 8명도 대화를 나누며 완벽 하모니를 위한 조율에 몰두했다. 나홀로 팀파니 역시 북에 귀를 바짝 대고 둥둥둥 현미경 체크를 했다. 이들이 곧 어떤 사운드를 펼쳐낼지 살짝 가늠이 됐다.

얍 판 츠베덴이 서울시립교향악단 차기 음악감독으로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치렀다. 그는 12일(목)과 13일(금)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올해 첫 정기연주회에서 실력을 보여줬다. 13일 공연을 감상했다.

예정보다 이른 등판이었다. 내년 1월부터 음악감독 타이틀을 달고 5년 임기를 시작하는 츠베던 감독의 첫 연주는 원래 오는 7월이었다. 당초 이번 연주는 오스모 벤스케 음악감독이 지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초 낙상 사고를 당한 벤스케의 회복이 늦어지면서 츠베덴이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2024년부터 서울시향 음악감독을 맡은 얍 판 츠베덴이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과 첫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SOS 요청을 받고 지난 9일 입국해 10일·11일·12일 세 차례 리허설을 가진 뒤 관객을 만났다. 단기간에 단원들의 연주 역량을 끌어올려 ‘오케스트라 트레이너’라는 명성을 가진 그는 이름값을 제대로 입증했다.

올해 63세인데도 역삼각형의 다부진 몸매를 지닌 츠베덴이 걸어 나와 관객에게 90도 폴더 인사를 한 뒤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했다. 그는 현재 뉴욕 필하모닉과 홍콩 필하모닉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미리 나와 연습했던 관악파트의 힘은 첫 곡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났다. 베토벤이 남긴 9개의 교향곡에 대한 오마주와 극복이 알알이 새겨져 있었다. 1악장은 장대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인(베토벤)의 발소리’를 암시하듯 묵직한 팀파니의 연타로 출발해, 고통·고난·시련·난관을 견뎌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영웅의 분투와 갈망이 믹스돼 흘렀다. 뭉클했다.

2악장은 가슴 시린 서정과 애상이 공존했다. 1악장을 뒤덮었던 무겁고 어두운 고뇌의 그림자들은 오보에·플루트·클라리넷·바순의 소리를 통과하며 투명한 얼음빛으로 바뀌었다. 3악장은 한결 활기차고 유머러스한 표정이 넘쳤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밝은 미래를 향해 손짓하는 희망의 노래였다.

4악장의 초반은 때론 불안하고 때론 격앙된 모습으로 표현됐다. 아직 걷히지 않은 지난날의 어둠을 암시했다.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블랙은 서서히 걷힌다. 호른의 목가풍 선율과 플루트의 청명한 음색, 트롬본의 경건한 코랄이 어우러졌다. 찬가 스타일의 주제 선율이 도도하게 흐르면서 한층 확신에 찬 투쟁이 전개된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 끝에 다다르게 되는 클라이맥스에서 영광스러운 승리와 해방의 함성이 장쾌하게 울려 퍼졌다.

2024년부터 서울시향 음악감독을 맡은 얍 판 츠베덴이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과 첫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이 콘서트는 새해 첫 정기연주회면서 동시에 나와 오케스트라의 첫 만남이기도 합니다. 내가 음악에 대해 생각할 때, 그건 대부분 사운드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첫 만남에서 바그너야말로 내가 어떤 사운드의 세계에서 비롯됐는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작곡가로 생각했습니다. 이번 연주회는 청중과 오케스트라에게 우리가 앞으로 어떤 소리를 추구할 것인지 소개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한국으로 오기 전 츠베덴은 왜 바그너를 선택했는지 이렇게 설명했다. 츠베덴은 이미 홍콩 필하모닉과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녹음해 세계 클래식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미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로 자리를 굳혔다.

2부 첫 곡으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을 들려줬다. 바그너의 다른 오페라 작품과 다르게 유쾌하고 명랑하게 진행되는 희극적 분위기의 묘미를 잘 담아냈다. 플루트는 오페라 속 주인공인 발터 폰 슈톨칭과 에바 포크너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대변했다.

바그너는 자신을 지원해준 후원자의 부인인 마틸데 베젠돈크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그 은밀한 열정과 고뇌를 촉매 삼아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한다. 독창적 음악어법을 확립해 음악사에 위대한 기념비를 세운 이 작품의 첫머리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을 잇따라 연주했다.

츠베덴은 1막이 오르기 전에 연주되는 전주곡에서 서로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관습의 장벽에 막혀 맺어질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의 사랑을 펼쳐냈다. 3막의 마지막 장면은 이졸데가 트리스탄의 주검을 앞에 두고 ‘사랑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오페라 역사상 가장 낭만적 피날레가 역시 츠베덴의 손끝을 타고 흘렀다.

2024년부터 서울시향 음악감독을 맡은 얍 판 츠베덴이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과 첫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새해맞이용 맞춤곡도 하나 넣었다.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는 요즘으로 치면 막장 드라마급 전개를 바탕으로 속물적 인간들의 가식과 허영에 대한 풍자로 가득하다. 거기에 더해 빈 상류 사회의 무도회장을 배경으로 삼은 만큼 멋진 노래와 흥겨운 춤, 코믹한 상황이 넘쳐나 연말연시 단골 레퍼토리다. 츠베덴과 서울시향은 무도회의 우아하고 들뜬 리듬, 유려하고 고혹적인 멜로디 등을 선사해 풍부한 매력과 쾌감을 보여줬다.

츠베덴은 몇 차례의 커튼콜 뒤 앙코르로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춤곡’ Op.46-8을 연주했다. 큰 동작을 하지 않았음에도 목표한 사운드에 근접하는 매직을 선사했다.

이날 츠베덴의 연주는 한마디로 쾌속 질주했다. 거침이 없었다. 공격적이었기 때문에 때때로 섬세하고 예민한 소리를 살리지 못해 아쉬웠다. 그럼에도 서울시향의 포텐(potential)을 끌어냈다. 곧 찾아올 원숙한 서울시향의 꽃길이 눈앞에 선했다. 츠베덴은 오는 7월, 11월, 12월에도 차기 음악감독 자격으로 서울시향과 손발을 맞춘다.

● ‘오징어 게임’ 정재일 작곡가 등에게 신곡 위촉...동시대 음악 계속 연주

2024년부터 서울시향 음악감독을 맡은 얍 판 츠베덴이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향과 첫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에필로그> 얍 판 츠베덴은 이번 서울시향과의 첫 호흡에 앞서 한국 오케스트라를 두 번 지휘한 경험이 있다. 2018년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2021년 KBS교향악단 포디움에 섰다. 그는 “한국을 처음 방문하기 전부터 한국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세계의 많은 오케스트라에서 재능 있는 한국인 단원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음악가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악단을 지휘한다는 것은 충분히 흥분할 만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서울시향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드러낸 것이다.

그러면서 줄리어드 음악원 시절 지대한 영향을 미친 스승 강효 교수에 대한 추억을 말했다. 그는 “지금 내가 가진 바이올린에 관한 모든 지식은 그에게서 배웠다. 그는 음악을 가르치는 방식도 훌륭하지만 인격적으로 매우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이다. 아직도 최고로 존경하는 스승이다”고 말했다. 츠베덴은 19세에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최연소 악장으로 임명돼 16년간 일했다. 지휘에 앞서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2024년부터 ‘서울시향 음악감독 츠베덴’으로 활동할 청사진도 살짝 공개했다. 그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동시대 음악이 없이는 악단의 정체성이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다”라며 “서울시향 프로그램에는 동시대 음악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망한 한국 작곡가들의 신곡들을 모으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고, 흥미로운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들에게 서울시향을 위한 신곡을 위촉하겠다고 덧붙였다.

“여러 작곡가들이 물망에 올라 있습니다.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중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한 작곡가 정재일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이 위촉받은 작품을 완성하는 시점인 2025년에는 올해보다 훨씬 더 많은 신작을 초연할 수 있을 겁니다.”

/eunki@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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