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생각해보세요. ‘돌밭이라도 길가라도’라는 시어가 얼마나 형편없는 말입니까.” 이안삼은 버럭 화를 냈다. 처음 생각한 대로 악상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자, 노랫말을 쓴 시인 장장식에게 성질 급한 성정을 숨기지 못한 채 쏘아붙였다. 좋은 곡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큰데, 뜻대로 전개되지 못하자 애꿎은 시인에게 속 보이는 화살을 돌린 것.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마음에 딱 드는 선율을 찾아내고는 금세 돌변했다. “참 멋져요. 정말 멋진 가사입니다”라며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면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디스’를 하더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추앙’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작곡가 이안삼은 이렇게 인간적이었다고 장장식 시인은 고백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시인은 이안삼과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작곡가는 ‘그대가 꽃이라면’의 노랫말을 받아 들고는, “딸이 생각나 눈물이 난다”라며 딱 들어맞는 선율을 찾으려 애썼다고 한다. 이안삼은 시에 나와 있는 민들레를 딸로 해석했던 것. 장장식은 “작곡가는 한참을 고민하다 ‘솜털에 실어가는 그대는 민들레’에 이르러서야 단숨에 오선지를 채웠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선생은 가사를 읽으며 당신의 따님을 위해 작곡에 최선을 다했다”고 설명했다.
장 시인은 깜짝 놀랐다. “선생님, 저 역시 딸을 위해 이 시를 썼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안삼 작곡가도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필연의 우연’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결국 ‘그대가 꽃이라면’은 ‘이 땅의 딸들을 위한 찬가’로 애창되고 있는데,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장 시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필연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라며 이안삼과의 행복한 인연을 추억했다.
<그대가 꽃이라면 민들레 하얀 민들레 / 수많은 별들이 떨어져 피었다는 민들레 / 하늘에서 왔으니 앉을 곳을 가렸겠나 / 돌밭이라도 길가라도 애써 가렸겠나 / 별 같은 마음으로 지친 땅에 꿈을 심고 / 험한 세상 솜털에 실어가는 그대는 민들레 / 하늘에서 왔으니 그대는 민들레
그대가 꽃이라면 민들레 하얀 민들레 / 수많은 별들이 떨어져 피었다는 민들레 / 낮은 자리 피었으니 화려함을 드러낼까 / 돌 틈 사이 담장 가에서 힘주어 고개 들까 / 별 같은 마음으로 거친 땅에 사랑을 주고 / 험한 세상 솜털에 실어가는 그대는 민들레 / 하늘에서 왔으니 그대는 민들레>
한국 예술가곡의 거장 이안삼(1943~2020)을 추모하는 ‘제3회 이안삼 가곡제’가 지난 23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렸다. 소프라노 김성혜·김지현·이윤숙·임청화·정선화·정혜욱, 테너 이재욱·이정원·이현, 바리톤 송기창·장철준 등 출연 성악가 11명이 관객과 함께 피날레 합창곡으로 ‘그대가 꽃이라면’을 불렀다.
절묘한 선곡이다. 딸을 생각하며 시를 썼고 딸을 생각하며 작곡했다지만, 한마음으로 노래하는 동안 이 땅의 모든 딸과 아들·어머니와 아버지·친구와 후배·직장 동료와 이웃 등 우리 모두를 위한 아름다운 찬가가 됐다. 하늘에서 내려온 수많은 별들이 함께 노래하는 풍경은 올해의 베스트 컷이다. 모두가 험한 세상 솜털에 실어가는 민들레가 됐다. 하늘나라 이안삼 선생도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 보았으리라.
올해 세 번째 이안삼 가곡제는 씨줄과 날줄처럼 오랜 시간 이안삼과 연을 맺은 시인 20명이 참여했다. 프로그램 선곡은 이안삼의 곡을 바탕으로 시인들의 신청곡 중 다른 작곡가의 작품도 추천받아 반영했다. 발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숨은 명곡으로 묻혀있는 이안삼의 곡을 많이 배치했다. 가곡제의 위상을 넓히고 이안삼 작곡가가 생전에 한국 예술가곡 부흥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한 뜻을 살리고자 했다. 그래서 이안삼 작곡가의 18곡과 초청작곡가 7명(김동진·김성희·박경규·윤학준·임긍수·정덕기·정영택)의 가곡 7곡 등 모두 25곡이 연주됐다.
피아니스트 이성하와 장동인이 번갈아가며 성악가들과 호흡을 맞춰 환상케미를 보여줬다. 강지현(첼로)과 김희영(바이올린)도 반주에 참여해 풍성함을 더했다. 김정주 시인이 기획을, 김문기 작가가 사진·영상을 맡아 꼼꼼하게 음악회를 준비했다.
소프라노 김성혜는 먼저 ‘내 마음’(김동명 시·김동진 곡)을 불렀다. 이 곡을 고른 것은 이안삼과 김동진(1913~2009)의 사제 인연을 되새겨보려는 마음 때문이다. 이안삼은 서라벌예대에 입학해 평생의 스승 김동진을 만났다. ‘가고파’ ‘목련화’ 등의 명곡을 쓴 선생이 어느날 작곡과로 전과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악기를 다루는 재능보다 오히려 곡을 쓰는 실력이 더 뛰어남을 단박에 알아본 것. 이 한마디에 트럼펫을 내려놓고 대신 오선지를 들었다. 스승이 경희대 음대로 자리를 옮기자 그도 스승을 따라 경희대 작곡과로 옮겼다. 김성혜의 목소리를 타고 호수 위에 그려진 둥근 물결처럼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경포 연가’(한상완 시·임긍수 곡)는 잘 구성된 웰 메이드 드라마처럼 술술술 귀를 사로잡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 지금 바로 차를 몰고 경포대로 달려가 향내 오묘한 해당화를 만나보고 싶었을 정도다. ‘위로’(고옥주 시·이안삼 곡)는 언제 들어도 릴렉스되는 힐링송이다. 더 목청을 높일 수도 있지만 안으로 삭혀 스스로 음을 절제하는 스킬이 놀랍다. “너를 알기 위해 이 세상을 살아보는 것이다”라는 김성혜의 클라이막스가 엑설런트하다.
소프라노 김지현은 ‘어느 날 내게 사랑이’(다빈 시·이안삼 곡)에서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에 어찌할 줄 모르는 여인의 속내를 섬세하게 담아냈다. “긴 세월 가슴에 품은 그대의 고백 / 맴돌고 맴돌다 하늘에 던진 진주처럼”을 노래할 땐 밤하늘 영롱히 빛나는 푸른 별빛이 몸을 감쌌다.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더욱이 그 대상이 연인이라면, ‘어디쯤 오고 있을까’(김명희 시·이안삼 곡) 생각하는 일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또한 환희다. 김지현은 해와 달이 흐르듯 내 가슴도 흐르는 시간을 부여잡고, 오는 듯 모르게 찾아올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을 노래했다.
소프라노 이윤숙은 절절한 아임 미싱 유(I’m missing you)를 표현한 ‘그대 그리움’(정성심 시·박경규 곡)과 하양 목련빛·연분홍 진달래빛 넘실대는 ‘나지막한 소리로’(고영복 시·이안삼 곡)로 실력을 발휘했다.
소프라노 임청화는 삶을 관조(觀照)하는 묵직한 울림을 들려줬다. 먼저 김희영의 바이올린을 곁들여 ‘흐르는 강물처럼’(서영순 시·정영택 곡)을 연주했다. 늘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한 강물처럼 세상을 살아가라는 지혜가 가슴을 두드렸다. ‘오월의 노래’(공한수 시·이안삼 곡)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하든 반드시 이루어 질것이라는 긍정 메시지를 전해줬다. 한국가곡에서는 드물게 탱고 리듬를 가미한 ‘금빛 날개’(전경애 시·이안삼 곡)는 이안삼이 매진했던 클래팝의 대표곡이다. 콘서트장을 흥겨운 분위기로 확 바꾸어 놓았다.
소프라노 정선화는 ‘그대가 꽃이라면’(장장식 시·이안삼 곡)에 이어 ‘고독’(이명숙 시·이안삼 곡)을 노래했다. “그대 구름으로 쉼 없이 흘러갈 때 / 내 아픔은 언덕위에 작은새 되어 앉았네”에서 홀로 남은 상실감을 베테랑답게 극대화해 펼쳐냈다.
‘마중’(허림 시·윤학준 곡)은 요즘 2030들도 즐겨듣는 최애 가곡이다. MBC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의 아역배우 출신인 소프라노 정혜욱은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라는 감각적인 시어에 애틋한 마음을 담아 전달했다. ‘진주의 노래’(최숙영 시·이안삼 곡)에서는 알알이 구슬로 꿰어 고이 간직했는데도 아직 수많은 진주알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꿈꾸는 심리를 잘 잡아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재욱·이현·이정원의 스리 테너 무대가 빛을 발했다. 아무리 운명이 가혹해도 한 생을 바친 사랑은 영원히 눈부신 법. 이재욱은 ‘그 사랑’(노중석 시·이안삼 곡)을 통해 간절한 기도의 대답이 절망으로 돌아와도 어둠 속에서 별빛으로 빛나는 사랑을 예찬했다.
이현은 ‘산’(이향숙 시·이안삼 곡)과 ‘물한리 만추’(황여정 시·이안삼 곡)로 한국적 풍경을 힘차게 그려냈다. “다가서면 더 멀리 그러다가 어느새 가까이 있는 / 잡아도 잡히지 않을 당신이다” 사시사철 우리 앞에 우뚝 서있는 산을 사랑하는 연인으로 비유한 재치가 넘친다. 묵묵히 곁을 내어주는 산의 미덕을 담담하게 노래하던 이현은 “산자락도 오르지 못할 그래 당신이다”에서는 거친 남성미를 뽑아냈다.
물한리는 충북 영동에 있는 계곡이다. 어느해 늦가을, 시인은 그곳을 방문했다가 굽이굽이 산자락 돌아가며 하얗게 피어나는 가을햇살을 본다. 낙엽송 가지마다 노을이 곱게 물들었다. 마른 억새풀도 어스름에 조용히 눈감고 잠드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현은 깊은 골 물한리의 11월 늦가을 정취를 8월로 미리 앞당겨 보여줬다. 천년을 흘러도 변치 않을 물한리의 숨결을 이끌고 와 콘서트홀 가득히 퍼뜨렸다.
‘황혼’(이안삼 시·곡)은 이안삼이 직접 가사를 쓴 유일한 노래다. 김천중과 김천고에서의 오랜 교직 생활 마무리를 앞두고, 지난 60년의 인생을 돌아보는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술가곡의 거장이지만 일부러 가요풍으로 곡을 썼다. 마침 노랫말이 처음 떠오른 장소도 막걸리집 이었기 때문에 일부터 귀에 익숙한 음을 선택했으리라. 이정원은 애써 고음을 올리지 않고 평이하게 불렀는데 이게 오히려 더 감동이다. “노을길 걸어가리라”라는 마지막 부분에서 살짝 액센트 한번 줬을 뿐인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뚜벅뚜벅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한 사나이가 오버랩됐다.
유자효 시인은 이안삼이 이끌던 ‘포럼, 우리 시 우리 음악’을 박경규 작곡가에게 넘길 때 시인을 보강하자는 취지로 영입됐다. 그때 처음 이안삼 선생을 만났는데 무척 반기며 “곡을 붙이기 좋은 시를 몇 편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 시인은 신작시조 ‘사랑하는 아들아’를 포함해 운율이 있는 시를 몇 편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가곡 발표회에 초대를 했다.
“전주 부분부터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당시 이정원 테너의 열창을 들으며 시가 작곡가에 의해 완전히 재탄생됨을 알았습니다. 시는 노래가 됨으로 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임을 알았지요. 충격이었으며 새로운 세계로의 개안이었습니다. 완전히 매료된 저는 신작 시조집을 낼 때 제목을 ‘사랑하는 아들아’로 했습니다. 선생님의 노래가 없었다면 아마도 다른 제목을 달았겠지요. 저는 선생님의 곡을 시집 제목으로 빛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 시인은 이안삼 가곡제 프로그램북에 이안삼과의 추억을 이렇게 적었다. 그러면서 육신의 선생님은 가셨지만 남기신 가곡들에 의해 영생을 누리고 계신다고 덧붙였다. “좋으면 갖고 싶지 그것이 당연하지 / 그러나 안되는 게 더 많은 세상에서 / 참아라 이 말만 거듭 거듭 피 토하듯 뇌인다” 이정원의 목소리를 타고 ‘사랑하는 아들아’(유자효 시·이안삼 곡)가 흐르자 자식에게 전해주는 금과옥조(金科玉條) 아버지의 가르침이 애틋하다.
여름 한철, 자신이 살아있음을 쩌렁쩌렁한 소리로 선포하는 매미의 일생은 뭉클하다. 7년 동안의 땅속 생활과 2주 남짓의 바깥 생활로 생을 마감하는 한살이를 생각한다면, 그의 울부짖음을 귀에 거슬리는 소음공해로 인식하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만든다. 바리톤 송기창은 해학적 선율미가 돋보이는 ‘매미’(김필연 시·정덕기 곡)를 노래했다. “나 떠나오~ 나 떠나오~ 매앰~” 마지막 부분에서 매앰 효과음을 실감나게 표현해 한바탕 웃음을 선사했다.
‘그리운 친구여’(정치근 시·이안삼 곡)는 바리톤에 특화된 음악이다. 나지막한 저음으로 불러야만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게 해준다. “네 이름을 부르면 내 눈에는 눈물이 자꾸만 고이네” 송기창의 고요한 애절함에 많은 관객이 스마트폰 속 고등학교 친구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검색하며 ‘보고 싶다 친구야’를 외쳤으리.
바리톤 장철준은 ‘사랑’(조영황 시·김성희 곡)을 불렀다. 어떤 때는 애원하고 어떤 때는 닦달하며 절절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 첼리스트 강지현이 중간 중간 첼로 선율로 반주에 참여해 더욱 풍성한 음악을 선물했다. 이어 ‘황혼의 숲’(조재선 시·이안삼 곡)에서는 넉넉한 숲에서 위안을 얻어가는 기쁨을 노래했다.
1부와 2부의 마지막곡은 3중창으로 준비했다. 정혜욱·이재욱·송기창은 “너를 위해 향기로 남는 기도 드린다”는 간절함이 녹아있는 ‘그 사람’(전세원 시·이안삼 곡)으로 고운 당신과 함께 하는 봄의 서정을 드러냈다.
이재욱·이정원·이현은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문효치 시·이안삼 곡)에서 거칠지만 섬세한 용광로 사랑을 뿜어냈다. 삼중창으로 예고돼 있었지만 처음엔 이재욱과 이현 두 사람만 무대로 나와 ‘무슨 사고가 생겼나’하고 걱정이 됐다. 하지만 깜짝 퍼포먼스였다. 2절이 시작되자 이정원이 “빛깔 없어 보이지 않고 / 모형이 없어 만져지지 않아 /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라며 등장하자 힘찬 박수를 받았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무대에 살짝 파격의 미를 가미한 것. 세 테너는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하면 금세 사랑이 되는 매직 보이스를 뽐냈다.
이날 공연은 온전히 노래에 더 집중하기 위해 사회자를 따로 세우지 않고 무대 스크린에 곡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25곡을 차례대로 연주했다.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 모든 곡이 끝난 뒤에 장장식·김정주 시인이 참석한 작곡가와 시인을 소개했다. 제4회 이안삼 가곡제는 내년 8월 17일(토) 오후 7시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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