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비즈 민은기 기자] “등불을 끄고 자려 하니 / 휘영청 창문이 밝으오 / 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 달은 어여쁜 선녀같이 / 내 뜰 위에 찾아오다 / 달아 내 사랑아 / 내 그대와 함께 / 이 한밤을 이 한밤을 / 애기하고 싶구나”
세계 최고의 베이스로 손꼽히는 연광철은 열세 살 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충주 산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전기가 없으니 밤은 온통 고요한 어둠이었다. 사기(도자기)로 만든 호롱에 석유를 넣고 심지를 돋워 불을 밝혔다. 유일한 조명기구였다. 그나마 기름 아낀다고 오래 켜지도 못했다.
묵직한 저음에 실려 ‘달밤’(김태오 시·나운영 곡)이 흐르자 콘서트장에 정말 환한 달이 뜬 것 같았다. 실제로 등불을 끄고 자려 하니 휘영청 창문이 밝은 시절을 살았으니, 노래가 더 생생했다. 어린 때를 추억하는 곡이 됐다. 부르는 사람도 아련한 시절로 타임워프했고, 듣는 사람도 1960년대와 197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애써 힘을 넣지 않고 자신이 부를 수 있는 만큼만 소리를 냈다. 그래서 자연스러웠다.
연광철이 한국 가곡의 매력을 선사했다. 최근 풍월당에서 내놓은 한국 가곡 앨범 ‘고향의 봄’ 발매를 기념해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음반에는 모두 18곡을 담았는데, 앨범 수록곡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피아노 듀오 ‘신박’의 신미정이 반주를 맡았다.
서로 엇비슷한 분위기의 곡을 묶어 3곡-3곡-3곡-2곡-2곡-3곡 등 모두 여섯 개의 묶음으로 리사이틀을 이끌어 갔다. 허투루 부르지 않고 깊은 의미를 담으려는 세심한 배려다.
먼저 초기 한국 가곡을 이끌던 홍난파에 초점을 맞춰 그의 대표작 ‘사공의 노래’(함호영 시) ‘옛 동산에 올라’(이은상 시) ‘사랑’(이은상 시)을 불렀다. ‘사공의 노래’는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 물 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 / 이 배는 달 맞으러 강릉 가는 배 / 어기야 디어라 차 노를 저어라”라는 가사에 걸맞게 오프닝곡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연광철은 베테랑이다. ‘옛 동산에 올라’(이은상 시)에서는 다시 고향에 돌아왔지만 너무도 많이 변해 옛 흔적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오는 비통함을 절절하게 담아냈고, ‘사랑’(이은상 시)에서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아낌없는 그레이트 러브의 위대함을 표현했다.
연광철은 지난달 초 음반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30년 동안 외국에서 활동하며 그들의 작품과 문화를 잘 이해하고 해석해 그들의 정서에 맞는 감동적인 노래를 불러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번 우리 가곡 음반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모든 단어와 뉘앙스, 전체적인 맥락, 여러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들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 불러도 듣는 분들이 공감할 수 있어 기뻤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달빛 이야기를 꺼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생각하면 사람마다 떠올리는 그림이 다 다를 겁니다. 제가 산골에 살면서 봤던 보름달의 느낌과 독일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가는 허허벌판에서 봤던 달은 같은 달이지만 분명 다르죠. 제가 본 달빛은 그 시골의 달이었던 겁니다. 외국에서 저는 이방인으로 그들의 음악을 했지만, 한국 사람으로 우리 가곡을 부를 땐 온전히 저희 것을 부르는 마음이었어요. 굉장히 편안하고 즐거웠어요.”
두 번째 묶음에서는 밤하늘을 장식하는 달과 별을 노래했다. ‘달밤’에 이어 ‘달무리’(박목월 시·윤이상 곡)와 ‘별’(이병기 시·이수인 곡)을 들려줬다.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은 애틋하다. 간절하다. 앉으나 서나 온통 그 사람만 떠오른다. 연광철은 눈 감고 감상하면 더 좋은 3곡을 연주했다. ‘그리워’(이은상 시·채동선 곡)에서는 “그대 가슴엔 내가 / 내 가슴에는 그대 있어 /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라는 노랫말이 아름다웠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 그대 그대 있음에 그대 있음에 / 내맘에 자라거늘” 지금이야 유튜브에 연광철이 노래하는 모습이 여럿이지만, 여러 해 동안 그의 ‘유일한 한국 가곡 동영상’으로 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곡이 바로 ‘그대 있음에’(김남조 시·김순애 곡)다. 천천히 읊조리듯 노래하는데 애절함과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연광철은 노래를 마치자 손수건을 꺼내 송글송글 땀을 닦았다.
이어 내 마음은 호수요, 촛불이요, 나그네요, 낙엽이라는 비유가 인상적인 ‘내 마음’(김동명 시·김동진 곡)을 통해 관객 모두를 감정이입하게 만들었다.
산은 웅장한 자연을 대표한다. ‘산속에서’(나희덕 시·김택수 곡)는 신작 가곡이다. 우리 가곡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되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담아 새 가곡을 노래했다. ‘산’(김소월 시·이건우 곡)에서는 불귀(不歸)라는 시어가 오랫동안 머리를 맴돌았다.
꽃은 세밀한 자연을 대표한다. ‘산유화’(김소월 시·김성태 곡)와 ‘진달래꽃’(김소월 시·김순남 곡)에서는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의 고독함과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연광철의 목소리를 타고 귀에 꽂혔다.
마지막 묶음으로 ‘보리밭’(박화목 시·윤용하 곡)과 함께 6·25 한국전쟁의 상처가 가득한 ‘비목’(한명희 시·장일남 곡), 그리고 ‘청산에 살리라’(김연준 시·곡)을 들려줬다. 특히 ‘청산에 살리라’는 세상 번뇌 모든 시름을 잊고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 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노래지만, 연광철의 보이스를 거쳐 ‘음악에 살리라’로 번역돼 들렸다.
앙코르는 ‘그 집 앞’(이은상 시·현제명 곡)과 ‘이별의 노래’(박목월 시·김성태 곡) 두 곡을 노래했다. “아아~ 아아~ 나도 가도 너도 가야지”라는 노랫말은 언제 들어도 절절했다.
<백브리핑> 연광철과 신미정이 무대로 나와 막 스타트를 끊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두 번이나 울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무대만 주시했던 관객들에게 찬물 뿌리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연광철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객석을 향해 전화 받으시라는 손짓을 보냈다.
공연을 주최한 픙월당은 두툼한 프로그램북 대신에 심플한 4쪽짜리 하드커버 전단지를 제공했다. “바스락거리지 않도록, 한 번반 열면 되도록 최소한 내용한 네 면에 담았습니다. 눈 대신 귀와 마음을 열어 둡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멋졌다.
분위기가 비슷한 곡끼리 묶어 6개 그룹으로 프로그램 순서를 만들었다. 한 곡 끝날 때 마다 박수치기 보다는 각 그룹이 끝날 때만 박수쳤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객의 ‘관크’(관객 크리티컬의 줄임말로, 기침·핸드폰 떨어지는 소리·안다박수 등으로 공연 관람을 방해하는 행위)는 늘 공연의 감동을 떨어뜨리는 옥에 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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