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김일환 기자] “깊은밤 소리없는 침묵의 바다 / 해와 달도 빛을 잃고 어두운데 / 멀리서 들리는 전쟁의 북소리 / 칼에 베어 버려진 주검마다 / 하얀 옷에 피맺힌 통곡있네 / 아 천지신명이시여 천지신명이시여”
대금 서주가 끝나자 테너 김지호가 비장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솔로 파트를 불렀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장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 뒤를 남성들의 합창이 든든하게 받쳐줬다. 하늘에 닿을 듯한 웅장함이 콘서트장 맨 뒤에까지 빈틈없이 채워졌다.
“쌍용검 높이 들어 죽음으로 죽음으로 맹세하오니 승리를 주소서 / 신에게는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기필코 이기겠다는 맹세는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모두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죽어 길을 열리라 / 내가 죽어 길을 열리라 / 앞서 가니 나를 따르라 / 우리 끝내 이기리라” 명량 앞바다의 거센 물결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한 사나이의 함성이 우렁차다.
잊고 있던 애국심이 불쑥 솟아났다. 양재무 음악감독이 이끌고 있는 ‘남성 보이스 오케스트라’ 이마에스트리(I Maestri)가 오페라 ‘이순신’에 나오는 아리아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를 세계 초연했다.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창단 18주년 기념 정기연주회 ‘좋음에서 위대함으로(Good to Great)’에서 첫선을 보여 환호와 갈채를 받은 것.
양재무 감독은 지난해부터 한국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위인들을 조명하는 ‘영웅 시리즈’ 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 시도로 오페라 ‘안중근’을 작곡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정기연주회 때 ‘영웅 안중근을 위한 서곡’과 ‘장부의 기상 구름과 같고’를 살짝 공개했다. ‘장부의 기상 구름과 같고’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 ‘장부수사심여철, 의사임위기사운(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즉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다’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양 감독은 올해부터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또 다른 오페라 ‘이순신’도 동시에 작곡하고 있다. 최근 오페라 속 가장 극적인 노래 중 하나인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를 완성했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전투를 앞두고 장수로서의 결의와 용맹이 느껴지고, 순결하고 고귀한 조국애가 일렁이는 곡이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선조는 “해전이 불가능할 경우 육지에 올라 도원수 권율을 돕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장군은 급히 장계(왕에게 보내는 문서)를 올린다.
피를 통하는 심정으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전선수과(戰船雖寡) 미신불사즉(微臣不死則) 불감모아의(不敢侮我矣)’라고 적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전선의 수가 절대 부족하지만, 보잘 것 없는 신이 살아 있는 한 감히 적은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나라를 생각하는 절절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 글에서 힌트를 얻어 아리아를 만들었다. 노래하랴 사회보랴 1인 2역을 수행한 테너 장일범은 “2025년 남성들만 출연하는 오페라 ‘이순신’을 초연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내후년이 기대된다.
피날레 곡도 귀를 사로잡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 ‘Ode to Joy(환희의 송가)’를 세계 최초로 남성 성악가 88명의 목소리로 선사했다. 원래는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테너, 바리톤이 솔리스트로 출연하지만 웅장한 남성들의 소리(테너 솔로 이규철·베이스 솔로 안대현)로만 들려줬다. 여성 파트도 두 남성 성악가가 소화했다. 세계는 하나다, 우리는 인류애로 뭉쳐야한다 등의 메시지를 전달해줬다. 내년이 합창 교향곡 초연 200주년이 되는 해라 더 의미가 깊었다. 장일범은 “세계 최초로 남성버전으로만 연주했으니 여러분은 지금 기네스북 등재 현장에 있는 것이다”라고 재치 있는 멘트를 날렸다.
이날 공연은 양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조이 오브 스트링스’와 ‘카로스 타악기 앙상블’이 반주를 맡았다. 피아니스트 최지은과 대금 연주자 김은영, 그리고 풍성한 금관 사운드(호른 김효정·박지용, 트럼펫 김슬기·알렉스 볼코프)도 힘을 보탰다.
프로그램은 모두 3개의 섹션으로 나눠 진행됐다. 첫 섹션 ‘낙원을 여는 자들’에서 양 감독은 수도사 스타일의 복장을 입고 혼자 나와 포디움에 올랐다. 영화 ‘1492 콜럼버스’의 테마음악으로 사용된 반젤리스의 ‘Conquest of Paradise(낙원의 정복)’로 힘차게 오프닝을 열었다.
반주에 맞춰 역시 수도사 복장을 한 단원들이 무대 앞쪽에서 서로 교차하며 등장했다. 멋지고 강렬한 입장이다. 테너 파트는 오른쪽에서 나와 왼쪽으로, 바리톤·베이스 파트는 왼쪽에서 나와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무대가 꽉 찼다. “그들은 신대륙 발견의 위대한 희망을 위하여 깊은 밤을 걸어야만 했다”를 반복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지난 18년 동안 K클래식의 대표 콘텐츠로 도약한 이마에스트리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음악 같았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 나오는 ‘This is the Moment(지금 이 순간)’는 마지막 부분에서 테너 김재일의 아~아~ 추임새가 돋보였고, 웨버의 ‘레퀴엠’ 중 ‘Pie Jesu(자애로운 예수)’에서는 테너 전병호의 미성이 반짝였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중 ‘The Impossible Dream(불가능한 꿈)’에서는 바리톤 오동규의 “그래 끝내 이르리라, 저 별을 향해”라는 진심 어린 응원에 소름이 돋았다.
두 번째 섹션 ‘아름다운 사람들’에서는 모든 출연자들이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번에는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겠다는 시그널이다.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나이다’에 이어 ‘칼의 노래’(신병하 곡)를 연주했다. 김태형이 테너 솔로 파트를 맡았다.
이어 이마에스트리는 ‘아름다운 사람’(김민기 곡) ‘사랑이 지나가면’(이영훈 곡) ‘내나라 내겨레’(송창식 곡)를 잇따라 선사했다. 특히 ‘내나라 내겨레’에는 원곡에 없는 애국가를 살짝 삽입해 뜨거운 마음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노래가 끝나는 듯해 박수소리가 나왔는데, 잠시의 멈춤 후 마지막 부분 ‘대한! 대한! 만세! 만세!’를 이어 불러 뭉클했다. 아 이게 노래의 힘이구나, 모두들 실감했다.
이처럼 대중가요도 클래식 작품으로 변신시키는 이마에스트리의 비결은 작곡자·편곡자 라인업에 있다. 양재무, 정한결, 장민호, 박용빈, 정세담, 박건욱 등이 남성 합창에 딱 맞게 모든 곡을 갈고 다듬는다.
마지막 섹션 ‘환희여 노래하라’에서는 먼저 스페인 가곡 ‘Granada(그라나다)’를 연주했다. 멕시코 작곡가 아구스틴 라라가 작곡했는데, 그는 정작 스페인의 그라나다를 가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곡을 썼다. 트럼펫의 시원한 사운드가 흥을 돋웠다.
라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 나오는 ‘Di rigori armato il seno(마음을 완전 무장하고)’는 테너 김충식이 솔로 파트를 맡았다. 독일어 오페라인데 이 곡만 유일하게 이탈리어로 부른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빅히트곡 ‘My Way(나의 길)’는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걷는 한 남자의 일생이 오버랩되며 숙연했다. 자크 루보와 질 틸보가 작곡했고 프랑스 가수 클로드 프랑수아가 ‘Comme D’habitude(콤 다뷔튀드·‘평소처럼’ ‘습관처럼’이라는 뜻)’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가수 폴 앵카는 이 곡을 듣고 반해 가사를 새로 써 붙인 뒤 사나트라에게 줬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곡으로 베토벤 ‘Ode to Joy’를 들려줬다.
이마에스트리는 앙코르도 스페셜했다. “소리 높여 외쳐라 하늘이 떠나가게 / 손에 손을 맞잡고서 다함께 노래 부르세” 우리에겐 ‘우정의 노래’라고 알려진 ‘슈타인 송(Stein Song)’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이어 ‘봄바람 난 년들’(권나현 시·조혜영 곡)을 불렀다. 매화·목련·제비꽃·진달래 등 봄꽃들이 활짝 피어난 광경을 봄바람 났다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곡이다. 특히 솔로 파트를 맡은 바리톤 석상근이 절로 웃음 나게 만드는 노랫말에 어울리는 ‘숭구리당당 퍼포먼스’를 선보여 환호를 받았다.
마지막 앙코르는 관객 모두가 출연자와 함께 노사연의 ‘만남’을 합창했다. 양 감독은 2절에서 관객들을 바라보며 지휘했다. 콘서트장은 어느새 휴대폰 플래시를 활용한 ‘반딧불 세리머니’로 가득했다. 2019년 공연부터 등장한 이마에스트리의 시그니처 퍼포먼스다. 모두들 일어나 불빛을 좌우로 흔들려 명품 공연을 즐겼다. ‘역시 이마에스트리’라는 찬사가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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