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최근 임윤찬, 조성진, 손열음, 김선욱 같은 젊은 연주자들의 활약은 저처럼 나이 든 연주자에게 큰 자극을 줍니다. 기술적으로는 제가 부족할 수 있어도 가슴을 울리는 연주, 오래 남는 연주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게 해줍니다. 매일 저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셈이죠.”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첫 에세이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를 출간했다. 30일 서울 강남구 오드포트에서 열린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그는 “이 책은 거창한 자서전이 아니다”라며 “일기장에 쓴 제 삶에 특별한 순간을 담았다”고 말했다.
출판사가 여러 차례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처음엔 출간을 꺼렸다. “제 이야기를 책으로 쓸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던 그가 마음을 바꾼 건 최근 겪은 여러 차례의 아픔 때문이다.
2018년 수십 년간 국내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던 이명아 부산아트매니지먼트 대표를 떠나보냈다. 2021년에는 이모와 어머니, 그리고 동료 피아니스트 필립 케윈까지 한꺼번에 그의 곁을 떠났다. 엄청난 쇼크였다.
그는 “잇따라 이어진 최근의 상실에 더해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느꼈다”며 왈칵 눈물을 보였다. 손수건으로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는 모습이 뭉클했다. 그러면서 “최근 떠나보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삶의 모든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책을 쓰는 동기가 됐다”고 밝혔다.
백혜선이 피아노를 처음 배운 것은 4세 때다. 예원학교 2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갔다.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변화경 부부의 가르침을 받았다. 1989년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1995년 29세에 서울대 음대 최연소 교수가 됐다. 10년 뒤인 2005년 미국으로 떠나 두 아이를 키우며 연주자 활동을 이어왔다. 미국 클리블랜드 음악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모교인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겉보기에 항상 ‘꽃길’만 걸은 것 같지만 책의 제목에 좌절이라는 강한 단어를 내세운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는 “제 삶은 늘 좌절의 연속이었다”라며 “하지만 좌절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몇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 놨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인정한 분야는 수영이었어요. 대구 변두리에 위치한 문화센터 수영장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죠. 제가 ‘수영의 천재’가 아닐까 고민할 정도였어요. 열세 살이 되던 해 경북 소년체전에 출전해 경북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러다 ‘거물’을 만났어요. 대구에서 서울로 전지훈련을 왔다가 만난 사람이 나중에 ‘아시아의 인어’로 유명했던 최윤희의 언니였던 최윤정이었습니다. 5개월 후 열린 전국소년체전에 승부를 겨뤘어요. 400미터 자유형이었는데, 200미터 쯤 지나고 나니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벌어졌죠.”
첫 좌절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점차 수영에 흥미를 잃었다. 초등 6학년 여름방학부터는 아무리 연습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최윤정을 따라가려다 죽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회고해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는 깨달았다. 수영은 최고가 되지 못하고 순위권 안에 들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를 좌절 시켰지만, 최고가 되지 않고 순위권 안에 들지 않아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 무언가가 나한테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주위의 칭찬과 인정에 집착하지 않고도 내가 기꺼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는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어떤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피아노였다. 수영 포기라는 좌절 덕에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20대 중반의 백혜선은 요즘말로 잘 나갔다. 거침이 없었다. 1989년 윌리엄 카펠 콩쿠르 1위에 오르며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1990년에는 리즈 콩쿠르, 1991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백혜선은 콩쿠르에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된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하지만 1993년 쓴맛을 봤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나갔다. 언론에서는 당연히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명으로 그를 꼽았다. 본선 1차가 끝나고 콩쿠르 측의 한 유명 감독은 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만약 혜선 백이 떨어지면 저는 이번 콩쿠르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본선 1차에서 실격했어요. 평생 1차에서 떨어진 콩쿠르는 처음이었어요. 눈앞이 핑 도는 것이 머리를 한 대 제대로 맞은 것 같았죠. 마치 이 낙방이 더는 피아노를 치지 말라는 신호 같았어요. 생각해보면 이 자리까지 나를 이끌어 온 것은 순전히 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그 운이 바닥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엄청난 좌절이었다. 그래서 피아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직장을 잡았다. 미국 장거리 전화회사 MCI에 영업직으로 들어갔다. AT&T와 스프린트 등 다른 회사의 전화선을 이용하고 있는 잠재고객에게 MCI의 전화선을 이용하도록 상담 영업을 하는 일이었다. 소질이 있었다. 두 달 만에 매니저 승진 제안을 받았을 정도로 ‘영업의 달인’이 됐다.
그때 스승인 변화경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그는 “선생님, 저 피아노 포기했어요. 음악으로 돈 벌고 사는 건 제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스승은 “마지막으로 차이콥스키 콩쿠르 나가봐야 되지 않겠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너 이거 안 나가면 평생 후회한다. 일단 지원서 내고 생각해”라고 신신당부했다.
안나겠다고 버텼지만 머릿속에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계속 맴돌았다.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과 약속했다. “마지막으로 힘 닿는데까지 준비해 보고 이번에 떨어지면 그때는 피아노를 접자고.” 하루 열 시간 넘게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4년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로 입상했다. 콩쿠르 탈락이라는 좌절 덕에 일어선 것이다.
결국 그의 생존 비결은 오로지 연습이었다. 그는 “피아니스트의 반복 연습은 운동선수의 ‘근육 강화 훈련’과 같다”고 했다. 비법은 또 하나 있다. 무슨 곡이든 ‘틀리지 않고 100번 연습하기’다. 그는 “나중에 무대에서 실수가 줄어드는 건 물론, 지루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언제나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이어 “쉼 없이 연습하는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지 않는다. 오히려 연습을 멈췄다가 다시 시작했을 때 굳은살이 생긴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고 말했다.
서울대 음대 교수로 부임해서도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자발적 좌절’을 감행했다. 교수 타이틀만 달면 인생 모든 게 저절로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일해보니 연주나 교육 여건이 자신과 맞지 않았다.
“음악은 손가락이 아니라 귀로 하는 건데, 귀를 더 망치는 환경에서 음악을 하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싶었어요. 서울대에 있던 10년간 굉장히 안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는 마음속 외침이 계속 있었습니다. 결국 사표를 내고 미국에 가서 연주자로서의 커리어에 다시 도전하게 됐죠.”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미국 무대는 쉽게 연주 기회를 내주지 않았다. 지방 도시를 돌며 연주 활동을 이어간 7~8년의 시간 역시 그에겐 좌절과 극복을 반복한 시기였다. 그는 “동양인으로서, 연주자로서 세계무대에 나가는 것도, 또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동안 교수 활동과 지방 도시 공연에 매진했던 그는 오는 4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독주회를 시작으로 국내에서 연주 활동을 늘려갈 계획이다. 11월엔 인천시향과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공연도 예정돼 있다.
많은 젊은 연주자들의 롤모델로 꼽히는 그지만 여전히 음악적으로도 좌절과 극복을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대가의 솔직 고백이 감동이다.
“요즘 후배들의 연주를 들으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K팝 뺨치는 K클래식을 만든 주인공들이죠. 파워도 부럽고요. 제가 힘으로 이들과 어떻게 겨루겠습니까. 그들의 빼어난 실력에 음악적 좌절을 느끼죠. 다만 관객 가슴을 울리고 자극하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좋은 책을 읽었을 때처럼 상상하게 하는 연주를 하기위해 고민할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 음악을 오랫동안 남게 할까 연구하고 연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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