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리뷰] 고음 내려놓고 저음과 중음으로 승부...더 큰 내면의 울림 전해준 박혜상

새 앨범 ‘숨’ 발매기념 리사이틀서 변신
‘살아 있는 동안 빛나라’ 콘셉트 맞춰 선곡
아쟁 연주에 소리꾼 고영열과 협연 눈길

박정옥 기자 승인 2024.02.15 15:56 | 최종 수정 2024.02.15 15:59 의견 0
소프라노 박혜상이 새 앨범 ‘숨’ 발매기념 리사이틀에서 김건이 지휘한 디토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클래식비즈 박정옥 기자] 소프라노 박혜상이 변했다. 청아한 고음의 마법을 내려놓고 저음과 중음으로 승부했다. 기나 긴 코로나의 시기를 겪으며 깨달은 ‘살아 있는 동안 빛나라’에 딱 들어맞는 선택이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마음이 바뀌었으니, 자연스럽게 음악도 변신했다. 오히려 내면에서 샘솟은 감동의 울림은 더 컸다.

박혜상은 최근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선보인 새 앨범 ‘숨(Breathe)’ 발매를 기념해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김건(창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이 지휘하는 디토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췄다.

소프라노 박혜상이 새 앨범 ‘숨’ 발매기념 리사이틀에서 루크 하워드의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을 부르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드라마틱하게 등장했다. 오프닝 곡인 루크 하워드의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은 무대가 깜깜하게 암전된 상태에서 시작됐다. 합창석 뒤쪽 스크린에 물속을 유영하는 박혜상의 모습이 담긴 뮤직비디오가 플레이됐다. 이 뮤비를 촬영하려고 태국에서 프리다이빙 교육까지 받았다. 무대 안쪽에서 한참 노래를 부르던 박혜상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 나오며 계속 노래를 이어갔다. 하얀 드레스와 어울리는 신비로운 등장이다.

앨범의 첫 곡이기도 한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은 박혜상이 직접 작곡가 하워드에게 의뢰했다. 하워드의 곡 ‘시편’에 세이킬로스의 비문을 넣어 편곡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로 알려진 세이킬로스 비문은 ‘살아 있는 동안은 빛나라/ 결코 슬퍼하지 말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마지막을 청할 테니’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스의 세이킬로스라는 인물이 아내 혹은 어머니를 잃고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글이다.

박혜상은 팬데믹 기간 동안 좋아하는 사람들을 잃으면서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2022년 8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하루 20∼30㎞씩 25일간의 강행군이었다. 이때의 값진 경험과 세이킬로스의 비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앨범을 발매하게 됐다.

소프라노 박혜상이 새 앨범 ‘숨’ 발매기념 리사이틀에서 김건이 지휘한 디토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듯한 명상적인 음악은 어둠 속에서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은’은 성스러웠다. 이어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중 제21곡 ‘방황하는 나의 마음’을 들려줬다.

검정 드레스로 갈아입은 박혜상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4개의 가곡’을 불렀다. ‘쉬어라 내 영혼아’ ‘체칠리아’ ‘은밀한 초대’ ‘내일’은 조용했지만 강력하게 관객을 뒤흔들었다.

박혜상은 스페인 노래에도 특별한 장기를 가지고 있다. 도밍고 오페랄리아에서 ‘사르수엘라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사르수엘라는 노래·대사·춤이 혼합된 스페인 고유의 오페라다. 멕시코 작곡가 마뉴엘 폰세의 ‘작은 별’, 스페인 작곡가 사비에르 몬살바헤의 ‘다섯 개의 흑인 노래’ 중 제4곡 ‘흑인 소년을 위한 자장가’, 멕시코 작곡가 마리아 그레베르의 ‘그대 사랑한다 말했지’를 선사했다.

소프라노 박혜상이 새 앨범 ‘숨’ 발매기념 리사이틀에서 한국 전통 악기인 아쟁의 반주에 맞춰 한국 가곡 ‘어이가리’를 부르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박혜상은 2부에서 한복을 모티브로 한 새로운 블랙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첫 곡은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신부였던 리치니오 레피체의 오페라 ‘체칠리아’ 중 ‘고마워, 여동생들아’를 불렀다. 체칠리아가 숨을 거두며 내뱉는 마지막 고백 장면의 노래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장엄함을 담담하게 표현했다. 숭고한 아름다움을 전해줬다.

박혜상은 기자간담회에서 “저는 애국심이 강한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가곡을 부르거나 한복을 입을 때는 자연스럽게 애국심이 생긴다”며 우리 가곡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번 독창회에서 한국 작곡가 우효원의 ‘어이가리’ ‘가시리’ ‘새야새야’를 불러 한을 풀어냈다.

한국 전통 악기인 아쟁(남성훈)에 맞춰 고음으로 독창한 ‘어이가리’와 처연함 짙은 목소리로 감정을 가득 실어 노래한 ‘가시리’에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새야새야’는 소리꾼 고영열과 함께 듀엣으로 불렀다. 박혜상의 맑고 고운 목소리와 고영열의 숨을 참다 터져 나오는 듯한 거친 탁성이 대조를 이뤘다.

특별 게스트 고영열은 솔로곡으로 여심을 저격했다. 호소력 있는 보이스로 ‘사랑가’를 불러 고막남친이 됐다. 김건이 지휘한 디토오케스트라는 에드워드 엘가의 ‘탄식’을 연주했다.

소프라노 박혜상이 새 앨범 ‘숨’ 발매기념 리사이틀에서 김건이 지휘한 디토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다시 무대에 등장한 박혜상은 풍성한 깃털 장식이 달린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 오페라의 여왕에 딱 어울리는 차림새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 중 ‘아베마리아’는 죽음을 예감한 여주인공 데스데모나가 성모상에 바치는 노래다. 서정적인 선율 속 박혜상의 평온한 호흡이 돋보였다.

빈첸조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에 흐르는 ‘정결한 여신’은 공연의 피날레를 빛내줬다. 디바의 품격에 딱 들어맞는 선곡이었다.

1부와 2부 모두 빠르지 않은 잔잔한 템포의 노래를 집중 배치했는데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작품에서는 검정 드레스를, 생명을 떠올리게 하는 곡에서는 흰색 드레스를 번갈이 입으며 스스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가는 센스가 돋보였다.

박혜상은 앙코르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민요 ‘그라나다’와 레하르의 오페레타 ‘주디타’에 나오는 ‘내 입술은 불타오르고’를 선사했다. 메인 프로그램과는 결이 다른 선곡으로 흥겨움을 안겨줬다.

/park72@classicbiz.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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