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누군가 나에게 연주자의 직업윤리를 물을 때면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직업인으로서의 연주자는 변명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만...”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어깨가 좀 결리니 이해해주세요” 하는 말을 하지 않는, 할 수 없는 사람이 연주자다. 어떤 불상사가 닥치든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 안에서 최선의 것을 가져와야 한다. 아니, 애초에 변명 따위를 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59쪽>
<“그렇게 많이 치면 손에 굳은살이 박이지 않아요?” 그 말에 나는 무심코 내 엄지손가락으로 손끝을 문질러본다. 짧게 자른 손톱 아래로 말랑말랑하고 만질만질한 살이 느껴진다.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쳐온 뒤로 거의 항상 느껴온 촉감이다. 그럼 그렇지, 당연하고 다행인 일이다. 연주를 많이 하면 굳은살이 박인다는 것은 사람들이 많이들 가진 오해다. 굳은살이란 오히려 피아노를 한동안 치지 않았다가 오랜만에 쳤을 때야 박이는 것이다. 고로 굳은살이 박였다는 것은 곧, 그 연주자가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뜻이 된다.--71쪽>
‘좌절 앞에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좌절을 다른 무엇인가로 승화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들려줄 수 있는 한 명의 음악가가 있다. 한때 처참한 탈락으로 피아노를 포기하고 전화회사의 영업사원이 되기까지 했으나 꿈의 무대에 오르기 위해 다시 건반 앞에 앉은 피아니스트. 동양인 여성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고 비웃던 관객들에게 감동의 연주를 들려줘 모두 기립 박수를 치게 만든, 그리하여 한국 국적으로서는 처음으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상위에 입상해 세계에 이름을 알린 연주자.
서울대 음대 사상 최연소의 나이에 교수가 됐지만 더 활발한 연주 활동을 위해 10년 만에 교수직을 내려놓고 홀로 광야로 떠난 개척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 땅에서 홀로 갓난아이들을 키우는 생계형 피아니스트였으나 지금은 세계적인 명문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두 아들·딸을 모두 하버드 대학교에 보낸 교육자.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백혜선의 이야기이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은 50여 년의 세월 동안 얻은 인생 내공을 한 권의 에세이에 담아냈다. 일본 사이타마현 문화예술재단이 선정한 ‘현존하는 세계 100대 피아니스트’에 이름을 올린 백혜선의 첫 책이 다산북스에서 오는 26일 출간된다. 제목은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292쪽·1만600원).
1989년 뉴욕 링컨센터 앨리스 툴리 홀에서 프로로서 첫 독주회를 치르며 국제무대에 데뷔한 지 어언 30년이 훨씬 넘었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현역 연주자다.
또한 스승인 러셀 셔먼의 뒤를 이어 모교인 뉴잉글랜드 음악원의 교수로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스승으로서의 일을 결코 놓치지 않으며, 연주자와 교육자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왕성한 에너지의 소유자다.
이 책은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네 살 때 건반 앞에 앉은 뒤로 50년이 넘도록 연습과 연마를 거듭해오며 깨달은 인생 내공을 무겁지 않은 문체로 담은 에세이다.
흔히 사람들은 연주자를 보며 빛나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의 화려한 모습만을 기억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연주자가 지닌 극히 일부의 측면에 불과하다. 실제로 연주자의 인생은 당장이라도 음악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좌절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혜선이 이 책에서 주로 보여주려는 것도 연주자의 영광이 아닌 좌절의 순간들이다. 그는 여기서 누구나 갖고 있는 아름답고 정제된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가장 못생긴 발’을 내밀기로 했다. 30여 년의 국제무대 경력 동안 꼽은 최악의 연주, 콩쿠르 탈락 후 음악과 담을 쌓고 지낸 슬럼프 시기, 사람도 잃고 돈도 잃은 채 미국에서 생계형 피아니스트로 지낸 불우한 시간마저 고백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런 어둡고 부족한 면모들이 자신의 내면을 훨씬 더 정확히 표현해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고단했던 순간을 서술하는 중에도 그에게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생을 향한 의지이자 음악적으로 자신을 거듭 계발하려는 집념이다. 유머러스하고 가볍고 편한 문체로 글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힘주어 말한다. 좌절이란 곧 특권이라고. 즉, 좌절과 불안과 걱정은 성장하는 사람에겐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가 되었건 ‘여기가 종착역’이라며 눌러앉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당부하고, 앞으로 찾아올 좌절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며 백혜선은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다.”
한국 클래식이 이제 막 세계로 뻗어나가기 전, 그 어두운 길목에 백혜선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콘서트홀, 러시아 음악인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음악인이라면 인생에 한 번쯤은 서고 싶어 하는 이 꿈의 무대에 젊은 동양인 여성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등도 꺼지지 않아 환히 보이는 객석에서 관객들은 ‘네가 얼마나 하는지 보자’ 하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회 마지막 순서였으니 비웃는 얼굴로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듬성듬성한 객석을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당시는 동양인 남성 연주자가 콩쿠르 무대에 오르면 객석의 반이 남고, 동양인 여성 연주자가 나오면 반의반이 남는 시대였다.
동양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은 청중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였다. 연주를 하기 전에 가볍게 목례하며 마주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표정은 한 시간 전의 리허설 때와 마찬가지로 피로하고 무관심했다. 무대 위에서 최고의 아군이어야 하는 오케스트라가 연주자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199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이야기다. 백혜선은 무표정한 오케스트라와 비웃음을 띤 객석을 양옆에 두고 스승인 변화경의 말을 떠올린다. “오늘 무대 위에서 네가 할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거야. 음악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 이 순간만큼은 그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기로 한 그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연주를 시작한다.
시베리아의 칼바람과 추위에 꽁꽁 언 몸을 난로 앞에서 천천히 녹이는 기분. 음악은 사람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언어이기에, 한쪽에서 높은 호소력을 실어 대화하다보면 다른 한쪽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악장을 마치고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관객에게 인사를 하며 그가 마주한 것은 끊이지 않는 뜨거운 박수갈채였다.
눈에 보이는 표정마다 다들 미소를 띠고 있었고 가끔은 눈시울을 닦는 청중도 있었다. 백혜선은 이 대회에서 1위 없는 3위에 오르며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최초로 상위에 입상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손열음, 김선욱, 조성진, 임윤찬 등 지금은 한국의 연주자들이 세계 클래식계를 휩쓸고 있으나 한국 연주자에게 놓인 길이 늘 밝고 매끈했던 것은 아니었다. K클래식의 부흥은 그동안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리고 길을 닦아왔던 선배 연주자들의 헌신과 노력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특히 여성 연주자로서 백혜선의 업적은 독보적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자신의 롤모델이자 최고의 스타로 꼽을 만큼 백혜선은 성공한 여성 피아니스트가 극히 드물었던 시대에 한국의 여성 연주자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닦으며 그 길을 자신도 직접 걸어간 인물이다. 이 책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에는 그 험난한 과정에서 백혜선이 부딪힌 벽과 좌절, 극복의 경험, 그러면서 배운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다.
이 책은 자서전으로 쓰이지 않았다. 중견의, 어쩌면 이제 점차 노장이 되어갈 피아니스트가 과거를 회고하는 자세로 집필되지 않았다. 백혜선은 자신의 음악 인생을 크게 구분 짓는다면, 어릴 적 피아노를 접하고부터 미국에 건너간 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하기까지를 제1기, 최연소로 서울대 음대 교수에 임용되고 나서 겪은 부침부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어렸던 아들딸이 성장하고 선생이자 연주자로 다시 선 지금까지를 제2기, 그리고 앞으로 맞닥뜨릴 시기를 제3기라고 칭한다. 이 책은 앞으로 있을 제3기의 활동에 앞서 던지는 출사표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책의 후반부에서 백혜선은 나이 들어가는 연주자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한국 클래식계의 좋은 인프라와 환경에서는 점점 더 뛰어난 연주자들이 새롭게 나타날 것이다. 지금 음악계에서 화제인 천재들보다도 더 훌륭한 천재들이 거듭 나올 것이다. 그때 나이든 연주자의 자리는 어디일까.
이에 백혜선은 선생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못다 한 것은 후배나 제자들이 한다면 충분하다면서도, 이대로 자신의 음악적 성장을 끝낼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후배 연주자들의 길을 응원하는 동시에, 연주에 있어서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거장의 집념이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음악 외길을 걸어오며 수없이 좌절하고 극복해온 거장의 솔직한 고백이 담긴 이 책은, 같은 음악의 길을 걷고 있는 후배 음악인, 백혜선의 이름에 익숙한 클래식 애호가뿐 아니라 뜨겁게 사느라 좌절한 일도 많은 젊은 독자 대중에게 큰 위로와 힘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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